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스천 역시 흡족하고즐거운 듯했고, 아주 친절했다. 심지어 루시는 서배스천이 자신의 미숙하고 무지하고 그다지 총명하지 못한 면을 좋아한다고 느끼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과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맺은 우연한 관계였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그 관계에 지분이 없었다. 루시는 이 남자의 삶 한복판에 뚝떨어졌고, 그의 현재와 과거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을 취했다. 루시가 서배스천의 반주를 맡는다는 것은 한 시절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다정함 역시 꿈일지 몰랐다. 그렇다면 이 관계에 진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루시의 감정만 빼고, 감정만은 진실했다. - P68
그리고 천천히 도시를 가로지르며 북적이는 거리에서, 비를 피하려고 서두르다가 자신에게 몸을 부딪는 사람들에게서위로를 얻었다. 도시에는 외로움을 느낄 공간이 넉넉하다고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고, 루시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애달픔에 허덕인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도시는 시골의 허허벌판과 다르기에 혼자 서서 애끓을 일이 없었다. 슬프고 낙담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눈에 띈 적은 처음이라는생각이 들었다. 마차에 묶인 말처럼 홀딱 젖은 부랑자들이 쉼터에 들어가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옆에는 웬 노인이 보도의 쇠창살에서 솟아오르는 수증기를 쐬고 있었다. 보통 루시는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느낄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풍선을 쫓는 남자아이처럼 급한 마음으로거리를 활보했었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이 모든 사람이 동지인 듯했고, 그들에게 겸허한 애정을 느꼈다. - P69
조간신문을 펼쳤다가 제네바에서 보낸 특전을 읽고 오랜학창 시절의 친구가 사부아에 있는 요양원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배스천은 래리 맥가윈이 아픈 것조차 몰랐다. 지난 몇 년간 두 사람은 사이가 소원했다. 하지만 새카만 글씨의 기사 제목에 눈길이 닿자마자 냉랭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열렬하고 넉넉한 청춘의 우정, 함께 보낸 학창 시절만이 현실로 남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학창시절은 어제처럼 생생했다. 그는 누군가가 옆에서 자고 있는 듯 가만히 신문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부고를 읽은 것 같았다. 같았다고? 그것은 자신의 부고였다. 사망 선고는 두 사람, 두 사람의 전성기에 내려진 것이었다. - P84
서배스천은 친구의 부고 앞에서 자신의 젊음이 조금도 되돌릴 수 없이 영영 사라졌음을 그 어느 때보다 절절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까지는 젊음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막연하게나마 믿었다. 지금은 무기력과 환멸의 시절이지만 전부 일시적인 것이라고, 전에 느끼던 생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모퉁이만 돌면 죽었던 것이 되살아나리라.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면 과거의 자신으로서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 이제 그는 지나간 청 - P84
춘에 관한 세간의 이야기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알았다. 그가 찾던 것은 휘발 물질처럼 공기 중으로 날아가버렸고, 눈앞에는 텅 빈 단지만 놓여 있었다. 공허, 그가 느끼는감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연습실에 있는 사물들이 그에게서멀리 물러나 전보다 냉담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듯했다. 맥가원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 잿빛 하늘, 내리는 비, 식어버린 애정으로부터, 문득 이 공간, 이 도시, 이 나라가 전부 생경하고 적대적으로 느껴졌다. - P85
과거의 뚜껑을 열었더니 온갖 기억이 되살아났다. 모든 것이 잘못된 듯했다. 지금 돌아보니 인생이 엉망진창이었다.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보금자리라고 부를 나라도 집도 가족도 없고, 곧 친구도 다 없어질 터였다. 이런 꼴이 되었으니 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한들 자축하기 힘들었다. 그에게는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계, 이 세상, 한 고장, 한핏줄과 맺은 관계가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 관계는찾아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마음을 쏟으면 부지불식간에 다져지는 것이었다. 실로 생활 방식이어야만 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든 그에게는 없었고, 그는 그런 관계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우정 래리는 가장 아끼던 친구였다. 여성과의 사랑? 그 영역에서는 달콤하게 추억할 만한 것이 거의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고, 그들은 몇 년간 행복했다. - P85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루시는 해리를 다시 보니 좋았다고 되뇌었다. 오랜 친구를 끊어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해리가 지금처럼 자만하지만 않았어도 아주 지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루시는 옷을 벗으며 생각했다. 해리는 일종의 정신적 근시가 있어서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해리의 자아도취가 싫지 않았던 것이, 그가 자신뿐 아니라 모든것에 도취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서비스나 음식을 트집 잡는시골 사람 특유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실수나 거들먹거림 없이 웨이터들에게 후한 팁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차를 타고 미시간 애비뉴를 한 바퀴 돌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 긍정적인 징조였다! 고든 가족은 훌륭한 말과 마차를 소유하고 있어 거리의 마차를 잡아타는 일은 뼈아픈 사치라 여겼기에 최대한 여정을 단축하려 했다. - P106
아침 공기는 전보다 따뜻했으나 안개가 피어 도시의 윤곽이 가려져 있었다. 호수는 어렴풋한 푸른빛이었고 그 위로 모든 것이 은은했다. 은빛 안개가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가운데아른아른한 푸른빛과 초록빛이 보였다. 회색 갈매기조차 나른한 날갯짓으로 날아갔다. 곧 봄의 소낙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이런 아침이면...... 루시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아릿함을 느꼈다. 저 멀리서 부드럽게 다가오는 봄, 지상에 닿기 전이미 하늘의 색채 속에서 만발한 봄이 엿보일 때면, 내면에서마음이 부서질 듯한 강렬한 갈망이 깨어났다. 이제야 발견한행복감은 어디로 간 걸까? 모든 것이 행복을 위협했다. 세상의 작동 방식이 행복을 반대했다. - P110
행복이 루시에게서 달아났다. 머릿속에 있던 매혹적인 멜로디를 잊어버린 듯, 그 분위기와 그것을 들었을 때 느끼던 기쁨은 기억나지만 정확한 선율은 도통 떠올릴 수 없을 때처럼 루시는 행복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루시는 오늘 같은 삶, 다른 종류의 삶을 받아들일 수없었다. 숨이 막혔고, 내면에서 광적인 두려움이 싹텄다. 그삶으로 영원히 곤두박질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자기삶과 육체를 놓아버리고 그저 욕망으로 남을 수만 있다면, 쓸데없는 것은 다 놓아버리고 갈매기와 함께 하늘 위로 날아올라 저 멀리 변화하는 파랑과 초록의 세계로 갈 수 있다면!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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