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게이하트가 죽고 25년이 흐른 어느 겨울 오후, 해버퍼드의 선량한 주민들은 또 다른 장례식을 위해 묘지에 모였다. 수술을 받기 위해 시카고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던 게이하트씨의 시신이 고향으로 보내진 것이다. 장례식이 열리는 시간치고는 이례적인 오후 4시였으나 기차 도착 시각에 맞춰 정한 일정이었다. 급행열차로 실려 온 관은 영구차로 옮겨져(이때는 현대, 1927년이었다) 루터 교회로 운반되었고 짧게 추도식을 치른 뒤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렇게 큰 장례식이 열린 적이 언제였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게이하트 영감님으로 통한 그는친구가 많았다. 5년 전 폴린이 죽고 난 뒤에도 재단사네 딸 - P211

중 한 명을 가정부로 부리며 줄곧 같은 집에 살았다. 변함없이 시계방을 운영하며 클라리넷 연주도 조금씩 계속했지만, 숨이 달린다며 불평했다. 여름날의 일요일이면 이따금 오래된 사과나무밭으로 나가 연습했다. 사과나무밭은 베어내지않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길고 훌륭한 삶이었다고, 사람들은 걷거나 천천히 차를 몰고 묘지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해버퍼드에 있는 시계 중에 그의 손을 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분명 손이 느리기는 했으나 솜씨 좋은 장인이었다. 오랜 손님들은 간밤에 시계태엽을 감다가 괜스레 망연해졌다. 째깍째깍, 그의 손안에 있던 작은 것은 전과 마찬가지로 똑똑하게 시간을 재고 있는데 게이하트 영감님은 시간의 흐름에서 완전히 튕겨 나간 것이다. - P212

지루하고 공허한 삶을 산 수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해리고든 역시 열정적으로 전시 사업에, 흔히 하는 말처럼 ‘자신을내던졌다. 적십자, 식량 보존 사업 등을 벌였고 종국에는 자금 조달을 도왔던 야전병원에 가서 직접 일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8개월을 보내는 동안 아내가 은행장으로 대행하며 남편의 사업 전반을 관리했다. 그때가 고든 부인의 인생 중 가장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사업가의 성정을 타고난 여자였다.
고든에게 외국에서 보낸 시간은 굉장히 의미 깊었다. 사람들은 돌아온 그에게서 모종의 변화를 느꼈다. 게이하트 영감님과 맺은 우정은 더 긴밀하고 따뜻해졌다. 실로 부자 같은사이였다. 가정에서 맡은 역할도 한층 능숙하게 해냈다. 부부는 전보다 잘 어울렸다. 함께 외출하고 손님을 초대해 저녁을먹었다. 매끈한 바닥과 수많은 화장실이 있는 저택의 분위기는 전처럼 냉랭하지 않았다. - P216

그는 우체국에서 처음 루시를 보고 자기 마음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루시는 지저분한 남자들이득실거리고 사위로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천천히 아버지의 사서함 자물쇠 비밀번호를 맞추고 있었다. 문 너머로 보이는 루시의 몸이 그리는 곡선에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작고, 너무나도 섬세하고, 너무나도 가만했다. 해리는안으로 들어가 루시를 마주하는 대신 번개처럼 뒤돌아 부리나케 떠났다. 하지만 한 손을 들고 서 있는 옆모습을 한 번흘긋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후로 매일 거리에 나설 때마다 저 멀리 지나가는 루시를바라보고 그 옆을 지나쳐야 했다. 루시의 우아함은 걱정 없고 명랑하던 시절보다 내향적인 지금 더욱더 돋보였다.  - P220

해리가 즐거움 없는 결혼 생활을 시작한 후로 1년이 흘렀고 (실로 모든 종류의 즐거움이 박탈된 결혼이라 아내는 아이도 낳지 못했기에) 마음 한쪽에 항상 루시와 함께 산다면 누렸을 삶에 관한 궁금증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루시가 한순간의 변덕 때문에, 한 조각의 간지러운 감상주의 때문에 망쳐버린 것이다. 그러니 고통받으라. 하느님은 아시거니와 자신은 고통받았으니까!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루시를 두고 길모퉁이를 벗어날 때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루시를 벌주겠다는 결심과 앙심 저변의 깊은 곳, 너무나도 깊어서 들여다볼 수도 없는 곳에는 모순적인 확신이있었다. 두 사람 모두 충분히 벌받고 나면 무슨 일이든 일어나리라는 확신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 어쩌면그가 보장된 미래를 다 내던지고 이 마을을 떠나게 될지도몰랐는데, 어쨌든 그와 루시 게이하트는 다시 함께하게 될 터였다. - P222

그렇다. 그는 오래도록 마음 끓였다. 그는 강했으나 고통도그만큼 강했다. 다행스럽게도 세기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가 보급되었다. 그는 카운티 최초의 자동차 소유주가 되었고, 더 좋은 차가 나올 때마다 사고 또 샀다. 그는 가진 땅이 많았기에 도로에 살다시피 하며 여기저기로 다녔다.
주말에는 ‘악마처럼 사납게 차를 몰아 덴버에 다녀올 때가많았다. 운전하며 머릿속 생각을 중얼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상 자동차 엔진에 대고 말하는 셈이었다. 한번은 아내가 동석했는데 깜빡 잊어버리고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래, 종신형을 받은 셈이지." - P226

