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해


1960년대 중반, 나는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것 자체가 내겐 버거운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한동안 장편소설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읽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내게서 집중력은 사라져버렸다. 더는 장편소설을 쓸 만큼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지만, 여기서 털어놓기에는 너무 지루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내가 이제 시와단편들만을 쓰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시작하고, 끝낸다. 어슬렁거리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간다. 그건 그 무렵, 그러니까내가 이십대 후반이던 때에 원대한 야심을 전부 잃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발전하기 위해 야심과 작은 행운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 P161

너무 큰 야심과 불운, 또는 운이 전혀 없다면, 그건 치명적이다. 물론 재능은 있어야 한다.
어떤 작가에게는 엄청난 재능이 있다. 내가 보기에 모든 작가에게는 재능이 있다. 하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독특하고 정확한방식, 그리고 그런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정확한 문맥을 찾아내는 능력, 그건 재능과는 다른 무엇인가다. 가프가 본 세상』은 당연히 존 어빙이 보는 놀라운 세상이다. 플래너리 오코너가 본 세상이 있고, 윌리엄 포크너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본 세상들이있다. 치버, 업다이크, 싱어, 스탠리 엘킨, 앤 비티, 신시아 오직, 도널드 바셀미, 메리 로빈슨, 윌리엄 키트리지, 배리 해나, 어슐러 K. 르 귄도 자신만의 독특한 세상을 만들어냈다. 위대한 작가들은 모두, 심지어 단순히 아주 훌륭한 작가들도 자신만의 독특한사변을 통해 세상을 만들어낸다. - P162

내가 말하는 것은 스타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단지 스타일만은 아니다. 그건 작가가 쓰는 모든 글에 담긴 독특하고 분명한 서명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그 작가만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 작가와 다른 작가를 구별지어주는 기준 가운데 하나다. 재능이 아니다. 재능 있는 작가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특별한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작가, 그리고 그렇게 사물을보는 방식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는 한 시대 안에 흔하지않다. - P162

이사크 디네센은, 자신은 날마다 희망도 절망도 하지 않고 조금씩 써나간다고 했다. 언젠가 나는 가로 3인치, 세로 5인치짜리 카드에 그 말을 적어 내 책상 옆 벽에 붙여놓을 생각이다. 내방 벽에는 이미 3x5 카드들이 몇 장 붙어 있다. "서술의 근본적인 정확성은 글쓰기의 유일한 도덕이다." 에즈라 파운드가 한 말이다. 작가가 추구해야 할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만약 작가가 ‘서술의 근본적인 정확성‘을 추구한다면, 적어도 제대로 들어섰다고는 할 수 있다. - P163

내게는 체호프의 단편에 나오는 문장 일부를 적은 3×5 카드가 있다. ".....그리고 돌연 그에게 모든 게 명확해졌다." 나는이 단어들에 경이로움과 가능성이 가득함을 발견한다. 나는 이단어들이 보이는 단순명쾌함, 그리고 은연중에 내비치는 이후벌어질 사건의 암시가 마음에 든다. 이 문장에는 또한 수수께끼도 담겨 있다. 이전까지는 무엇이 그렇게 불명확했나? 왜 이제는그것이 명확해졌나? 무슨 일이 일어났나? 무엇보다도, 그래서어떻게 되었나? 그러한 갑작스러운 깨달음으로 인해 생겨나는결과가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또렷한 안도감 그리고 기대를 느낀다.
나는 제프리 울프가 글쓰기 수업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싸구려 트릭 금지"라고 말하는 것을 어쩌다 엿들은 적이 있다. 그 말역시 내 카드에 들어가야 할 내용이다. 나라면 그 내용을 조금 - P163

바꾸고 싶다. ‘트릭 금지.‘ 수식어는 필요 없다. 나는 트럭을 싫어한다. 소설을 읽다가 트릭 또는 술책을 사용하는 느낌이 들면, 그게 싸구려 트릭이든 아니면 공들인 트릭이든 상관없이 책을 덮어버린다. 트럭은 궁극적으로 지루하고, 아마도 내 집중력이그리 오래가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겠지만, 나는 쉽사리 지루해진다. 하지만 아주 영리하게 멋부려 썼든지, 혹은 그냥 평범하고멍청하게 썼든지와 상관없이, 트럭이 들어간 글을 읽노라면 나는 잠이 든다. 작가는 트럭이나 술책이 필요 없으며, 심지어 주변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작가라면, 바보처럼 보일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가끔은 그냥 멍하니 서서 이런저런 대상을 바라보며 푹 빠져 입을 헤벌리고 감탄할 필요가 있다. 그 대상은 석양일 수도 있고 낡은 신발 한 짝일 수도 있다 - P164

