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강 유역에 있는 작은 마을 해버퍼드에서는 여전히 루시 게이하트 이야기를 한다. 분명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것은아니다. 생은 계속되고 우리는 눈앞의 일상을 살아내야 하니까. 하지만 루시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면 다들 낯빛이나 목소리가 은근히 밝아지며 허물없는 눈동자로 넌지시 말한다. ‘그래, 너도 기억하지?‘ 부단히 움직이는 자그마한 루시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춤을 추고 스케이트를 타고 앞만 바라보며발 빠르게 걸어가던 루시, 꼭 둥지로 돌아가는 새처럼.
눈이 펄펄 내리는 날이면 노인들은 창밖을 내다보며 루시가 머프로 볼을 감싸고 눈보라 사이로 부리나케 걸어가던 모습을, 추위에 떨지도 않고 그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춤추듯 - P9

발걸음을 내딛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루시는 여름의 열기 속에서 긴 그림자가 드리운 거리를 걷고 땡볕에 끓어오르는 광장을 가로지를 때도 겨울과 마찬가지로 발걸음이 잽쌌다. 숨 막히게 뜨거운 8월의 정오, 말은 머리를 숙이고 인부는 ‘쉬엄쉬엄‘ 일하는 시간에도 결코 쉬엄쉬엄 생활하지 않았다. 추운 날에는 살아 있다는 감각이 강렬해진다고. 언젠가 루시가 말했다. 분명 더운 날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 P10

게이하트 가족은 해버퍼드 중심가에서 1킬로미터쯤 명어진 서쪽 끝자락에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저 멀리 게이하트랙‘이라고 일컬었고 한여름에 다녀오기에는 꽤 먼 거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시는 자신을 쏙 빼닮은 걸음걸이, 자제할 수 없는 명랑한 마음이 묻어나는 잽싼 발걸음으로 하루에 열두 번씩 그 길을 오가고는 했다. 루시가 걸어갈 때면 정원에서 꽃을 가꾸던 나이 지긋한 여자들은 저 멀리 어룽어룽한 여름 나무 그늘 밑에서 빛나는 흰 형체만 보고도 특유의 움직임 덕에 누구인지 늘 알아보았다. 그렇게 루시는 산울타리와 라일락 덤불과 보드라운 초록 포도 덩굴과 줄줄이 핀노랑 수선화 옆으로 걷고 또 걸었으며, 분명 그 모든 것을, 입고 있는 여름옷과 공기와 햇볕과 활짝 피어나는 세상까지 만끽하고 있었다. 루시의 성정은 제 움직임과 닮아 직접적이고거침없고 유쾌했다. 금빛이 감도는 갈색 눈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의 갈색 눈동자는 부드러운 빛깔이 아니라 소위 ‘호랑이 - P10

눈동자‘라고 부르는 콜로라도 암석처럼 금빛이 점점이 번쩍이는 눈이었다. 피부는 까무잡잡한 편이었는데, 입술과 볼은짙은 붉은빛 작약처럼 색이 깊고 벨벳 같았다. 입매는 다정하고 즉각적이라 마음에 새로운 감정이 드리울 때마다 은근히달라지고는 했다.
오랜 친구들에게 루시의 사진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친구들이 사랑한 것은 그의 명랑과 기품이었다. 루시를 보고 있으면 살갗 아래서 펄떡이는 생이 느껴졌다. 앳되고 아름다운생명만이 누리는 독특한 광채가 있었다. 꽃이 핀 정원에 해가뜨면 처음 한두 시간쯤 목격할 수 있는 그런 광채였다. - P11

루시가 음악을 공부하러 시카고로 떠났을 때 우리는 아쉬위했다. 그때 루시는 열여덟 살이었다. 재능은 있었으나 무사태평해서 자기 앞날을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경력‘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음악을 자연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라고, 기껏해야 나중에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돈벌이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루시의 아버지 제이컵 게이하트는 동네 음악대를 이끌었고, 시계방을 운영하며 가게 뒤편에서 클라리넷과 플루트,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루시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초급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어린이들은 자기들을 꼬맹이 취급 하지 않아서 루시를 좋아했다. 학생들은 루시 눈에 잘 보이려고 애썼다. 특히 남자아이들이. - P11

루시는 졸리고 몽롱해 온기가 달가웠다. 끝없이 흰 평야의그림자와 침묵 속으로 질주하는 썰매는 아주 작은 점처럼 보였다. 문득 루시가 화들짝 잠기운을 떨치더니 꽁꽁 싸맨 담요밑에서 꿈틀거렸다. 어둠이 짙어지는 하늘에 떠오른 첫 별이보였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작은 은색 별이 신호처럼 반짝이며 지금 이곳에 속하지 않은 다른 생과 감정을 암시했다.
루시는 압도되었다. 단 한 가지 갈망으로 별에 손을 뻗었고별이 그의 손을 맞잡았으며, 그 사이에서 깨달음이 반짝였다.
저 미지의 황무지에 있는 무언가도 그 깨달음을 알았다. 아주오래전부터, 앞으로도 영원히! 저 먼 곳의 아득한 무언가를향해 손을 뻗는 행복은 영원한 것이었다. 루시가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사소한 일에 들뜬 것이 아니었다.
순간의 깨달음은 잠시 머무르다 사라졌다. 그러자 다시 모 - P17