과거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루시는 몇 시간, 기껏해야 몇주 고통받았다. 하지만 자신은 영원히 고통받아야 했다. 그는루시가 어째서 플랫강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알았다.
고통과 분노가 루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았으니까. 열정과 맹렬함, 앞뒤 살피지 않고 하나의 충동에 자신의 온 존재를 오롯이 불태우는 성정, 바로 그것이 그가 루시에게서 발견한 경이였다. 루시는 감정의 불씨가 붙으면 불화살이 되어끝까지 날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세월이 흐르자 그는 마음속 어둠에 익숙해졌다. 다리를 잃은 사람이 의족을 달고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었고, 땅을 어마어마하게 사들였다. 부동산 가치가 떨어지는 중이었기에 실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주의를 돌려야만 했던 시절에 분주하게 지낼 수있었다. 게이하트 씨와 다진 우정은 위로가 되었다. 일종의 응보였다. 체스판 앞에서 보내는 저녁은 그의 일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게이하트 영감의 시계방이 마을의 그 어느 장소보다 애틋해졌다. 그들은 절대 루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루시가 앉아서 연습하던 피아노는 한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 P227

사소한 것, 실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토록 행복해할 수있다니! 그는 그런 성정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런축복을 누리지 못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해도 외면했을터였다. 하지만 잠시 루시를 통해 엿보는 것, 한순간 귀 옆으로 느껴보는 것은 좋았다. 가만히 서서 동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새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의 옆에서느껴지는 기대감에 저릿저릿했다. 사냥복과 단단한 근육 위로 거센 봄 소나기가 퍼붓는 듯했다. 몸이 경이롭도록 자유로이 가벼워졌고, 핏속을 질주하는 불꽃에 이를 악물게 되었다. - P229

집을 나서자 겨울 한낮의 강렬한 햇살이 마지막으로 저 밑의 마을에 내리쬐고 있었고 무성한 나무 꼭대기와 교회 첨탑이 황동처럼 빛났다. 이제 해버퍼드를 떠나는 일은 없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곳을 영영 떠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겪었다. ‘고향‘이 무엇이겠나, 결국 실망을 겪고 참아내는 법을 배우는 곳 아니겠나? 게이하트 가족이 살던 집을 떠나는길,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잠시 보도에 멈춰 서서 지금껏 수천 번은 족히 그랬던 것처럼 세 개의 가벼운 발자국을바라보았다. 달아나려는 발자국을.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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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가다듬자 식당 맞은편 끝에서 수석 웨이터와 이야기하는 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웨이터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더니 식당을 떠났다.
루시는 천천히 얼음물을 마셨다. 거짓말을 한 것이 부끄러웠다. 루시는 진실한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러나해리에게 감정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에 사건으로 충격을줘야만 했다. 루시는 해리가 타고난 무감한 성정,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무시하고 넘겨버리려는 태연스러운 태도를 참지 못하고 순간 이성을 잃었다. 해리가 자신의완력과 커다랗고 건강한 몸집을 이용해서 몸이 없는 감정을,
믿음과 열정을 조롱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줄곧 알았으면서 왜 그에게 잘해주려 했을까? 뭐, 이제는 끝났다. 일찌감치 그의 어리석음과 자만심을꿰뚫었다면 좋았으리라. 어쨌든 성공한 것 같았다. 해리는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 P120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루시는 몸이 아프고 쑤셨다. 잠시도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부리나케 아우어바흐의 연습실로갔다. 개인 지도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우어바흐는 손에 신문을 든 채로 루시를 맞아주었다. "이것 봐라, 루시, 클레멘트가 5월 3일 뉴욕에서 두 번째 공연을한다는 광고야. 시카고에 오자마자 떠나야겠구나. 공연이 굉장히 성공적인걸."
중요한 것은 바로 그거였다. 루시는 즉시 기분이 나아졌다.
서배스천이 잘 지내고 있다면 다른 건 상관없었다. 아우어바흐도 평소보다 정신이 맑은 것 같았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워낙유한 성격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도 집중력을 발휘해 루시의 연주를 비평했다. 중년다운 가정적이고 만족스러운 그의생활 저변에는 뛰어난 음악적 지능이 있었는데, 자주 드러나는 특성은 아니었다. 한편 루시는 현실을 잊기 위해 연주에 몰두했다. - P122

루시는 서배스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자신을 감싸는 포옹 속에서 가망 없는 절망을 느꼈다. 가로등을 지날때 루시는 고개를 들었고, 번쩍이는 빛 속에서 서배스천의 얼굴을 보았다. 아, 바로 그때 떠올랐다! 서배스천이 <우리 둘은 작별했네>를 불렀던 밤, 그가 자신의 삶을 바꾸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던 밤이 그런 예감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런 예감은 미래에서 온 것이었다. 분명 그날이 예고해줬네, 이 이별의슬픔도 그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릴 운명이었다. 두 사람 모두그것에, 서로에게 매달렸으나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P135