몇 달 전 <뉴욕 타임스 북 리뷰>에서 존 바스가 말하길, 십년전에는 그의 소설 작법 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 대부분이 ‘형식의 혁신‘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제 더는 그런 분위기가 아닌 듯하단다. 그는 1980년대에 작가들이 소시민적인 소설들을 쓰기 시작하는 것에 약간 염려를 했다. 그는 자유주의와 함께 실험 정신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나는 소설 창작에 있어 ‘형식의혁신‘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가까이서 접할 때면 살짝 긴장한다.
‘실험‘은 부주의함과 멍청함 또는 모방의 허가증으로 사용되는경우가 너무나도 잦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게 더욱 고약한 이 - P164

유는 작가가 독자를 학대하고 소외시키는 허가증으로 이걸 이용하기 때문이다. 대개 그런 식의 글은 세상에 대해 독자들에게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알려준다 해도 기껏해야 황량한 풍경, 여기저기에 모래언덕 몇 개와 도마뱀 몇 마리가 있지만 사람은보이지 않는 그러한 풍경 묘사에 그칠 뿐이다. 인간이 알아볼 수있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 그런 곳은 오로지 극소수 과학 전문가에게나 흥미로울 뿐이다.
소설에서 진정한 실험이란, 참신하고, 어렵사리 성취되는 것이며, 기쁨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라. 하지만 모름지기 작가라면 다른 누군가의 관점-가령 바셀미의 관점아가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 바셀미•는 한 명뿐이며, 혁신이라는 미명하에 바셀미의 독특한 감성이나 미장센을 도용한다면 그 작가는 혼돈과 재난을 자초할 뿐 아니라 더욱더 심각하게는 자기 기만까지 하는 셈이 된다.  - P165

진정한. 실험자라면 파운드가 촉구했듯이 대상을 "새롭게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 대상을 발견해야만 한다. 하지만 작가가 제정신이라면 한편으로 우리와 교감을 하길 원할 것이며, 자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싶어할 터이다.
시나 단편에서 일상의, 하지만 적확한 언어를 구사해 일반적인사물이나 대상에 대해 쓰고, 그러한 대상-이를테면 의자, 커튼, 포크, 돌멩이, 귀걸이에 거대한, 심지어 놀랄 만한 힘을 싣. - P165

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평범해 보이는 대사 한 줄로 독자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나보코프가 그러한 예술적 기쁨의 원천을 가진 작가의 예이다. 내가 가장 흥미로워하는 글은 바로 그런 종류이다. 나는 야무지지 못한 엉터리 글을 싫어한다. 그게 실험이라는 미명하에 쓰여진 것이든 그냥 서투르게 차용된 리얼리즘이든 상관없다. 이사크 바벨의 멋진 단편 「기 드 모파상」에서 화자는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그 어떤 쇳조각도 올바른 자리에 찍힌 마침표처럼강력하게 우리의 가슴을 찌를 수는 없다." 이 말 역시 3X5 카드에 담겨야 한다. - P166

에번 코넬이 말하길, 단편을 쓰고 나서 다시 읽으며 쉼표를 모두 제거하고, 그다음에 다시 읽어보며 쉼표를 넣었을 때 같은 자리에 쉼표들이 들어가면 글이 완성된 거라고 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일하는 게 좋다. 나는 무슨 일을 한 뒤 그렇게 신중하게 검토하는 자세를 존경한다. 결국 작가에게 있는 건 단어뿐이니, 기왕이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고 적절한 곳에 구두점을 찍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 잘 표현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작가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단어들이 너무 과장되었다든가 또는 뭔가 다른 이유로 정확하고 올바르지 않은 단어를 썼다면, 어떤 식으로든 단어들이 애매하다면, 독자의 눈은 그 단어들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버리고 작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 P166

한마디로 독자의 예술적 감각을 사로잡지 못한 것이다. 헨리 제임스는 이렇게 불운한 글을 "빈약한 열거"라 불렀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급히 책을 써야 했다거나, 혹은 편집자가 성화를 부렸다거나 부인과 갈라서는 중이었다는 식으로, 자기 작품이 아주 좋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친구들이있다. "시간을 더 들였다면 훨씬 더 나은 글이 되었을 거야." 소설가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 할지라도 여전히 같은 반응을보일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일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는다. 내가상관할 바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만약 더 잘 쓸 수 있음에도 그렇게 쓰지 않았다면, 애초에 왜 쓴단 말인가? - P167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과 그노동의 증거가 아닌가. 나는 그 친구에게, 제발 부탁이니 작가는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먹고살기 위해 할수 있는 일 가운데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쉽고 또한 아마도 더 정직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능력과 재능을 다해 글을 쓰고, 일단 쓴 다음에는합리화를 하거나 핑계를 대지 마라. 어떤 불평도, 변명도 하지마라.
플래너리 오코너는 「단편소설 쓰기」라는 소박한 제목이 붙은에세이에서, 글쓰기란 발견 행위라고 말한다. 오코너는 단편소 - P167

