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녹슨 맨홀 뚜껑 같은 게
거기 잠자코 붙은 껌 같은 게

나를 본다 내 이름을 중얼거린다
눈을 깜박이는 게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게

나를 기다린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나의 귀가를

어느 날은 컹컹 짖고 어느 날은 냐옹 울기도 하는
횡단보도
절룩이는 다리로 나를 따라 집까지 온다

병원 같은 게
입원실 간이침대 옆 쪼그려 앉은 그림자 같은 게

쉽게 부서지는 게
부서지고도 반짝이는 게 - P12

공병 같은 게

나와 함께다
함께 먹고 함께 잠든다
함께 꿈속을 거닌다 지옥의 숲을 산책하듯이

일어나 아침이야, 흔들어 깨울 수 없지만
재촉할 수 없지만
허둥지둥 문을 나서면

바퀴에 깔린 장갑 같은 게
부르르 손을 떠는 전단 같은 게

주워 들면 피가 조금 난다 - P13




컵을 들고 헤매다
쏟아버린 물

실내는 따뜻하고
둘러앉은 이들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사이 몰래 빠져나가
조용히 흐느끼는 사람의 뒷모습

나는 계속 신경이 쓰여서

내가 다 잘못했어요
말하고 싶어서

말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본다 깊고 탁한 그늘 속
찢어진 그림자처럼 잠긴 그를

침묵으로 허우적대는 그를 - P16

사람들은 모른다
맑게 흐르고 우아하게 스민다

실내는 따뜻하고,

그는 잠시 돌아본다
아무런 뜻도 담겨 있지 않은 빛으로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는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챙긴다
어디 먼 곳으로 떠나려는 듯

가지 마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말하지 못하고
깨진 컵을
테이블 위에 그냥 가만히 놓아둔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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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준 말


조문을 가서 유족과 인사를 나눌 때면 늘 말문이 막힌다

죽음을 기다리는 병실에 병문안을 갈 때도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쾌유를 빕니다
이런 유창한 관용구는 뭐가 거짓만 같은데
그럴 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내게 구박 받던 관용구는 늙은 아비처럼 나를 안아준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도 좋으니
내 것이 아닌 말이라도 좀 흘러나왔으면 싶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말이 그치는 그때,
어둠 속 벽을 떠듬거리듯 나는 말의
스위치를 더듬는다

그럴 때 만난 눈빛들은 잘 잊히질 않는다
그 눈빛들이 나의 말이다

수목장


세상 잘난 척은 혼자서 다 하고 돌아다니다가. 기일이 오면 나무에게 무릎을 꿇는다
비석 대신 정좌한 돌멩이들에게 머리를 숙인다허리를 숙인 풀잎들과 맞절을 한다
아가, 그 맘 잊지 말거라
설날 아침 절을 가르치시던 당신,
마지막 가르침도 절이다

귀의 가난


소리 쪽으로 기우는 일이 잦다
감각이 흐릿해지니 마음이 골똘해져서

나이가 들면서 왜 목청이 높아지는가 했더니 어머니 음식맛이 왜 짜지는가 했더니
뭔가 흐려지고 있는 거구나

애초에 소리였겠으나 내게로 오는 사이
소리가 되지 못한 것들

되묻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에 집중을 한다
너무 일찍 온 귀의 가난으로
내가 조금은 자상해졌다

눈사람


내가 눈을 치우는 게 아니라
눈사람이 눈을 치우는 거다
눈을 치우는 줄도 모르고
눈을 치워주는 눈사람
택배 오토바이도 가고
폐지 수레도 가고
빙판이 아찔한 구두들도
지나가라고
내가 눈을 뭉치는 게 아니라
눈사람이 나를 뭉치는 거다