애초부터 이 남자를 향한 루시의 사랑에는 슬픔의 그늘이있었다. 아는 사이가 되기 전부터 그랬다. 거리에서, 미술관계단에서, 대성당 현관에서 우연히 그를 알아보았을 때 루시의 마음이 동한 이유는 그의 얼굴에 어린 외로움과 실망의 기색 때문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요즘, 루시는 이따금 마담드 비뇽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가 아주 오랫동안 열렬히 기도하던 성당에 가보고는 했다. 그곳은 루시가 모르던 슬픔에 바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루시는 그가 무릎 꿇었던 곳에 무릎 꿇고 앉아 슬픔이 아닌 그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간간이 그의 안부가 도착했다. 절절한 사랑의 편지라기보다는 짧은 메모였다. 일이나 루시의 연습에 관한 몇 마디가적혀 있었다. 그리고 항상 루시만을 위한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 공간에 관한 일화, 추억, 문장 한토막, 인간적인 이야기. 그가 재깍재짝 일정을 알려주었기에루시는 어느 때고 그의 소재를 알 수 있었다.  - P145

그해 플랫 계곡에서는 파랗고 노랗게 물든 긴 가을이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11월 내내 해버퍼드의 여자들은 1902년의 최신 유행인 맞춤 정장에 때때로 작은 털목도리를 두르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 누구도 겨울 외투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무들은 여전히 시멘트 보도 위로 풍성한 금빛 잎사귀를 드리웠다. 강가의 커다란 미루나무는 여름에 비해 나긋해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흰색으로, 은색으로 빛났다. 공기에도 특별한 우아함이 깃들었다. 비 내리는날이 적어서 옥수수수염이 그슬리기 시작했기에 불평할 이유가 충분한 농부들조차 매일 아침 들판으로 나올 때면 내년에는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고, 삶은 제법 수지맞는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 P152

"좋은 아침, 해리."
해리가 고개를 들고 모자를 벗은 뒤 외쳤다.
"우와 좋은 아침이야, 루시!" 여기서 만나다니 놀랍다는 듯한 태도였다. 루시가 떠났다가 돌아온 적 없다는 듯, 두 사람사이에 특별한 우정 같은 것은 없었다는 듯. 중요하지 않은고객의 부인이나 딸을 상대할 때 쓰는 가식적이고 깍듯한 목소리였다. 은행으로 소유권을 빼앗긴 가여운 농장의 여자 대하듯 쾌활한 태도로 루시를 무시했다. 안경을 쓴 것도 아닌데마치 눈앞에 두꺼운 렌즈가 있는 것 같았다. 날카롭게 반짝이는 엷은 푸른색 눈, 고드름처럼 차디찬 눈. 해리는 루시에게매정하지 않았다. 완전히 무심했다. 그리고 우체국을 빠져나와 편안하고 자신만만한 발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야구 선수시절, 그가 플랫 계곡에서 제일가는 투수였고 꼬마 루시는관람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그 시절에 마운드로 걸어 나갈때마다 보여주던 발걸음 그대로였다.
루시가 해버퍼드로 돌아온 뒤로 줄곧 이런 만남이 계속되었고, 해리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똑같은 놀라움을 꾸며냈고, 똑같은 표정을 지었고, 똑같은 목소리를 냈다. 상대는 그의어조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인데도. 해리가 당황하거나 퉁명스럽게 굴었다면 루시는 어떻게든 화해를 시도했을 것이다. - P157

햇살이 환한 오후 내내 루시는 낮게 드리운 사과나무 가지아래 바삭바삭한 황갈색 잔디에 누워 있었다. 사과나무밭은면적이 12만 제곱미터 정도 됐고 완만한 오르막이었다. 루시는 가장자리에 누워서 구불구불 얽히고설킨 나무들이 쭉 늘어선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가지에는 작고 빨간 사과가 달려 있었고, 희끗희끗 시들한 초록 잎사귀도 몇 장 보였다. 사과밭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먹을 만한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 부드러운 가을이 오래도록 늑장을 부리는 계절, 루시는하루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오랫동안 자기 멋대로 자란 사과나무들의 모양에는 어딘가마음의 위로가 되는 구석이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 루시는 추억과 생각에 잠겨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헤아릴 수있었다. (먼 과거인 것만 같은) 그날 아침 친절한 아우어바흐 부부가 와서 루시를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갔던 것을 기억했다. 파울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고도 알았다. 루시가 당장 이곳을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이제 다시는 시카고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 P163

한순간 얼어버린 마음, 한순간 부서져 버린 세상, 서배스천의 죽음은 그런 뜻이었다. 루시는 남겨진 세상에서 길게 호흡하거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기억으로 되살린 세상에서만 숨 쉴 수 있었다.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건만,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유년을 보낸 집을 둘러보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경해서 만지기조차 두려웠다. 자기 침대에 누워도 몸이뻣뻣해졌고, 무언가가 아름다운 마음속 추억을 앗아 갈 것만같아서, 그런 추억이 전부 망상이며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설득할 것 같아서 경계하게 되었다. 루시는 오직 사과나무밭에서만 안전했다. 이곳에서는 한때 삶과 함께하던 감정들이되살아났다. - P164