설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으면 대개는 글이 어떻게 풀려나갈지 자기도 모른다고 한다. 또한 자기 생각엔 과연 얼마나 많은작가들이 결말을 미리 알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지 의심스럽다고말한다. 오코너는 「선한 시골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며, 자신은 이 작품이 끝나기 직전까지도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 P168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나무 의족을 단 박사가 이 작품에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정신을차리고 보니 내가 어느 정도 알던 두 여인에 대한 묘사 부분을쓰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둘 가운데 한 여인에게 의족을 단 딸을 만들어주고 말았다. 또한 계속 쓰다가 성경책 판매원을 끼워넣었는데, 과연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판매원이 의족을 훔치는 장면에서 여남은 줄 앞부분을 쓸 때만 해도, 나는 그자가 의족을 훔치게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자가 의족을 홈치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나는 이야기가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168

몇 년 전에 이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오코너가, 또는 누구든 나말고 다른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 P168

나는 이 방식이 나만의 불편한 비밀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쓰는 게 살짝 마음에 걸렸다. 나는이런 방식으로 단편을 쓰는 것이 어떤 식이 되었든 간에 나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코너가 이 주제에 대해 털어놓은 것을 읽고 나는 무척이나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나는 결과적으로 꽤 좋은 단편이 된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내가 그 글을 시작할 때는 단지 첫 문장만있었을 뿐이었다. 며칠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그 문장이 떠나지않았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는 진공청소기를 쓰고 있었다."[<내 입장이 돼보시오 >의 첫 문장이다.] - P169

나는 그 문장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내가 그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서두에서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 이야기를 쓸 시간만 있다면말이다. 나는 시간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하루종일, 아니면열두 시간이나 열다섯 시간이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냈다. 나는시간을 냈고, 아침에 앉아 첫 문장을 썼다. 그러자 다음 문장이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시를 쓸 때처럼 그 단편을 썼다.
한 줄, 다음 한 줄, 그다음 한 줄. 곧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게 내 이야기임을, 내가 계속 쓰고 싶어했던 이야기임을 알았다. - P169

나는 단편에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이나 위협의 느낌이 담긴 게 좋다. 단편에는 약간의 위협이 담긴 게 좋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러면 판매에도 도움이 된다. 뭔가 가혹한 일이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한 긴장이 없다면, 대개의 경우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소설에서 구체적인 단어를 연결해 눈에 보이는 행동을 이끌어내면 어느 정도는 긴장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또한명시되지 않은 것들, 암시, 사물의 잔잔한 (하지만 가끔씩 부서지며 동요하는) 표면 바로 아래의 풍경도 필요하다. - P170

V. S. 프리쳇은 단편소설을 "지나가며 곁눈질로 얼핏 본 무엇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얼핏 본‘이라는 부분에 주목하라. 처음에는 얼핏 본 것일 뿐이다. 이윽고 얼핏 본 것에 생명이 생기고, 순간을 밝히는 뭔가로 바뀌고, 만약 또 한번 말하지만ㅡ우리가 운이 좋다면, 더 넓고 깊은 결과와 의미를 볼 수 있게 된다. 단편소설 작가의 임무는 자신의 온 능력을 그 얼핏 본 것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작가의 지혜와 문학적 기술(재능)이 무르익고, 균형 감각과 사물의 합당성에 대한 감각이 길러지고,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와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파악하는가를 감지할 능력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은 명확한언어를 씀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언어는 독자들을 위해이야기를 밝혀줄 세세한 부분들에 생명을 부여한다. 세세한 부분들이 확고하고 의미를 전달하려면, 명확하고 구체적인 언어를 - P170

써야 한다. 단어들은 너무나도 명확하기에 어쩌면 평범하게 보이기까지 하겠지만, 그럼에도 전해야 할 뜻은 여전히 전할 수 있다. 만약 제대로 쓴다면, 그 단어들은 모든 음을 정확히 때릴 수있다. - P171

영향은 힘이다-조수처럼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이자 특성이다. 내게 영향을 준 책이나 작가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러한 종류의 영향, 문학적 영향에 대해서는 꼭 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내가 살면서 읽어온 모든 것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 어떤작가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부정확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오랫동안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장단편소설의 팬이었다. 하지만 나는 언어라는 측면에서는 로런스 더럴의 작품이 비범하며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더럴처럼 쓰지 않는다. 더럴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나는 내 글이 헤밍웨이의 글과 ‘비슷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헤밍웨이의 작품이 내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고는 말할 - P173