눈을 쓴다

오늘은 빗자루가 펜
백지를 넘긴다

숨은 꽃


꽃이 없을 때 나무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면
나무를 보지 못한 거다

늘 꽃일 수는 없으니까.
열매도 보고 수피도 찬찬히 뜯어보는 거지
같은 초록도 색조가 바뀌어가는 걸
따라가보는 거지

꽃말을 지워보렴 차라리
라일락의 우정과 코스모스의 순정과
영산홍의 첫사랑을 놓아주니
뜻밖에, 홀가분해진 건 나

이름에 가려져 있던 이목구비가 찬찬히 눈에 들어온다
찾지 못한 꽃이 잎과 잎 사이의 하늘처럼 하늘거린다

저 무수한 틈새가 마지막 잎새가 아니겠는지,
저 의미심장을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로
머리카락을 내민 채 숨는 숨바꼭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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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끝났다면 그 끝남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삶을 손아귀에 넣을 수도, 그것에 깊이를 더할 수도 없다. 공기와도 같은 그것은내 가벼운 숨결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안다: 나는 확정할 수 없는 것을 원한다. 나는 심오하고 유기적인 무질서를, 그 바탕에 깔린 질서를 암시하는 무질서를 원한다. 위대한 잠재력. 나의 이 횡설수설하는 문구들은 글로 쓰이는 그 순간에 창조된다.
파릇파릇한 새것이다. 그것들은 지금이다. 나는 구조의 공백을 체험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쓰고 있는 이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느다란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맥락? 어떤 말 혹은 어떤 격정의 원인 속으로 뛰어드는일 말인가? 욕망에 찬 맥락, 음절들을 뜨겁게 만드는숨결. 하나의 확신이 내게 다가온다, 삶은 다른 것이고그 안에는 숨겨진 양식이 존재한다는 확신. 그런데도삶은 아슬아슬하게 내게서 도망쳐 버린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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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버나는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순전히 휴가를 보낼생각뿐이었다. 한숨 돌리고, 내면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고, 해묵은때를 벗겨 낼 생각. 그러기엔 북극이 제격이었다. 광활하고 시원스레 펼쳐진 북극의 빙하와 바위와 바다와 하늘에는 도시와 고속도로와 나무 그리고 남쪽의 풍경을 번잡하게 만드는 여타 방해 요소들과무관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버나의 마음을 번잡하게 하는 것 중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란 남자를 의미했다. 남자라면 한동안 만날 만큼 만났으므로버나는 남자들의 추파나 그로 인해 벌어질 일들에 눈길조차 주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더는 아니었다.
자신은 사치스럽지도, 탐욕스럽지도 않다고 버나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버나가 원했던 것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신에게 해를 입힐 - P301

만큼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 줄 다정하고 온화한 몇 겹의 단열재 같은 돈뿐이었다. 물론 버나는 이 소박한 목표를 마침내 이룬상태였다.
그러나 오랜 습관을 벗어던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속으로 다짐을 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버나는 첫날 밤 공항 호텔 로비에서 바퀴 달린 가방을 끌며 갈팡질팡하는 양털 옷차림의 동료 여행자들을 눈으로 훑고 있다. 여자들은 힐끗 보고 말면서 무리에 속한남자들은 하나하나 뜯어본다. 여자가 딸린 남자들은 도의상 제외한다. 사서 고생할 필요가 뭐 있겠나? 첫 번째 남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기혼자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고역일 수 있다. 버림받은 아내들이 도깨비바늘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터다. - P302

버나의 관심을 사로잡는 이들은 혼자 있는 사람, 구석에 잠자코있는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버나는 나이가 너무 많아 자기 기준에안 맞는 이들과는 일부러 눈맞춤을 피한다. 늙은 개에게도 삶은 지속된다는 믿음을 귀하게 간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버나의 표적이다. 그렇다고 뭘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직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낚을 수 있음을 스스로에게 보여 주는 의미로 약간의 몸풀기를 하는건 나쁠 게 없지. 버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저녁 시간에 펼쳐진 만남과 대화의 장에 버나는 크림색 스웨터 차림으로 왼쪽 가슴에서 조금 많이 낮은 위치에 ‘자북극을 향해‘가 적힌 명찰을 달고 간다. 수상 운동을 하고 코어 근육을 단련한 덕에 적어도 옷을 다 갖춰 입고 군살을 빈틈없이 감싸는 와이어 브래지어로가슴을 받쳐 주면 여전히 나이에 비해, 아니 어떤 사람과 비교해도 - P302