루시는 그 비겁한 결박을 끊어내려 애쓰느라 기진맥진하고 싸늘해진 몸으로 꿈에서 깼다.
그러면 다시 잠들지 못해 덜덜 떨면서 남은 밤을 지새웠다. 왜 루시는 서배스천에게 이 남자가 기어코 당신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하지 않았을까! 대체 왜 그의 발밑에 몸을 던지고 목퍼드를 조심하라고 애원하지 않았을까! 목퍼드가 비겁하고 시샘하고 배신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건만!
이런 끔찍한 밤을 지날 때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것조차루시의 통제력을 산산이 부숴놓았다. 그러면 춥고 두렵고 불안한 몸을 안고 이곳 사과나무 밑으로 왔고, 조금씩 마음의짐이 줄어들고 단단한 가슴속 응어리가 풀어졌다. 그런데 이제 사과나무는 베어져 사라지게 되었다. 올가을 오래된 나무들은 생의 마지막 햇볕을 쬐고 있었다 - P166

분명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고, 육체적인 매력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매력이 있었다. 동정심, 관용적인 이해심 같은 것이. 오래된 노래들, 케케묵은 노래들을 부를 때도 그 가치를 십분 보여주었다. "대리석 회랑에 사는 꿈을 꾸었어요" 하고 노래할 때는 으레 강조하는 부분을 넘겨버리고리듬을 약간 바꾸었다. 낡고 실없는 가사를 근사하게 표현해신선함을 부여했다. 거칠게 다뤘다가는 산산이 바스라질 압화라도 되는 듯 가사에 깃든 감정을 섬세하게 노래했다.
무슨 소용일까, 루시는 궁금했다. 따분한 사람들에게 따분한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이 가련한 가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청춘, 외모, 지위, 고음까지. 그런데도노래를 너무나 잘했다! 루시는 함께 무대에 올라 가수의 노래를 도와주고 싶었다. 마음속에서 불꽃처럼 격렬한 흥분이퍼덕거렸다. 오늘 밤 당장 떠나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기차나 잡아타고 탁월함을 추구하는 세상으로, 저 가수가 추락하기 전에 속해 있던 세상으로 도약해야 했다. - P189

그날 밤 루시 안의 모든 것이 부드러운 황혼의 빛을 통과해 밖으로 뻗어나가고 앞을 향했다. 위아래로 생기가 흘러넘치는 인파 가득한 거리, 장미와 치자꽃과 제비꽃이 가득한 창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루시는 꽃을 한 아름 안고 그 속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꽃과 음악과 매혹과 사랑을, 서배스천 옆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모든 것을 원했다. 무슨 뜻일까, 루시가 다시 삶을 갈망한다는 것은? 어떻게혼자서 살아갈 생각을 하는 것일까?
문득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너무나도 선명한 깨달음이었으니 외부에서, 미동조차 없는 적막에서 도래한 것이 분명했다. 만약, 만약 생 그 자체가 연인이라면? 저 먼도시에서, 바다 건너편에서 루시를 기다리는 연인. 루시를 끌어당기고, 유혹하고, 마법을 거는 연인. 루시는 부드럽게 창문을 열고 창가에 무릎 꿇고 앉아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머리카락과 달아오른 볼에 눈송이가 닿아 녹아내렸다.  - P192

아, 이제는 알았다! 루시는 가져야만 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했다. 그 광휘가 아직 지상에 남아 있으니 구하고 싸워 얻어야 했다. 그 속에서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온 마음을 바쳐 천상에 있는 그를 바라본다면, 분명 그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처음부터, 루시가 처음 찾아갔을 때부터 그는 그렇게 노래했다. 이제 루시는 그 진정한 뜻을 알았다.
루시는 창문으로 다가가 눈보라를 향해, 그 뒤에 있는 미지를 향해 팔을 뻗었다. 다가오기를! 전부 돌아오기를! 루시를배신하고 조롱하고 마음까지 부숴놓기를, 그가 바라는 바이니까! - P193

이런 무례라니. 이런 모욕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루시는젊고 튼튼했으며, 세상이 자신을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이렇게 잔인하고 멍청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터였다. 다들 길에 얼어붙은 진흙만큼 멍청했다. 여기서생각하기 시작하면 울음이 터지고 말 것이다. 굴복해서는 안됐다. 어서 갈 길을 가야 했다.
강둑에 다다르자 잠시 자리에 앉아서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스케이트 날이 붙은 다른 신발로 갈아 신었다. 손이 덜덜떨려서 가죽끈을 단단히 조이고 묶는 것도 겨우 해냈다. 자기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해리에게 자신을 길가에 버리고 떠날기회를 주다니, 그날 밤 시카고의 식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런 무례와 악의를 대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지팡이를 짚고 일어선 루시는 보폭을 길게 해서 강가의 얼음위로 나아갔다. 주변을 살펴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꽁꽁 얼어붙은 시골과 꽁꽁 얼어붙은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그들이 절대 모를 빛과 자유의 세계로 돌아갈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 P205

