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은 프랑스인을 만날 때 그들의 방식을 따랐다. 얌전떠는 미국인 동료들이 방종과 타락이라고 본 것을 벤은 부드러운 설득으로 이해했다. 존 애덤스는 이 모든 명성 때문에 프랭클린이 자만해졌고 그가프랑스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았다고 불평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프랭클린이 프랑스인의 신뢰를 얻었으며 "벤이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들이 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더 올바른 말일지도 모른다"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 명성은 강력한 힘이다. 좋게도 나쁘게도 쓰일 수 있다. 프랭클린은 이 힘을 좋은 곳에 사용했다. - P383
벤의 공감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의 성장 환경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다른 건국의 아버지들과 달리 벤은 특권층이 아니었다. 그는 숙련공이었고 가죽 앞치마였다. 인쇄공이라는 직업이 공감 능력을 키웠다. 인쇄공은 다양한 관점을 드러내는 글들을 다뤄야 했다. 게다가 활자는 위아래와 좌우가 뒤집어진 상태로 배열해야 한다. 벤 같은 인쇄공들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했다. - P384
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절대 배척하지 않았다. 늘 문을 열어두었고 다리를 남겨두었다. 이런 태도가 큰 도움이 되었지만 때때로 벤은 사람을 너무 믿기도 했다. 에드워드 밴크로프트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벤의 다정한 친구이자 왕립학회의 동료 회원이었으며 비공식 미 대사관의 비공식 비서였다. 그리고 영국의 스파이기도 했다.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밴크로프트는 매주 화요일 오후 9시 30분에 파리 튀일리 정원에 남몰래 숨어들어 속이 빈 나무 안에 밀봉한 병을 집어넣었고 나중에 영국 첨자가 그 병을 회수해갔다. 전형적인 접선 방식이다. 밴크로프트가같은 미국인을 배신한 이유는 평범했다. 돈, 정확히 말하면 연간400파운드의 돈이었다. 그 누구도, 심지어 경계심이 많았던 존 애덤스까지도 그를 의심하지 못했다. 역사가들 또한 19세기 후반이 될 때까지 밴크로프트의 두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다. - P385
오늘날 벤 프랭클린 효과라고 물ㄷ역시 동력으로 작용했다. 벤은 펜실베이니아 의회에서 서기로 일하던 1736년에 이 효과를 우연히 발견했다. 당시 "재력과 학력을겸비한 신사"였던 의회의 새 권력자가 프랭클린을 미워하며 계속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벤은 이 의원에게 굽실거리며 아첨으로 환심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길을택했다. 벤은 이 의원이 희귀하고 귀한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의원에게 그 책을 며칠간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의원은 그러겠노라 했고 벤은 며칠 뒤 예의 바른 메모와 함께 책을 재깍 - P386
반납했다. "다음에 의회에서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먼저 내게 말을걸었고(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태도도 매우 정중했다." 벤은 훗날 회상했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벤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얻었다. "내가 도운 사람보다는 내게 친절을 베푼 사람이 내게 또다시 친절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직관에 반하는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을 도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 않나? 꼭 그런 건 아니다. 프랭클린이 발견하고 최근의 다른 연구들이 입증했듯이 오히려 그 반16대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자신이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이다. 왜일까? 인지부조화가 한 원인이다. 모순되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품기란 어렵다. 그러면마음이 불편해진다. 우리는 마음을 바꿈으로써 이러한 긴장감을가라앉힌다. 나는 조가 싫지만 지금 조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으니 결국에는 조를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그러나 더 단순한 설명도 있다. 우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그럴기회를 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 P387