수 없다. 더럴과 마찬가지로, 헤밍웨이는 내가 이십대일 때 처음읽고 존경하게 된 많은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니 나는 문학적 영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다른 영향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 처음에 흘깃 보았을 때는 종종수수께끼 같은, 어떤 때는 거의 기적에 가깝게 보이기도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나를 내리누르는 영향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들은 내가 글을 써나가며 명확해진다. 이러한 영향들은 가혹했으며, 여전히 가혹하다. 그러한 영향들로 인해 나는 이쪽 방향으로 갔고, 그래서 호수의 저쪽 편이 아닌 이쪽 모래톱에 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내 삶과 글에 미친 주요한 영향이 부정적인 것이었다면, (그리고 내가 믿는 것처럼) 억압적이고종종 사악하기까지 한 것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걸까? - P174

나는 기억력이 나쁘다. 이 말은 내가 인생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을 잊었다는 뜻이지만 (확실히 이건 축복이다), 내가 살았던 마을이나 도시, 만난 사람들의 이름, 또는 그 사람들 자체를 설명하거나 떠올릴 수 없는 기간이 꽤 길게 존재한다는 의미도 된다. 커다란 공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사소한 것들이다. 누군가가 무엇인가에 대해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다거나, 누군가의 호탕하거나 기운 없는, 또는 초조한 너털웃음이라든가, 풍경, 누군가의 얼굴에 담긴 슬프거나 당황한 표정 따위 말이다. 또한 나는 극적인 일들도 일부 기억한다. 누군가 분노에 차 칼을 들고 내게 들이댄다든가, 누군가를 위협하는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일을 기억한다. 누군가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계단에서 추락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이런 극적인 종류의 기억은 필요할 때면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내게 대화 전체를 당시의 모든 몸짓과 뉘앙스를 그대로 살려 현재로 불러올 수 있는 기억력은 없다. - P177

물론, 내가 쓴 단편들 중 진짜로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다나는 자서전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내 글 대부분은 내 삶에서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비록 희미할지라도 어느 정도는담고 있다. 그러나 어떤 단편에 담긴 실제 환경이나 가구를 자세히 떠올리려 해보면(어떤 꽃이 있었더라? 어떤 향이 났더라? 등등), 기억나는 게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며 그에 대해꾸며내야 한다.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하며, 그래서 뭐라고 대꾸하고, 그다음에는 그 사람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따위 말이다. 나는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를 만들어낸다. 물론 그 대화에는 언젠가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 들었던 어떤 특정한 구절, 또는 한두 문장이 담길수도 있다. 심지어 그런 문장이 단편의 시작점이 되기도한다. - P179

플래너리 오코너는 한 에세이에서, 작가가 스무 살이 넘으면삶에서 그리 큰 경험을 할 필요가 없다고 썼다. 스무 살 이전에이미 소설을 쓰기에 충분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녀 말에 따르면, 차고 넘친다. 이후에 작가가 창조적 삶을 살기에 충분한 일을 겪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이 말이 맞지 않는다. 이야기 ‘소재‘로 떠오르는 대부분의 것들은 내가 스무 살 이후에 겪은일들이다. 사실 나는 아버지가 되기 전의 삶에 대해 별로 기억하는 게 없다. 내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기 전까지는, 내 삶에서 뭔가 일어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윽고 내 인생에서 뭔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P180

지금 나는 진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달과 조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영향은 그런 식으로 내게 다가왔다.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밀려오는 바람처럼 말이다. 그시점까지 나는 내 삶에서 모든 게, 비록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모른다 할지라도, 내가 희망하는 대로 또는 원하는 대로 어떻게든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 순간 빨래방에서, 그건 전혀 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이 어지럽고 시시한 일로 이루어졌으며, 희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전까지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 - P182

던 걸까? 그 순간 나는 내가 사는 삶이 그토록 동경하던 작가들의 삶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느끼고 알았다. 나는 작가라면 토요일을 빨래방에서 허비하지 않으며, 아이들의 요구와 변덕에 전전긍긍하며 귀중한 시간을 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안다, 알아, 감금, 실명, 고문이나 이런저런 형태를 띤 생명의 위협처럼 창작활동에 훨씬 더 심각한 방해를 받는 작가들이 많이 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도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맹세하건대, 이 모든 일이 그 빨래방에서 일어났다-나는 앞으로도 이런 책임과 당혹스러움 속에서 살아야 할뿐 별다른 변화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상황이 변할 수는 있겠지만, 절대로 더 좋아지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알왔지만, 내가 그걸 감내하고 살 수 있을까? 그 순간 나는 조정이필요함을 알았다. 눈높이를 낮춰야 할 터였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내게는 통찰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통찰력이 뭐? 통찰력은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통찰력이 있으면 삶이 더 고달파질 뿐이다. - P183