투시는 살피지도 고민하지도 않고 강 중앙의 매끄러운 얼음을 향해 나아갔다. 무언가가 부드럽게 갈라지는 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든 루시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검은 선을 포착했다. 잽싸게 뒤돌았으나 빙판이 갈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조각난 얼음이 기울어져 루시는 차가운 강물에 허리까지 빠지고 말았다.
두렵다기보다는 흥분되었다. 부주의한 탓에 곤경에 빠졌으니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 물이 아주 깊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얼음 위에 팔꿈치를 걸친 상태였다. 바닥에 발이닿으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루시는 지금 자신이 강 본류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발로 조심스럽게 물속을 훑는데 무언가에 발목을 잡혔다. 강바닥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던나뭇가지에 스케이트 날이 걸린 것이다. 지난봄 동안 유입된강물에 휩쓸려 온 나무였다. 루시는 팔 밑에 있던 얼음에서 미끄러져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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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배스천 역시 흡족하고즐거운 듯했고, 아주 친절했다. 심지어 루시는 서배스천이 자신의 미숙하고 무지하고 그다지 총명하지 못한 면을 좋아한다고 느끼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과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맺은 우연한 관계였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그 관계에 지분이 없었다. 루시는 이 남자의 삶 한복판에 뚝떨어졌고, 그의 현재와 과거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을 취했다. 루시가 서배스천의 반주를 맡는다는 것은 한 시절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다정함 역시 꿈일지 몰랐다. 그렇다면 이 관계에 진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루시의 감정만 빼고, 감정만은 진실했다. - P68

그리고 천천히 도시를 가로지르며 북적이는 거리에서, 비를 피하려고 서두르다가 자신에게 몸을 부딪는 사람들에게서위로를 얻었다. 도시에는 외로움을 느낄 공간이 넉넉하다고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고, 루시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애달픔에 허덕인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도시는 시골의 허허벌판과 다르기에 혼자 서서 애끓을 일이 없었다. 슬프고 낙담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눈에 띈 적은 처음이라는생각이 들었다. 마차에 묶인 말처럼 홀딱 젖은 부랑자들이 쉼터에 들어가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옆에는 웬 노인이 보도의 쇠창살에서 솟아오르는 수증기를 쐬고 있었다.
보통 루시는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느낄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풍선을 쫓는 남자아이처럼 급한 마음으로거리를 활보했었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이 모든 사람이 동지인 듯했고, 그들에게 겸허한 애정을 느꼈다. - P69

조간신문을 펼쳤다가 제네바에서 보낸 특전을 읽고 오랜학창 시절의 친구가 사부아에 있는 요양원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배스천은 래리 맥가윈이 아픈 것조차 몰랐다. 지난 몇 년간 두 사람은 사이가 소원했다. 하지만 새카만 글씨의 기사 제목에 눈길이 닿자마자 냉랭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열렬하고 넉넉한 청춘의 우정, 함께 보낸 학창 시절만이 현실로 남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학창시절은 어제처럼 생생했다. 그는 누군가가 옆에서 자고 있는 듯 가만히 신문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부고를 읽은 것 같았다. 같았다고? 그것은 자신의 부고였다. 사망 선고는 두 사람, 두 사람의 전성기에 내려진 것이었다.
- P84

서배스천은 친구의 부고 앞에서 자신의 젊음이 조금도 되돌릴 수 없이 영영 사라졌음을 그 어느 때보다 절절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까지는 젊음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막연하게나마 믿었다. 지금은 무기력과 환멸의 시절이지만 전부 일시적인 것이라고, 전에 느끼던 생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모퉁이만 돌면 죽었던 것이 되살아나리라.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면 과거의 자신으로서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 이제 그는 지나간 청 - P84

춘에 관한 세간의 이야기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알았다. 그가 찾던 것은 휘발 물질처럼 공기 중으로 날아가버렸고, 눈앞에는 텅 빈 단지만 놓여 있었다. 공허, 그가 느끼는감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연습실에 있는 사물들이 그에게서멀리 물러나 전보다 냉담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듯했다. 맥가원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 잿빛 하늘, 내리는 비, 식어버린 애정으로부터, 문득 이 공간, 이 도시, 이 나라가 전부 생경하고 적대적으로 느껴졌다.
- P85

과거의 뚜껑을 열었더니 온갖 기억이 되살아났다. 모든 것이 잘못된 듯했다. 지금 돌아보니 인생이 엉망진창이었다.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보금자리라고 부를 나라도 집도 가족도 없고, 곧 친구도 다 없어질 터였다. 이런 꼴이 되었으니 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한들 자축하기 힘들었다. 그에게는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계, 이 세상, 한 고장, 한핏줄과 맺은 관계가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 관계는찾아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마음을 쏟으면 부지불식간에 다져지는 것이었다. 실로 생활 방식이어야만 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든 그에게는 없었고, 그는 그런 관계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우정 래리는 가장 아끼던 친구였다. 여성과의 사랑? 그 영역에서는 달콤하게 추억할 만한 것이 거의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고, 그들은 몇 년간 행복했다. - P85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루시는 해리를 다시 보니 좋았다고 되뇌었다. 오랜 친구를 끊어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해리가 지금처럼 자만하지만 않았어도 아주 지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루시는 옷을 벗으며 생각했다. 해리는 일종의 정신적 근시가 있어서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해리의 자아도취가 싫지 않았던 것이, 그가 자신뿐 아니라 모든것에 도취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서비스나 음식을 트집 잡는시골 사람 특유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실수나 거들먹거림 없이 웨이터들에게 후한 팁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차를 타고 미시간 애비뉴를 한 바퀴 돌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 긍정적인 징조였다! 고든 가족은 훌륭한 말과 마차를 소유하고 있어 거리의 마차를 잡아타는 일은 뼈아픈 사치라 여겼기에 최대한 여정을 단축하려 했다.  - P106