훌륭한 몸매다. 하지만 비키니 차림으로 갑판 의자에 앉는 모험은하고 싶지 않았다. 무진 애를 써도 자글자글 오그라든 피부는 어쩔수 없으니까. 그래서 버나는 이를테면 카리브해가 아닌 북극을 택했다. 얼굴은 나이에 맞게 자연스러운데, 확실히 이 나이에는 돈을 투자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 약간의 브론저와 엷은 아이섀도 마스카라, 반짝이 파우더를 바르고 광채를 조금 더하면 10년은 젊어 보일수 있다.
"뺏긴 것이 많지만 남은 것도 많지."라고 버나는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보며 중얼거린다. 테니슨을 유독 광적으로 편애했던 버나의 세번째 남편은 툭하면 그의 문장을 인용했다. "정원으로 와요, 모드." 잠자리에 들기 전 남편은 습관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때마다 버나는뚜껑이 열릴 듯 화가 치솟았다. - P303

버나는 절제된 꽃내음과 그리움을 자극하는 향이 나는 향수를 톡톡 두드려 바른 다음 피부로 뭉개서 약간의 은은한 잔향만 남긴다.
향이 과하면 안 된다. 노인들의 후각은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알레르기가 유발될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갑자기 재채기를 해대는 남자는 매력적이지 않다.
동행이 없는 여자가 눈에 너무 불을 켜고 다니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무심하지만 유쾌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모임 장소에 조금늦게 들어간 버나는 모두에게 조금씩 나눠 주는 도수 낮은 화이트와인 한 잔을 받아 든 다음 옹기종기 모여 안주를 집어 먹고 와인을홀짝이는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거닌다. 남자들은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증권 중개인 등 전문직으로 일하다 은퇴했을 것이고, 북극 - P303

탐험, 북극곰, 고고학, 새, 이누이트족의 수공예품, 혹은 바이킹족과식물, 지질학에도 관심이 있을 것이다. ‘자극을 향해‘는 진지한 애호가들과 그 애호가들을 모아 놓고 강의를 해 줄 열성적인 전문가들을 끌어들인다. 버나는 북극 투어를 제공하는 다른 업체도 두 군데알아보았지만 그리 끌리는 곳이 없었다. 한 업체는 하이킹으로 가득채운 프로그램을 내세우면서 버나의 타깃 밖인 50대 미만 손님을 끌어들이려 했고 다른 업체는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눈꼴사나운 옷을 입어야 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터라 버나로서는 익숙한 편안함을 제공하는 ‘자극을 향해‘ 투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5년 전 세 번째 남편이 사망한 후에 이 업체 상품을 이용해 봤기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거의 다 알고 있기도 했다. - P304

"미안해요." 버나가 헐떡이며 말한다. 선명하면서도 희미한 카네이션 향기가 버나를 감싼다. 밥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갑자기 심한욕지기가 올라온다. 버나는 화장실로 내달린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화이트 와인, 크림치즈와 올리브를 곁들인 카나페를 변기에 게운 버나는 혹시 여행을 취소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닐지 걱정한다. 그런데 왜 또다시 버나가 밥에게서 도망쳐야 하나?
그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 주가 끝날 무렵 이미 온 마을에 소문이 퍼져 있었다. 밥이 퍼뜨린 소문, 버나의 기억과는 판이하게 다른 코미디로 둔갑한 소문이었다. 술에 절어서는 그걸 하고 싶어 안달난 헤픈 버나라니, 참 웃기지도 않는 소리 아닌가. 학교에서 집으로돌아가는 내내 버나는 자기를 곁눈질하면서 야유하는 소리를 내고 이름을 불러 대는 남자애들 무리에 시달렸다. 어디 한번 도망쳐 봐! 내가 태워줄까? 사탕도 좋지만 술이 효과가 빠르긴 하지! 이 정도가 그나마 심하지 않은 말이었다. 버나는 여자애들에게서도 외면당했는데, 그 불명예스러운 일, 그 모든 황당무계하고 우스꽝스럽고 난잡한 일들이 자기들에게 옮겨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 P308