오랫동안, 아내와 나는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올바른 일을 하려 애쓴다면 올바른 결과가 있으리라 믿어왔다. 삶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 나쁜 방법은 아니다. 열심히 일하기, 목표, 좋은 의도, 성실, 우리는 이게 미덕이라 믿었으며 언젠가는 보상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언젠가는 그런 시간이 오리라 꿈꿨다. 하지 - P183

만 결국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꿈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선가 아마도 아이오와시티나 아니면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한 새크라멘토에서였던 듯한데, 우리의꿈은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내와 내가 신성하게 또는 가치 있게 여겼던 관점, 모든 정신적 가치들이 시간이 흐르며 부서져갔다. 우리에게 뭔가 끔찍한일이 일어났다. 다른 가족들에게서는 일어나는 걸 본 적이 없는뭔가였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없었다. 하지만 그건 부식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우리가 보고 있지 않던 사이, 어찌된 일인지 아이들이 운전석에 앉은 것이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지만, 아이들이 고삐와 채찍을 잡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던 것과 같은 일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 P184

나는 내가 들인 소위 문학적 노력에 따르는 가시적인 결과물을 보고 싶었다. 퇴짜 편지, 공허한 약속, 기약 없이 원고지와 씨동만 하는 일은 사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리고 필요에의해, 한 번이나 최대한 두 번이면 마칠 수 있는 글들만 썼다. 지글 내가 말하는 건 초고이다. 나는 끈기를 가지고 고쳐썼다. 하지만 그 시절엔, 비록 시간이 걸리기는 했어도 고쳐쓰는 시간을무척이나 기다렸다. 나는 기꺼이 그 시간을 쓸 용의가 있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나는 작업중인 단편이나 시를 서둘러 끝마칠 필요가 없었다. 뭔가를 끝낸다는 건 다른 걸 시작할 시간과 확신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초고를 마친 뒤 끈기 있게 고쳐썼다. 아주 오랜 시간처럼 느껴지던 기간동안 원고를 집에 두고 이걸 바꾸고, 저걸 더하고, 다른 뭔가를 빼는 식으로 가지고 놀았다.
거의 이십 년 동안, 나는 이렇게 마구잡이로 글을 썼다. 물론 좋은 시기도 있었다. 오직 부모만이 느낄 수 있는 성숙한 기쁨과 만족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독약을 먹겠다. - P187

한동야 나는 여전히 벽에 막혀 있었고,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만약 한때 내게 정열이 있었다면, 그것은 꺼진 상태였다.

영향, 존 가드너와 고든 리시. 그 둘에게 나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하지만 내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내 삶과 글을 만들고 움직인 가장 큰 요인이다. 알겠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아이들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비록 이제는 앞날이 상대적으로 더 명확하고주위도 조용하지만 말이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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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어스는 통나무를 받침대 위에 놓았고, 이마의 땀방울이서늘하게 느껴지고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한동안 톱질을 했다. 현관등이 켜졌다. 마이어스는 작업하던 통나무가 완전히 잘라질때까지 톱질을 했다. 두 토막 난 나무를 차고에 가져다놓고, 집에 들어가 욕실에서 씻은 다음, 자기 방의 테이블 앞에 앉아 공책에 썼다. 오늘 저녁 내 셔츠 소매에 톱밥이 묻어 있다. 달콤한 향이난다.
그날 밤, 마이어스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마이어스는 침대에서 나와 창밖으로 나무가 쌓인 뒤뜰을 보았고, 그러다 계곡 그리고 이어진 산맥으로 눈을 돌렸다. 구름에 달이일부 가려져 있었지만 봉우리들과 흰 눈이 보였고, 창문을 열자 달콤하고 시원한 공기가 들어왔으며, 저멀리서 강물이 계곡을따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 P47

이튿날 아침, 마이어스는 밖으로 나가 작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어서 부부가 집을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마이어스는 뒤뜰로통하는 계단에서 솔이 마이어스를 위해 놓아둔 듯한 장갑 한 켤레를 발견했다. 마이어스는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톱질을 하고 도끼질을 했으며, 이윽고 집에 들어가 샌드위치를 먹고 우유를 약간 마셨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 작업을 재개했다. 어깨가 아프고 손가락이 욱신거리고 장갑을 꼈는데도 쪼개진 나무가시가 손에 박히고 물집이 부어올랐지만, 마이어스는 계속 작업을 했다. 마이어스는 해가 지기 전에 이 나무들을 모두 자르고쪼개기로 결심했다. 마이어스에게 이건 생과 사의 문제였다. 난이 일을 끝내야만 해. 안 그러면...... 마이어스가 생각했다. 마이어스는 작업을 멈추고 얼굴의 땀을 소매로 닦았다. - P48