아침 공기는 전보다 따뜻했으나 안개가 피어 도시의 윤곽이 가려져 있었다. 호수는 어렴풋한 푸른빛이었고 그 위로 모든 것이 은은했다. 은빛 안개가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가운데아른아른한 푸른빛과 초록빛이 보였다. 회색 갈매기조차 나른한 날갯짓으로 날아갔다. 곧 봄의 소낙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이런 아침이면...... 루시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아릿함을 느꼈다. 저 멀리서 부드럽게 다가오는 봄, 지상에 닿기 전이미 하늘의 색채 속에서 만발한 봄이 엿보일 때면, 내면에서마음이 부서질 듯한 강렬한 갈망이 깨어났다. 이제야 발견한행복감은 어디로 간 걸까? 모든 것이 행복을 위협했다. 세상의 작동 방식이 행복을 반대했다.  - P110

행복이 루시에게서 달아났다. 머릿속에 있던 매혹적인 멜로디를 잊어버린 듯, 그 분위기와 그것을 들었을 때 느끼던 기쁨은 기억나지만 정확한 선율은 도통 떠올릴 수 없을 때처럼 루시는 행복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루시는 오늘 같은 삶, 다른 종류의 삶을 받아들일 수없었다. 숨이 막혔고, 내면에서 광적인 두려움이 싹텄다. 그삶으로 영원히 곤두박질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자기삶과 육체를 놓아버리고 그저 욕망으로 남을 수만 있다면, 쓸데없는 것은 다 놓아버리고 갈매기와 함께 하늘 위로 날아올라 저 멀리 변화하는 파랑과 초록의 세계로 갈 수 있다면!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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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강 유역에 있는 작은 마을 해버퍼드에서는 여전히 루시 게이하트 이야기를 한다. 분명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것은아니다. 생은 계속되고 우리는 눈앞의 일상을 살아내야 하니까. 하지만 루시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면 다들 낯빛이나 목소리가 은근히 밝아지며 허물없는 눈동자로 넌지시 말한다. ‘그래, 너도 기억하지?‘ 부단히 움직이는 자그마한 루시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춤을 추고 스케이트를 타고 앞만 바라보며발 빠르게 걸어가던 루시, 꼭 둥지로 돌아가는 새처럼.
눈이 펄펄 내리는 날이면 노인들은 창밖을 내다보며 루시가 머프로 볼을 감싸고 눈보라 사이로 부리나케 걸어가던 모습을, 추위에 떨지도 않고 그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춤추듯 - P9

발걸음을 내딛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루시는 여름의 열기 속에서 긴 그림자가 드리운 거리를 걷고 땡볕에 끓어오르는 광장을 가로지를 때도 겨울과 마찬가지로 발걸음이 잽쌌다. 숨 막히게 뜨거운 8월의 정오, 말은 머리를 숙이고 인부는 ‘쉬엄쉬엄‘ 일하는 시간에도 결코 쉬엄쉬엄 생활하지 않았다. 추운 날에는 살아 있다는 감각이 강렬해진다고. 언젠가 루시가 말했다. 분명 더운 날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 P10

게이하트 가족은 해버퍼드 중심가에서 1킬로미터쯤 명어진 서쪽 끝자락에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저 멀리 게이하트랙‘이라고 일컬었고 한여름에 다녀오기에는 꽤 먼 거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시는 자신을 쏙 빼닮은 걸음걸이, 자제할 수 없는 명랑한 마음이 묻어나는 잽싼 발걸음으로 하루에 열두 번씩 그 길을 오가고는 했다. 루시가 걸어갈 때면 정원에서 꽃을 가꾸던 나이 지긋한 여자들은 저 멀리 어룽어룽한 여름 나무 그늘 밑에서 빛나는 흰 형체만 보고도 특유의 움직임 덕에 누구인지 늘 알아보았다. 그렇게 루시는 산울타리와 라일락 덤불과 보드라운 초록 포도 덩굴과 줄줄이 핀노랑 수선화 옆으로 걷고 또 걸었으며, 분명 그 모든 것을, 입고 있는 여름옷과 공기와 햇볕과 활짝 피어나는 세상까지 만끽하고 있었다. 루시의 성정은 제 움직임과 닮아 직접적이고거침없고 유쾌했다. 금빛이 감도는 갈색 눈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의 갈색 눈동자는 부드러운 빛깔이 아니라 소위 ‘호랑이 - P10

눈동자‘라고 부르는 콜로라도 암석처럼 금빛이 점점이 번쩍이는 눈이었다. 피부는 까무잡잡한 편이었는데, 입술과 볼은짙은 붉은빛 작약처럼 색이 깊고 벨벳 같았다. 입매는 다정하고 즉각적이라 마음에 새로운 감정이 드리울 때마다 은근히달라지고는 했다.
오랜 친구들에게 루시의 사진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친구들이 사랑한 것은 그의 명랑과 기품이었다. 루시를 보고 있으면 살갗 아래서 펄떡이는 생이 느껴졌다. 앳되고 아름다운생명만이 누리는 독특한 광채가 있었다. 꽃이 핀 정원에 해가뜨면 처음 한두 시간쯤 목격할 수 있는 그런 광채였다. - P11