프랭클린은 언제 발차기를 하고 언제 미끄러지듯 나아가야 하는지, 언제 (미묘하게) 압력을 가하고 언제 힘을 풀어야 하는지를 감지했다. 프랭클린의 전기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던 전하량 보존의 법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전류는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양전하도 음전하도 초과하지 않는 평형상태를 추구한다. 마찬가지로 벤은 영국과 프랑스를 서로 균형을 맞추는 두 개의 힘, 본인들이 알든 모르든 평형상태를 추구하는 양전하와 음전하로 보았다. 그리고 기꺼이 이 관계를 이용해 둘 사이에 긴장을 자아내려 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벤은 식민지 미국과 영국 사이의가짜 평화안을 만들었다. 그는 프랑스 측에서 이 평화안을 보면불안해할 것이며, 이 안을 이용해 미국을 지지하도록 프랑스를압박할 수 있으리란 것을 알았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 이 문서를주머니에 넣어두었지만 결국 사용하지는 않았다. - P388
6. 감사하라. 프랭클린의 동료인 미국 위원들은 프랑스의 도움에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감사를 나약함의 증거로 이해했다. 미합중국이라는 전도유망한 신생 국가에 일찍 투자할 기회를얻었으니 오히려 프랑스가 미국에 감사해야 했다. 프랭클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프랑스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러한 감사의 표현은 우리의 의무이자 이익" 이라고 말했다. 미덕과 쓸모가 또 한 번 융합되는 지점이다. - P388
프랭클린의 이런 감사 철학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던 어린 미국뿐만 아니라 에게도 좋은 결과를가져왔다. 프랭클린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에서 크게 존경받는다. 다른 건국의 아버지들은 글씨 애덤스거리나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만 해두자. - P389
7. 넓은 시각을 유지하라. 벤은 프랑스에 머물던 시기에 "하루살이"라는 제목의 바가텔을썼다. 수명이 겨우 하루뿐인 하루살이의 시각으로 쓴 글이다. 하루살이는 말한다. "나는 여러 세대가 태어나고 번성하다 세상을떠나는 것을 지켜봤다네. 지금 나의 친구들은 젊은 시절 친구들의자녀와 손주들이라네. 아아, 그 시절의 친구들은 이제 가고 없구나! 나도 곧 그들을 따라가야겠지. 지금 아무리 건강하다 한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내게 남은 시간은 7,8분이 넘지 않을 테니." 하루살이는 실의에 빠진다. 결실을 즐길 시간이 없다면 다른하루살이들처럼 꿀을 모아봐야 무슨 소용인가? 친구들은 이 하루살이를 위로하며 후대에 이름이 남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루살이에게 명성이 무슨 의미가있지?" 하루살이는 이렇게 벤의 생각을 대신 전한다. 나는 프랭클린이 이처럼 인생의 무상함을 예리하게 자각했기때문에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 견디지 못했을 폭풍을 헤쳐 나갈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위험성이 극도로 큰 동시에 전혀 크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 P389
벤이라면 어땠을까? 나는 마치 동상이 대답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지나치게 오랫동안 그의 동상을 바라본다. 그러다 깨닫는다. 프랭클린은 이 지역 울타리 담당자를 찾아가 매력적인 얼렁뚱땅 프랑스어로 울타리를 여는 것이 본인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이득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벤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인내심 있게 그러나 끈질기게 주장을 이어갈 테고, 결국 울타리 담당자는 마치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벤인 것처럼 기꺼이 벤을 위해 울타리를 열 것이다. 그러면 벤은 친구들을 만나마데이라를 마시고 체스를 두며 자신의 울타리 외교 이야기로 모두를 즐겁게 해줄 것이다. - P396
1785년 7월 27일 벤은 자신이 탈 런던패킷호가 곧 필라델피아로 출항한다는 연락을 받는다. 승객은 벤과 그의 두 손자인 베니와 템플, 조지 워싱턴의 조각상을 제작하러 마운트버넌으로 향하던 장 앙투안 우동이라는 이름의 프랑스인 조각가, 마담 엘베시우스가 선물로 준 앙고라 고양이 두 마리였다. 승선하지 못한 것은 벤의 짐이었다. 그의 짐은 프랑스의 르아브르 세관에 억류되어 있었다(프랭클린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겨우 짐을 되찾는다). 그날 저녁 벤과 친구들은 스타 여관에서 마지막 식사를 함께즐긴 뒤 바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런던패킷호로 자리를 옮겨잔치를 이어갔다. 그다음 날 프랭클린의 일기에는 딱 한 줄이 적혀 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친구들은 가고 없었고 배는이미 항해 중이었다." 그게 다다. 자기 마음 상태나 자신이 두고온 것, 한때 조국이라 불렀던 국가와 그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길고 쓸모 있는 삶의 마지막 장을 향해 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그 둘과 다시는 재회할 수 없을 것이었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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