내 아버지 이름은 클레비 레이먼드 카버다. 아버지 가족은 당신을 레이먼드라고 불렀고, 친구들은 C. R. 이라고 불렀다. 내 이름은 레이먼드 클레비 카버 주니어다. 나는 이름 뒤에 붙은 ‘주니어‘라는 부분이 싫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나를 개구리라 불렀고, 그건 괜찮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나를 주니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열세살인가 열네 살 때, 나를 그렇게 부르면 이제 대답을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기 전까지 아버지는 계속해서 나를 주니어라고 불렀다. 그뒤로 아버지는 나를 ‘닥Doc‘이라 불렀다. 그때부터 세상을 뜨던 1967년 6월 17일까지 아버지는 나를 닥 또는 아들이라불렀다 - P143

아버지가 세상을 떴을 때, 어머니는 그 소식을 알리려고 내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당시 나는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서, 인생의목표 사이에서 잠시 쉬며 아이오와 대학의 도서관학과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아내가 전화를 받았을 때 어머니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레이먼드가 죽었어!" 아내는 잠시 어머니가 내가죽었다고 말하는 걸로 생각했다. 그러다 어머니가 계속 이야기를 하며 어느 레이먼드가 죽었는지 확실하게 밝히자 아내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전제 레이먼드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요." - P144

그 시절, 나는 내 가족을 부양하고 생활을 꾸려나가려 애쓰고있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이 연이어 일어나서, 우리는 여기저기로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나는 아버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계속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크리스마스에 나는 아버지에게 작가가 되겠노라고 말했다. 차라리 성형외과 의사가되겠노라고 말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뭐에 대해서 쓸 거냐?" 아버지는 알고 싶어했다. 그러고는 나를 도와주겠다는 듯 - P154

이 말했다. "네가 알고 있는 걸 써. 우리가 낚시하러 갔던 일에 대해 써." 나는 그러겠노라고 말은 했지만, 그러지 않으리라는걸 알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쓴 걸 보내주렴." 나는 그러겠노라고 말은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 시절에 낚시에 대한건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특별히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내가 당시 쓰던 글들을 이해할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는 글을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쓰는 유의 글을 읽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나는 멀리 아이오와시티에 있었고, 아직 아버지에게 못다한 말들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안녕이라는 말도 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새로 시작한 일을 아주 잘하고 있는 듯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다시 기력을 되찾아 아주 자랑스럽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 P155

스물두 살의 아버지가 담긴 사진


10월. 여기 축축하고 낯선 부엌에서
나는 당혹스러워하는 젊은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부끄러운 듯이 웃음지으며, 아버지는 한 손에는
가시달린 노란색 농어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즈배드 맥주병을 들고 있다.

청바지에 데님 셔츠 차림으로, 아버지는
1934년형 포드의 앞쪽 펜더에 몸을 기대고 있다.
자식에게 굳세고 강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는 낡은 모자를 귀 너머로 젖혀 쓰고 있다.
평생 아버지는 용기 있게 살길 원했다.

하지만 두 눈, 그리고 죽은 농어가 매달린 낚싯줄과
맥주병을 힘없이 잡은 두 손은 아버지의 진실을
드러낸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하지만 제가 어찌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 - P157

습니까. 저 역시
제 술병을 제대로 잡을 수 없고, 낚시할 곳은 알지조차 못하니 말입니다.


이 시는 아버지가 죽은 게 시의 처음에서처럼 10월 October이 아니라 6월June이라는 점만 빼면 모두 사실이다. 나는 여운이 있기를 원했기에 1음절보다 긴 단어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이 시를 썼을 당시 느꼈던 감정에 어울리는 달을 원했다. 낮은 짧고, 빛이 희미하고, 공중에는 연기가 맴돌고, 사물이 소멸하는 때를 원했다. 6월은 밤과 낮이 모두 여름다우며, 졸업식이 있고, 우리 결혼기념일이 있으며, 내 아이 가운데 하나의 생일도 있다. 6월은 아버지가 죽기에 적당한 달이 아니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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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곳



포인세티아는 멕시코에서 페튜니아는 아르헨티나에서 왔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 알지 못하는 곳

구립도서관 앞
새로 조성된 화단의 조그만 팻말을 들여다본다
종합자료실 구석에서 발견한 두 발의 고독을 옆구리에 끼고서

맞은편 두서없이 열거된 사랑빛교회 고려마트 금성얼음
한참을 두리번거린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이국의 어린 풀들은

너무 쉽게 시들고 너무 쉽게
눈을 감을 텐데
머지않아 바닥의 거칠고 메마른 흙을 제 손으로 끌어다 수의처럼 걸칠 것이다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마트에서 그득 채운 비닐봉지를 배낭처럼 부둥켜안고서