루시가 음악을 공부하러 시카고로 떠났을 때 우리는 아쉬위했다. 그때 루시는 열여덟 살이었다. 재능은 있었으나 무사태평해서 자기 앞날을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경력‘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음악을 자연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라고, 기껏해야 나중에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돈벌이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루시의 아버지 제이컵 게이하트는 동네 음악대를 이끌었고, 시계방을 운영하며 가게 뒤편에서 클라리넷과 플루트,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루시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초급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어린이들은 자기들을 꼬맹이 취급 하지 않아서 루시를 좋아했다. 학생들은 루시 눈에 잘 보이려고 애썼다. 특히 남자아이들이. - P11

루시는 졸리고 몽롱해 온기가 달가웠다. 끝없이 흰 평야의그림자와 침묵 속으로 질주하는 썰매는 아주 작은 점처럼 보였다. 문득 루시가 화들짝 잠기운을 떨치더니 꽁꽁 싸맨 담요밑에서 꿈틀거렸다. 어둠이 짙어지는 하늘에 떠오른 첫 별이보였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작은 은색 별이 신호처럼 반짝이며 지금 이곳에 속하지 않은 다른 생과 감정을 암시했다.
루시는 압도되었다. 단 한 가지 갈망으로 별에 손을 뻗었고별이 그의 손을 맞잡았으며, 그 사이에서 깨달음이 반짝였다.
저 미지의 황무지에 있는 무언가도 그 깨달음을 알았다. 아주오래전부터, 앞으로도 영원히! 저 먼 곳의 아득한 무언가를향해 손을 뻗는 행복은 영원한 것이었다. 루시가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사소한 일에 들뜬 것이 아니었다.
순간의 깨달음은 잠시 머무르다 사라졌다. 그러자 다시 모 - P17

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루시는 눈을 감고 해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겨우 닿을 뻔했던 것으로부터 뒷걸음질했다. 너무나도 찬란하고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손을 뻗으니 아팠고,
자신이 보잘것없고 길을 잃은 존재가 된 것 같았다. - P18

그런 루시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해리는 눈치챘다. 크리스마스 연휴 내내 루시의 변화를 느꼈다. 어쩌면 전보다 조금 더 차분해졌다고 할 수도 있었다. 새해 전야 댄스파티에서도 해리와, 아니 모든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냉랭하지는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웠으며 그 어느 때보다 장난스럽고 다감하게 오랜 친구들을 대했다. 하지만 그날 파티장에 있던 루시는 과거의 루시와 달랐다. 저녁 내내 그에게 털어놓지 않은 미지의 감정으로 눈동자가 반짝였다. 누군가와 하던 이야기를 멈추는 순간 수수께끼 같은 표정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와 왈츠를 추는 내내 어깨 너머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무언가 굉장히 매혹적인 것을! 그러나 프리메이슨 홀의 카펫 위에서 ‘충돌‘하며 춤추는 사람들은 늘보던 이웃들이었다. 해리는 새해 전야를 좀처럼 잊을 수 없을것 같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루시는 마냥 행복하고 천진한 시골 여자애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지향하는 여자였다. 그는 결심해야만 했다. 오늘 밤 이곳 기차 안에서도 루시는 그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듯했으나 실은 딴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 P28

남은 공연 내내 루시는 자꾸만 주의가 산만해졌다. 때로는집중해서 듣다가도 정신 차리고 보면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에는 겪어본 적 없던 감정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루시의 마음에 닿은 것은 새로운 개념의 예술일까? 그보다는 내밀했다. 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매력? 그 이상이었다. 루시는 생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사랑은 그저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비극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카만 물처럼 인간을 집어삼키는 열정을 발견했다. 이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바깥세상이 어둡고 끔찍한 곳인 것만 같았다. 세상이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된 것 같았다. - P36

마침내 클레멘트가 팔에 코트를 걸고 손에 모자를 든 채무대로 돌아왔다. 동료인 베이스 성악가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몸을 돌려 무대 너머에 대고 이야기했다. 다리를 저는 반주자가 나타났다. 박수가 빗발치는 사이 자기들끼리 무어라 상의했다. 서배스천은 어둑어둑한 무대 앞쪽으로 나아가 바이런 의 시 <우리 둘은 작별했네>에 곡을 붙인 오래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단순하고 슬픈 곡이었으나 그날 밤 클레멘트의 노래를 들은 사람이라면 영원히 잊지 못할 만했다.
집으로 돌아온 루시는 계단을 올라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피곤하고 두려웠으며, 자신을 보호하던 방어막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창문이 부서져 밤의 찬 공기와 어둠이 밀려드는 듯했다. 외투를 입은 채로 앉아 몸을 덜덜 떨며 마지막 노래의 가사를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 P37

우리 둘은 작별했네
조용히 흐르는 눈물
마음이 둘로 부서졌네
오랫동안 이어질 이별

당신의 뺨은 창백하고 싸늘하네
차가운 입맞춤보다도
분명 그날이 예고해줬네
이 이별의 슬픔도 - P38

그 노래가 루시의 삶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잊어보려 했으나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악마의 계시처럼 곁에남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노래는 그 후로도 몇 주 동안이나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 되었다. 처음 노래를 들었던 밤의 불길한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서배스천은 이미 루시의많은 것을 파괴했다. 어떤 사람들은 신변과 재산에 일어난 변화로 인생이 바뀌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감정과 생각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뿐이었다. - P38