하지만 버나는 그 현실을 그 현실 혹은 그 동네 전반을 마주할 수 없었으므로 집이 아닌 토론토 시내로 향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사실 어떤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감정뿐이었다. 서글픔, 비통함, 그리고 마침내 타오르는 번뜩이는 분노.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버나가 무가치한 쓰레기였다면 쓰레기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종업원 일과 호텔 청소 일을 병행하는 동안 버나는 그렇게 살았다.
버나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인 나이 많은 유부남을 우연히 만나게된 것은 전적으로 엄청난 행운이었다. 버나는 3년간 정오에 그와 섹스를 하는 대가로 배움의 기회를 얻었다. 공정한 교환이라고 버나는 생각했다. 그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었다. 그를 통해 가장 사소하게는 하이힐을 신고 걷는 법을 비롯해 많은 것을 배웠고 자기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ㅡ놀랍게도!ㅡ여전히 말린 꽃처럼 버리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간직했던 밥의 일그러진 형상을 조금씩 떼어 버릴 수 있었다. - P310

"아니, 버나 씨 정도면 그럴 필요도 없죠." 밥이 정중한 태도로 말한다. 이 개자식이 정말로 버나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있다. 과거에는 이런 세련된 매너 따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놈이었다. 버나의세 번째 남편이 자연인에 관한 홉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했던 비열하고, 잔인하고, 단명할 놈이었다. 요즘 같으면 여자애들은 자신들이배운 대로 경찰을 부를 것이다. 요즘 같으면 밥은 어떤 거짓말을 늘어놓은 감옥에 갈 것이다. 버나가 미성년자였으니까.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행위를 지칭할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강간은 어떤 미치광이가 수풀에 숨어 있다가 덮쳤을 때 벌어지는 일이지, 무도회 공식파트너가 벌목이 두 번 이루어져 황량한 숲이 펼쳐진 어느 초라한광산 도시 인근의 곁길로 데려가서는 얌전히 주는 대로 받아 마시라고 겁박하다가 버나를 한 겹 한 겹 찢어발겼을 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밥의 친구 켄이 밥을 도와주겠다며 자기 차를몰고 나타나기까지 했다. 둘은 웃고 있었다. 둘은 버나의 팬티거들을 기념품으로 간직했다. - P315

그 후 밥은 동네로 돌아가는 길에 버나를 차에서 내쫓았다. 버나가 울어서였다. "안 닥칠 거면 걸어가." 밥이 말했다. 버나는 드레스와 어울리도록 담청색으로 염색한 얼음장처럼 차가운 하이힐을 맨발로 신고서 얼어붙은 도로를 절뚝절뚝 걷는 자기 모습을, 두 눈은핑핑 도는데 헐벗은 상태로 바들바들 떨면서 참 어처구니없을 만큼굴욕적이게도 딸꾹질을 하는 자기 모습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버나의 머릿속을 가장 어지럽혔던 것은 나일론 스타킹이었다.
대체 어디 간 거지? 약국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산 건데. 분명 그때버나는 큰 충격에 휩싸인 상태였을 것이다.
버나의 기억은 정확한 걸까? 밥이 버나의 팬티거들을 자기 머리에 뒤집어쓰고 눈 속에서 춤을 추면서 어릿광대가 종을 울리듯 가터벨트를 펄럭인 것이 진짜였나? - P316

어째서 그날 밤에 벌어진 일로 버나만 고통받아야 했던 걸까? 버나는 물론 바보였다. 하지만 밥은 사악했다. 그리고 밥은 어떤 대가를 치르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 없이 무탈히 상황을 모면한데 반해, 버나의 인생은 통째로 뒤틀리고 말았다. 그날을 기점으로이전의 버나는 죽은 것과 다름없었고 새로운 버나가 그 자리를 완전히 대체했다. 발이 묶이고, 일그러지고, 짓이겨진 버나가. 버나에게 강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약자는 무자비하게 착취당해야 마땅하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밥이었다. 버나를 이렇게 말하지 못할 이유 뭐 있겠나? 살인자로 만든 사람은 밥이었다. - P317