콜레우스 메리골드 아스타 팜파스그래스
나는 누구인지

읽을 수 없는
색색의 활자가 저녁 바람에 너풀거린다

굶주린 독수리들이 날아든다 전봇대 아래
누군가 토해둔 썩은 내장

목줄을 풀어 헤친 한마리 들짐승이 갈라진 아스팔트 위를 쏘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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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네가 다시 말하더군. 난 무슨 소리인가 싶었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가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지. 노인네는 그 당시를 회상하더니, 잠시 후 말했어. ‘우리는 빅터 축음기하고 레코드판 몇 장이 있었다오, 선생. 밤마다 축음기를 틀어놓고 음악을 들으면서 거실에서 춤을 추었소. 매일 밤 그랬지. 가끔은 바깥에 눈이 내리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오. 1~2월이면 기온이 많이 내려갔지. 하지만 우린 레코드판을 들으면서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춤을 췄다오. 레코드판을 다 들을 때까지췄지. 그러고 나면 불을 지피고, 등은 하나만 남겨두고 다 끈다음 잠자리에 들었어.  - P400

어떤 날은 밤에 눈이 내렸는데 밖이 어찌나고요한지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오. 정말이오. ‘선생.‘ 그가 말했어. 정말 들을 수 있소. 가끔은 눈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조용히 하면, 그리고 마음이 맑고 나와 주변 세상이 조화를이루면, 어둠 속에 누워서 눈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언제한번 해보구려.‘ 그가 말했어. ‘여기도 이따금 눈이 내리지 않소?한번 해보시구려. 여하간 우린 매일 밤 무도회에 갔다오. 그러고나서 잔뜩 쌓아올린 누비이불 안으로 들어가서 아침까지 포근하게 잤지. 아침에 일어나면 입김이 보였소.‘ 그가 말했어.
헨리가 휠체어에 탈 만큼 회복되었을 때, 간호사 한 명이랑 내가 그를 휠체어에 태워서 부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어. 붕대를 - P400

푼지 이미 한참 지났을 때였지. 노인네는 그날 아침에 면도도하고 로션도 발랐어. 목욕가운 위에 병원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알다시피 아직 회복중이었는데도 휠체어에 앉아서 몸을 꼿꼿이세우더라고. 근데 꼭 고양이처럼 긴장한 게 눈에 보였어. 아내의 병실이 가까워지니까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기대심으로 가득한 표정, 뭐라고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되더라고. 나는 휠체어를 밀었고 간호사는 내 옆에서 걸었어. 간호사는 얘기를주워들었는지 둘의 상황을 좀 알고 있었지. 간호사들이란 왜 온갖 것들을 보다보니 조금 지나면 무슨 일을 당해도 시큰둥해지는데, 그날 오전엔 이 간호사도 꽤 긴장했더군.  - P401

병실 문이 열리고, 내가 헨리를 병실로 밀고 들어갔어. 게이츠 부인, 그러니까애나는 아직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머리와 왼쪽 팔은 움직일수 있었어. 애나는 눈을 감고 있다가, 우리가 병실로 들어가니까눈을 번쩍 뜨더군. 아직 붕대를 감고 있기는 했지만 골반 아래쪽만 하고 있었어. 난 헨리를 침대 왼쪽으로 밀고 가서 말했어. ‘손님이 오셨네요, 애나. 손님이 왔다구요.‘ 더는 말이 나오지 않더라고. 애나는 살짝 웃더니 얼굴이 환해졌어. 시트 아래에서 애나의 손이 나오더군. 푸르뎅뎅하게 멍들어 있었어. 헨리는 양손으로 그 손을 잡았어. 손을 들더니 입을 맞췄지. 그러고는 말했어.
‘안녕, 애나, 내 사랑, 좀 어때? 나 기억하겠어?‘ 애나 뺨에 눈물 - P401

이 흐르기 시작했어. 애나가 끄덕였지. ‘보고 싶었어.‘ 헨리가 말했어. 애나는 계속 끄덕였지. 간호사랑 나는 잽싸게 밖으로 나갔어. 병실 밖으로 나오니까 간호사가 엉엉 울기 시작하더라, 억센축에 드는 간호사였는데도. 정말이지 대단한 경험이었어. 여하간 그후로 헨리는 매일 오전, 오후에 휠체어를 타고 거기 갔어.
우리는 두 사람이 점심과 저녁을 부인 병실에서 같이 먹을 수 있게 했지. 나머지 시간에 두 사람은 그냥 앉아서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더군. 이야깃거리가 끝이 없더라구." - P402

