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말이다. 레스, 그때 죽은 느낌이다. 내 일부는 정말로 죽었어. 네 엄마가 날 떠난 건 잘한 거야. 아무렴 그랬어야지. 하지만 래리 웨인을 묻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 내가 죽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레스, 그건 아니야. 까놓고 말하자면 나도 내가 아니라 그 친구가 묻히는 쪽을 택할 거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말이야...... 나는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한번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양심에 짐을 지고 살아가는 건 힘이 드는구나, 그러니까 그게 자꾸 생각나고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 친구가죽어야 했다는 사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단 말이다. - P121
빌은 자기가 작아지는 게, 여위어지고 무게가 없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귀를 올려붙이는 강한 바람을 마주보는 느낌이 들었다. 빌은 뛰어 달아나고 싶었지만, 뭔가가 자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형상이 바위의 그림자들과 만나자 그림자들이 그 형상 아래에서, 그것과 함께 움직이는 듯싶었다. 바닥이 기이한 각도로 빛을 받아 뒤틀린 듯했다. 비이성적이게도 빌은 언덕 아래의 자동차 근처에 세워진 자전거 두 대를 떠올리며, - P202
마치 둘 중 한 대를 없애버리면 이 모든 일이 바뀌어, 그가 언덕꼭대기에 올랐을 때 여자가 더이상 나타나지 않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제리가 빌 앞에, 온몸의 뼈가 사라진 듯 축 늘어진채서 있었다. 빌은 둘의 몸,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두 몸이 끔찍할 만큼 가깝게 느껴졌다. 그때 빌의 어깨에 제리의 머리가 내려앉았다. 빌은 손을 들어, 둘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가 적어도 이 정도 의미는 있다는 듯, 상대를 토닥이고 쓰다듬기 시작했고, 눈에서는 눈물이 솟았다. - P203
뒷문 현관 등불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이 유리창에 어렸다. 그는 두 눈을 뜨고 누워서 바람이 집을 뒤흔드는 소리에 귀기울였다. 다시 내면에서 뭔가가 일어나는 게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분노가 아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좀더 누워 있었다. 기다리듯 누워 있었다. 그때 뭔가가 그를 떠나고 다른 뭔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고, 단어들과 구절들이 급류처럼 마음에 차올랐다. 그는 천천히 기도했다. 단어를 하나하나 붙여나가며 기도했다. 이번에는 소녀와 히피 남자도 기도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하게 두자, 밴을 몰고 오만하게 굴고 웃음을 터뜨리고 반지를 끼고, 원한다면 속임수도 쓰라지. 한편, 기도도 필요했다. 두 사람도 기도를 써먹을 수 있을 것이고, 심지어 그의 기도, 아니 특히 그의 기도를 써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모든 이를 위해,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 모두를 위해 다시 기도하며 말했다. "당신뜻에 부합한다면." - P240
과거는 불확실하다. 꼭 어린 시절에 얇은 막을 씌워둔 느낌이다.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이라고 기억하는 일들이 정말로 일어났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부모와 함께 살던 한 여자애가 있었는데ㅡ아버지는 작은 카페를 운영했고 어머니는 거기서 웨이트리스와 계산원으로 일했다꿈결처럼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일이 년 후에 비서양성학교에 들어갔다. 나중에, 한참 뒤에ㅡ그사이의 시간은 어떻게 된 거지? 그 여자는 다른 도시에서 전자부품회사의 접수원으로 일하면서 자기에게 데이트를 신청한어떤 기술자와 가까워지게 된다. 결국 여자는 남자의 목적이 뭔지 알고서, 유혹에 몸을 맡긴다. 당시에는 어떤 직감이 그 유혹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뭔지 떠올릴 수 없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결정했지만, 과거는, 여자의 과거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미래는 여자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P259
우리 아버지는 멍청이가 죽은 후로 오랫동안 아주 예민하고 괴팍하게 굴었다. 나는 어쩐지 그 사건이 아버지 인생에서 평온한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느꼈는데, 아버지 건강이나빠지기 시작한 게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첫째는 멍청이 일, 다음은 진주만 사건. 그리고 다음은 웨나치 근방에 있는 할아버지 농장으로 이사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사과나무 여남은 그루와 소 다섯 마리를 보살피며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내게 멍청이의 죽음은 유달리 긴 어린 시절이 끝나고, 내가 준비되었든 그렇지 않든 어른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ㅡ패배와 죽음이 좀더 자연의 질서에 따라가는 세상으로. - P2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