의심으로 흔들리는 삶이라고 해서 꼭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프랭클린의 삶이 보여주듯이 엄청난 자신감과 끊임없는 자기 회의를 동시에 지니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불가능해보이는 조합은 모든 위대한 인물과 문명의 특징이다. 계속해서 프랭클린은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의 편견과 분노, 결점, 이기심까지 모이는 법이라고 말한다. 제헌회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회의에서 어떻게 완벽한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의장님, 저는 이 체제가 이렇게 완벽에 가깝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프랭클린은 미국의 어린 주들이 "서로의 목을 벨 것"이라 기대하며 침을 줄줄 흘리고 있을 미국의 적들도 이 사실에 놀랄 것이라고 덧붙였다. - P434
9월 말 대표들이 회의장에서 줄지어 빠져나오는데 그 지역 여성인 엘리자베스 파월이 프랭클린을 붙들고 이렇게 물었다고한다. "닥터,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공화국인가요, 군주제인가요?" "공화국입니다." 프랭클린이 대답했다. "여러분이 유지할 수만있다면 말이죠." 타는 듯이 무더웠던 필라델피아의 여름에 어지럽고도 용감하게 만들어진 미국 헌법은 선물도 당연한 권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완성된 결과물도 아니었다. 이 헌법은 진행 중인작업이자 미래 세대를 향한 도전이었으며 무엇보다 하나의 수단이었다. 딱 사용하는 사람만큼만 선하고 쓸모 있는 수단. - P435
그때는 딸아이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따뜻한 봄날 필라델피아 체스트넛 스트리트를 걷고 있는 지금 대답할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벤이 과거에 노예 소유주였다는사실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노예제도는 지금이나 그때나 옳지않다. 그러나 벤에게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실수다. 위대한 인물들(나는 프랭클린이 위대한 인물이라고 믿는다)은긍정적인 사례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사례로도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반면교사도 교사다. 때로는 그런 가르침이야말로 가장귀중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건국자들의 신화를 파괴하는 대신 그들의 신화를 다시 써야 한다. 우리에겐 신화가 필요하다. 거짓이라는 의미의 신화가 아니라 조지프 캠벨이 정의한 신화, 즉영감을 주고 활기를 북돋는 이야기라는 뜻의 신화 말이다. 모든 - P446
문화에는 그런 종류의 신화가 필요하다. 신화 없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굴하지 말고 결점을 포함한 벤저민 프랭클린의 삶 전체를 들여다보자. 그리고 그가 완벽했는지 아닌지를묻는 대신 다르게 질문하자. 좋고 또 나빴던 그의 긴 인생 이야기는 쓸모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여기서 끝내면 된다. 그러나 그답이 ‘그렇다‘라면 나는 벤이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해 자세를 바로세우고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P447
벤은 제헌회의가 마무리되고 정확히 31개월을 더 살았다. 그의정신은 여전히 예리했으나 그의 몸은 낡은 집처럼 여기저기 삐걱대고 휘어지기 시작했다. 배관에도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벤은 "오래 산 사람, 삶을 끝까지 들이켠 사람은 컵 바닥에 남은 찌꺼기를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늘 쇠퇴와 상실로만 이해하는 과정을 상쾌할 만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동시에 벤은 현실적이다. 그는 찌꺼기의 씁쓸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찌꺼기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체로, 즉 길고 쓸모 있는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물로 받아들인다. 벤은 인간 몸에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질병을 고려하면 자신의 불치병은 통풍과 결석, 노화 세 개뿐이니 아주 운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본인이 겪는 각종 통증과 고통을 곱씹지 않았다. 그를 담당했던 의사 존 존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기 질병을 "주어진 역할을 더 이상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그를 이 세상에서 친절하게 - P448
내보내는" 출구로 여겼다. 프랭클린은 우리가 몸의 주인이 아님을 알았다. 우리는 한동안몸을 빌릴 뿐이다. 몸은 우리에게 쾌락을 선사하고 이 세상에서좋은 일을 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지만 "몸이 더 이상 이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쾌락 대신 고통을 선사한다면" 자연은 우리에게 출구를 제공한다. 프랭클린은 "그 출구는 바로 죽음"이라고말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직관적으로 안다. 짓눌린 팔다리를 절단하거나 병든 치아를 뽑을 때 우리는 프랭클린이 말한 "작은 죽음"을기꺼이 선택한다. 죽음은 이런 목숨 미적분의 논리적 연장선일뿐이다. 마지막에 프랭클린은 우리는 우리 몸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영혼이다." - P449