나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하늘에서 파란 층이 물러나며 전체적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별들이 나타났다. 금성이 보였고 그 옆으로 저멀리. 그만큼 환하지는 않지만 지평선 위에 분명하게 걸려 있는 화성이 보였다. 바람이 거세어졌다. 나는 바람이 빈 벌판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았다. 맥기니스 부부가 더이상 말을 기르지 않아서 참으로 안되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말들이 거의 어두워진 들판을 가로지르며 질주하는 모습을, 아니면 그저 울타리 근처에서 서로 반대편을 향해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었다. 나는 창가에서서 기다렸다. 아직은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걸, 바깥으로 눈길을 향하고 밖을 내다봐야 한다는 걸 알았다. 볼 것이 남아 있는동안은. - 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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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마지막의 마지막." 지난 일 년간 나는 새로 발견한 레이먼드카버의 단편소설 다섯 편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친구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시인으로서의 나는 ‘마지막까지길이 남으리‘란 울림을 듣는다. 동시에 이 책은 이 비범한 작가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에서 스무 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었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들을 담고있기도 하다.
레이가 죽은 뒤, 훌륭한 소설가이자 레이 작품의 일본어 번역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내인 요코와 함께 나를 찾아온 적이있다. 그때 하루키가 털어놓길, 번역을 하는 동안 레이가 옆에있다고 느꼈으며 그의 전집 번역을 마치는 게 두렵다고 했다. 그 - P9

리고 이제 나는 그가 느꼈을,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이해한다.
이 과업을 통해, 나는 세상을 영영 떠났다고 생각한 이에게서 뭔가 새로운 것을 듣게 됐을 때 같은 즐거움, 극장의 막이 내린뒤 예기치 않게 무대에 다시 나타난 배우를 봤을 때 같은 즐거움을 누렸다. 만약 오늘날 카프카나 체호프의 원고가 담긴 트렁크가 발견된다면, 사람들은 거기 담겨 있는 걸 보러 몰려들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문학과 삶에 있어 존경하던 낯익은 영혼들에 대해 호기심과 향수와 정열을 느끼는 것이다. - P10

레이의 새로운 작품들에 대한 이 발견은 그가 생전에 출간했던 작품들과 관계가 없으면서도 관계가 있다. 이 발견은 그것을바랐던 이들에게 가치가 있다. 어떤 작가를 사랑하면 그 작가의글을 계속해 읽고 싶어지고, 그 작가가 쓴 모든 글을, 탁월한 것, 뜻밖의 것, 심지어 미완성작까지 읽고 싶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의 가치는 글 전체뿐아니라 표현, 문법, 캐릭터에 대한 인식이나 놀라움, 한 줄 한 줄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과 같은 작은 것들에도 배어 있다.
이 책의 원고들은 서로 다른 때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발견됐다. 첫 발견은 1999년 3월, 레이가 세상을 뜨던 당시 나와 함께살던 워싱턴 주 포트앤젤레스의 리지 하우스에서였다.  - P10

나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을 무척 존중하고 사랑한다. 단지 전기적이고 문학적인 가치뿐 아니라, 열정과 명확함 또한 가득 담겨있기 때문이다. [영웅담은 사양합니다]를 처음 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윌리엄 L. 스틸에게 큰 빚을 진 느낌이다. 그는 신문과 정기간행물에서 레이가 그때그때의 감흥으로 쓴 작품들을 모았다. 나는 우리가 발견한 단편소설 세 편을 발표하는 과정에서제이 우드러프가 개인적으로 보여준 상냥함과 협조에 늘 고마워할 것이다. 전부터 이미 돈독했던 우리의 우정은 이 작업을 하는동안 더욱 두터워졌다.
여기 북서부에서는 자연의 하사품을 받기 위해 빗물통을 설치하는 경우가 흔하다. 빗물통은 머리를 감고 식물에 물을 줄 수있는 충분한 연수를 책임져준다. 이 책은 그렇게 하늘에서 곧장떨어진 것을 통에 모아둔 빗물과도 같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 안에 손을 담가 기운을 주고 격려를 해줄 뭔가를, 레이먼드 카버의 삶과 작품에 다시 가까이 가게 해줄 뭔가를 찾을 수 있다.

워싱턴 주 포트앤젤레스 리지 하우스,
2000년 1월
테스 갤러거 - P19

오래전 나는 체호프가 쓴 편지의 한 대목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그와 서신 왕래를 했던 여럿 중 한 명에게 했던 충고로, 대충 이런내용이었다. "친구, 자네는 위대하고 기억에 남을 일을 한 위대한 사람에대해 쓸 필요가 없어." (당시 나는 대학교를 다녔고, 왕자와공작과 왕국의 전복에 대한 희곡들을 읽었다는 걸 감안해주시길. 모험과 그 비슷한기타 등등, 영웅을 그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세우기 위한 과업, 실제 자신의 삶보다도 더 위대해진 영웅들이 나오는 소설들도 읽었다.) 하지만 체호프가 그 편지와 다른 편지들에서 말해야 했던 것들, 그가 쓴 단편들을읽고 난 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사물을 보게 되었다.
레이먼드 카버
「소설의 기법 76」 <파리 리뷰>, 1983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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