해리 고든은 분명 부자였다. 마차에 혈통 좋은 말, 썰매, 총까지 가진 것이 잔뜩이었고, 옷도 시카고에서 맞춰 입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유물과 어울리지 않아서 전부 겉돌았다. 외투는 거칠고 모자는 딱딱했다. 그는 루시가 아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이었다. 고향 사람들은 해리를 반듯한 젊은이라고 불렀고 실로 동네에서는 행실이 성숙하고 자연스러웠지만, 대도시에 나오면 자의식 같은 것이 발현되는지 군중에 섞여 무시당할까봐 조바심을 냈다. 루시는서배스천이 가죽 슬리퍼와 오래된 벨벳 재킷 차림으로 햇살을 등진 채 서 있던 모습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라면 세상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똑같이 행동할 것 같았다. 분명 많은것을 겪어보고 많은 것에 능숙한 사람만 지닐 수 있는 담백함이 있었다. 그의 생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속 깊은 종을 두드리는 듯해서 듣지 못하는 것까지 전부 느낄 수 있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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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 샘의 반짝이는 붉은털은 소년이었던 그와 그의 것이었던 개가 미친듯이 달리곤 하던알팔파 초원과 옥수수밭에서는 하나의 표시둥과 같았다. 그는 오늘밤 내내 운전해서 토페니시의 벽돌 깔린 오래된 중심가로 갔으면 싶었다. 거기 첫번째 신호등에서 좌회전하고, 다시 또 좌회전해서 어머니가 사는 집에 닿으면 차를 세우고 다시는, 다시는 어떤 이유로도 그곳을 떠나지 않을 텐데.
그는 길의 어두운 끝자락에 이르렀다. 곧장 가면 넓은 빈 들판이 있고, 길은 들판을 에워싸며 오른쪽으로 꺾어졌다. 들판에 더가까운 쪽으로는 거의 한 블록을 가도록 집 한 채 없었고, 반대편에 완전히 불이 꺼진 집이 딱 한 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차를 세운뒤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더이상 생각하지 않고 개 먹이를 한줌 폈다. 그리고 좌석 너머로 몸을 기울이고 들판 가까운 쪽 뒷문을 연 후, 먹이를 밖으로 던지며 "가라, 수지" 하고 말했다. 그는 개가 마지못해 뛰어내릴 때까지 개를 밀었다. 그리고 몸을 뒤로빼서 문을 당겨 닫은 후, 천천히 그곳을 떠났다. 그러고는 점점 더속도를 냈다. - P267

그는 자신의 전 생애가 여기서부터 파멸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십 년을 더 산다 해도 ㅡ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ㅡ개를 버린 사실을 극복하지 못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개를 찾아내지 못하면 자신은 끝장이라고 느꼈다. 조그만 개도 갖다버리는 남자라면 털끝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런 남자라면 무슨 짓이든 못하겠으며, 무슨 일에 머뭇거리겠는가.
그는 언덕으로 점점 더 낮게 떨어지는 태양의 부어오른 얼굴을노려보며 자리에서 몸을 움찔했다. 그는 이제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개를 찾아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전날 밤에 개를 버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미치게 생긴 건 바로 나야."
그는 중얼거리고,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P278

그는 길을 따라 계속 차를 몰아갔다. 이젠 완전히 어두워져서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겁이 나기 시작해서 나직이욕설을 내뱉었다. 이리저리 바뀌고 이랬다 저랬다 하니, 풍향계같은 꼴이라고 자신을 욕했다.
그때 그는 개를 보았다. 그는 자기가 한참동안 그 개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는 어느 집 담을 따라 자라난 풀 냄새를킁킁대고 맡으면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앨은 차에서 내려잔디밭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웅크리고 걸으면서 "수지, 수지, 수지" 하고 불렀다.
그를 본 개가 멈추어 섰다. 개는 머리를 들었다. 그는 쭈그리고앉아 한 팔을 뻗고 기다렸다. 그들은 서로 바라보았다. 개는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앞발 사이에 머리를 늘이고 앉아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다렸다. 개가 일어섰다. 개는 담을 돌아가더니 사라졌다. - P281

제발 조용히 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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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이 되어 처음으로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랠프 와이먼은 제퍼슨 초등학교의 교장이며 위버빌 엘크스클럽 부속 밴드의 트럼펫 독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조언을 들었다. 인생은 아주심각한 것이며, 막 출발하는 젊은이에게 힘과 목표를 요구하는 사업이며, 모두 알듯 매우 힘든 것이지만, 그럼에도 보답을 주는 것이라고 랠프 와이먼의 아버지는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랠프의 목표는 뚜렷하지 않았다. 그는 의사가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의예과 강의와 법학의 역사, 거래법 강의들을 듣다가, 자신이 - P378

의학에 필요한 감정적인 초연함도, 법률 공부에 요구되는 끈질긴독서-특히 그런 독서는 재산과 증여에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므로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계속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과학과 경영학 강의를 들었다. 철학과 문학강의도 몇 개 들었으며,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뭔가 엄청난 발견을 할 찰나에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다. 바로 이 기간에 나중에 그가 그때를 가리켜 말했듯 그의 가장저조했던 시기에 랠프는 자신이 신경쇠약에 걸린 모양이라고믿었다. 그는 남학생 사교 클럽에 들어 있었는데 매일 밤 술에 취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소문이 자자했고, 케그 술집의 바텐더 이름을 따서 ‘잭슨‘이라고 불렸다. -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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