벤은 남은 시간 동안 "독서와 글쓰기, 친구들과의 대화, 농담, 웃기, 즐거운 이야기 들려주기처럼 본인이 거워하는 활동에몰두했다. 프랭클린 코트에 3층짜리 건물을 증축했는데, 그 건물에는 24명이 모일 수 있는 식당과 함께 그의 자부심이었던 "책이 천장까지 꽂힌" 서재가 있었다. 평소 매우 신중했던 프랭클린에게는 좀처럼 없던 경솔한 행동이었지만 그가 여동생 제인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고, 건축은 아주 재미있는" 일이었다. ,마침내 찾아온 휴식. 벤은 자신의 발명품, 본인이 받은 수많은 훈장에 둘러싸여 자기 삶을 돌아보았다. 긴 삶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정말 쓸모 있는 삶이었을까? - P449
하지만 (여기가 바로 우리가 지독한 가능성주의자가 되는 지점이다)과거가 방사능처럼 유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면? 우리장 속에 있는 좋은 박테리아나 위험한 자외선을 막아주는 오존층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유익한 힘이라면? "과거의 무게"라는 말이 있지만 만약 과거가 전혀 무겁지 않다면? 사실 과거가 믿기 어려울 만큼 가볍다면? 그냥 가벼운 것이아니라 부력이 있어서 우리를 들어 올리고 지탱하고 물에 떠 있게 한다면? 틀림없이 모든 게 바뀔 것이다. - P457
벤에게. 당신이 먼 곳에 있는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 나누는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기 때문에 편지 한 통 정도 더 보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내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지금 홀딱 벗고있어요. 그래요, 완전히 발가벗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다 벗었어요. 지금 나는 ‘수영복‘이라는 것을 입고 있어요. 사람들 앞에서 입는 속옷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부분적 공기욕이죠. 물론 이런 발명품이 왜 필요한지 의아하겠죠. 무언가를 감춘다는 건 곧제약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얘기가 딴 길로 샜네요. 당신이 말 길어지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아요. 당신은 늘 간결함을 추구했죠. 괜찮다면, 어느 여름날 아침 어느 정도 나이 든 남자가 삶은 달걀을 찾아 미시간호에 뛰어드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잘 따라오고 있나요, 벤? - P458
물론 잘 따라오고 있겠죠. 이건 당신 아이디어니까요. 친구 올리버 니브가 중년 남성도 수영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당신이 해준 조언, 기억하죠? 물론이라고, 당신은 주저 없이 대답했죠. 그리고 그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줬어요. 달걀을 하나 구해서 물속 깊이 빠뜨리라고. 두려움을 삼키고 달걀을 찾아 물속에 뛰어들라고 말이에요. 당신은 물에 빠져 죽을 일은 절대로 없다고 올리버를 안심시켰어요. 오히려 "물은 자네의 경향과 반대로 자네를 위로 뜨게 할 것"이라고 말한 뒤 내게도 큰 인상을 남긴 문장을 덧붙였죠. "물 아래로가라앉는 건 자네 생각만큼 쉽지 않다네." 나도 당신 말을 믿고 싶어요. 벤. 진심이에요. 하지만 힘드네요. 지난 몇 년을 그 누구보다 낙천적인 가능성주의자인 당신과 함께했는데도 말이에요. - P459
벤, 이 격렬한 물살을 당신처럼 차분하고 침착하게 통과했다고말하고 싶지만 그건 거짓말일 거예요. 게다가 쓸모 있는 거짓말도 아닐 거예요. 사실 나는 물살에 맞서 싸웠어요. 섭리를 불신했어요. 그런데 가라앉지 않았어요. 수영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떠있었어요. 그 모든 일이 있었는데도 그 모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일지 모르겠어요. 벤. 삶이 넘쳐흐르는 컵일까요, 컵 바닥에 남은 찌꺼기일까요? 무명일까요, 명성일까요 (어쩌면 불가리아 영해 바깥에서까지 이름을 떨칠지도요)? 거친바다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아요. 그게 이 세상의 이치잖아요. 하지만 그곳엔 어떤 형태로든 당신이 있을 거예요. 나를 살살밀고 물 위로 끌어올리면서, 함께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이에요. 왜 당신이 달걀을 추천했는지 알겠어요. 새하얀 달걀이 분명한목표물이 돼요. 등대처럼요. 한 번 더 발차기를 하고 오른팔을 쭉뻗어서 나도 놀랄 만큼 부드러운 동작으로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 P461
달걀을 붙잡아요. 그리고 당신이 수차례 그랬듯 방향을 틀어 다시 발차기를 해요. 위로, 위로, 위로 미끄러지듯 올라가요. 호수가 나를 끌어올리고 잡아당기고 수면 위로, 빛으로 내보내요. 눈을 비비고 목욕을 마친 개처럼 몸을 털어서 귓속의 물을 뺍니다. 공기는 부드럽고 부산한 도시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바버라를 발견해요. 바버라는 물가에 서 있어요. 내가 다친 데 없이 나타나서, 내 얼굴에 떠오른 미소와 내 손에 들린 삶은 달걀을 보고 안도한 것 같아요. 나는 달걀이 노벨상이라도 되는 양, 아니면 불가리아의 두 번째로 훌륭한 명문대학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하게 달걀을 치켜들어요. 당신 말이 맞았어요, 벤. 이 세상은 대체로 꽤 괜찮은 곳이에요.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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