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루시는 눈을 감고 해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겨우 닿을 뻔했던 것으로부터 뒷걸음질했다. 너무나도 찬란하고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손을 뻗으니 아팠고,
자신이 보잘것없고 길을 잃은 존재가 된 것 같았다. - P18

그런 루시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해리는 눈치챘다. 크리스마스 연휴 내내 루시의 변화를 느꼈다. 어쩌면 전보다 조금 더 차분해졌다고 할 수도 있었다. 새해 전야 댄스파티에서도 해리와, 아니 모든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냉랭하지는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웠으며 그 어느 때보다 장난스럽고 다감하게 오랜 친구들을 대했다. 하지만 그날 파티장에 있던 루시는 과거의 루시와 달랐다. 저녁 내내 그에게 털어놓지 않은 미지의 감정으로 눈동자가 반짝였다. 누군가와 하던 이야기를 멈추는 순간 수수께끼 같은 표정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와 왈츠를 추는 내내 어깨 너머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무언가 굉장히 매혹적인 것을! 그러나 프리메이슨 홀의 카펫 위에서 ‘충돌‘하며 춤추는 사람들은 늘보던 이웃들이었다. 해리는 새해 전야를 좀처럼 잊을 수 없을것 같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루시는 마냥 행복하고 천진한 시골 여자애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지향하는 여자였다. 그는 결심해야만 했다. 오늘 밤 이곳 기차 안에서도 루시는 그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듯했으나 실은 딴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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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공연 내내 루시는 자꾸만 주의가 산만해졌다. 때로는집중해서 듣다가도 정신 차리고 보면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에는 겪어본 적 없던 감정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루시의 마음에 닿은 것은 새로운 개념의 예술일까? 그보다는 내밀했다. 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매력? 그 이상이었다. 루시는 생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사랑은 그저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비극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카만 물처럼 인간을 집어삼키는 열정을 발견했다. 이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바깥세상이 어둡고 끔찍한 곳인 것만 같았다. 세상이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된 것 같았다. - P36

마침내 클레멘트가 팔에 코트를 걸고 손에 모자를 든 채무대로 돌아왔다. 동료인 베이스 성악가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몸을 돌려 무대 너머에 대고 이야기했다. 다리를 저는 반주자가 나타났다. 박수가 빗발치는 사이 자기들끼리 무어라 상의했다. 서배스천은 어둑어둑한 무대 앞쪽으로 나아가 바이런 의 시 <우리 둘은 작별했네>에 곡을 붙인 오래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단순하고 슬픈 곡이었으나 그날 밤 클레멘트의 노래를 들은 사람이라면 영원히 잊지 못할 만했다.
집으로 돌아온 루시는 계단을 올라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피곤하고 두려웠으며, 자신을 보호하던 방어막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창문이 부서져 밤의 찬 공기와 어둠이 밀려드는 듯했다. 외투를 입은 채로 앉아 몸을 덜덜 떨며 마지막 노래의 가사를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 P37

우리 둘은 작별했네
조용히 흐르는 눈물
마음이 둘로 부서졌네
오랫동안 이어질 이별

당신의 뺨은 창백하고 싸늘하네
차가운 입맞춤보다도
분명 그날이 예고해줬네
이 이별의 슬픔도 - P38

그 노래가 루시의 삶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잊어보려 했으나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악마의 계시처럼 곁에남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노래는 그 후로도 몇 주 동안이나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 되었다. 처음 노래를 들었던 밤의 불길한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서배스천은 이미 루시의많은 것을 파괴했다. 어떤 사람들은 신변과 재산에 일어난 변화로 인생이 바뀌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감정과 생각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뿐이었다. - P38

해리 고든은 분명 부자였다. 마차에 혈통 좋은 말, 썰매, 총까지 가진 것이 잔뜩이었고, 옷도 시카고에서 맞춰 입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유물과 어울리지 않아서 전부 겉돌았다. 외투는 거칠고 모자는 딱딱했다. 그는 루시가 아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이었다. 고향 사람들은 해리를 반듯한 젊은이라고 불렀고 실로 동네에서는 행실이 성숙하고 자연스러웠지만, 대도시에 나오면 자의식 같은 것이 발현되는지 군중에 섞여 무시당할까봐 조바심을 냈다. 루시는서배스천이 가죽 슬리퍼와 오래된 벨벳 재킷 차림으로 햇살을 등진 채 서 있던 모습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라면 세상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똑같이 행동할 것 같았다. 분명 많은것을 겪어보고 많은 것에 능숙한 사람만 지닐 수 있는 담백함이 있었다. 그의 생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속 깊은 종을 두드리는 듯해서 듣지 못하는 것까지 전부 느낄 수 있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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