다음 날 아침 보퍼트해를 항해할 유람선을 타기 위해 전세기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는 동안 버나는 자기 앞에 놓인 선택지에 대해 생각한다. 일단 마지막 순간까지 밥을 갖고 놀다가 밥의 팬티가 발목언저리에 내려왔을 때 싸늘하게 돌아서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건 만족감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여행 내내 밥을 피해 다니면서 지난 50여 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그냥 지금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밥을 죽여 버릴 수도 있다. 버나는 세 번째 선택지가 이론적으로 가능할지 차분하게 생각해 본다. 정말 밥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면 어떻게 크루즈 여행을 하는동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인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약물과 섹스를 이용한 고전적인 수법은 효과를 발휘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뿐더러 효과가 아예 없을 수도 있다. 밥이 아무 질병도 앓고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다로 밀어 버리는 방법은 현실성이 없다. - P317

다음 날은 승객들, 특히 여성 승객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원기 왕성한 젊은 과학자가 지질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작된다. 천만다행으로, 부빙 때문에 여행 일정을 변경한 덕분에 여러분은 뜻밖의 장소를 방문하게 되실 겁니다. 거기서는 아주 극소수에게만 허용되는 지질학 세계의 경이를 관찰하실 수 있는데요. 바로 지질학 역사 초기, 그러니까 어류, 공룡, 포유류가 등장하기도 전에 화석화된 무려 19억 년 된 스트로마톨라이트를, 지구에서 최초로 보존된 형태의 생명체를 보는 특권을 누리게 되실 겁니다.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뭘까요? 그가 눈을 번득이며 수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단어는 매트리스를 뜻하는 그리스어 스트로마(stroma)에 돌을 뜻하는 리토스(lithos)의 어원을 결합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톤 매트리스(Stone Mattress), 즉 청록색 조류가 층층이 쌓여 둔덕이나 돔 모양을 형성한 화석화된 쿠션인 거죠. 이 청록색 조류는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산소를 형성한 것과 똑같은 조류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 P322

그리고 여기 V자 모양으로 자른 네덜란드 치즈처럼 네 조각으로부서진 스트로마톨라이트도 있다. 버나는 그중 한 조각을 집어 들어그 층층을 살펴본다. 해마다 검은색, 회색, 검은색, 회색, 검은색, 회색이 번갈아 쌓인 모양새인데 그 중심이 되는 가장 아랫부분은 아무특색이 없다. 무게는 묵직하고 가장자리는 날카롭다. 버나는 그걸 배낭에 넣는다.
때맞춰 밥이 온다. 좀비가 언덕을 오르듯 천천히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에게 다가온다. 밥은 외투를 벗어 배낭끈 밑에 쑤셔 넣는다. 숨을 헐떡이고 있다. 순간 버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언덕을 올라오느라 힘을 뺏긴 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과거로 남겨 두어야 하는 거 아닐까? 남자애들은 원래 그러니까. 원래 그 나이대 남자애들은 전부 호르몬의 노예 아닌가? 어째서 인간이 현재도 아닌 과거에, 그것도 몇 세기는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 한참 전에 저지른 일로 단죄받아야 하나?
까마귀 한 마리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돈다. 눈치챈 걸까? 기다리고 있나? 버나는 땅을 내려다보는 까마귀의 눈을 통해 한 늙은 여자를 인정하자, 이제 버나도 늙은 여자다, 시간이 한참 흘러이제 옅어질 만큼 옅어진 분노를 이유로 자기보다 더 늙은 남자를살해하려는 여자를 본다. 하찮은 짓이다. 악독한 짓이다. 정상적인 반응이다. 삶이란게 원래 이런 법이다. - P325

밥은 조금도 움찔하지 않는다. "어쩐지 뭔가 낯이 익다 했어." 사실 능글맞게 웃고 있다.
저 웃음을 버나는 기억하고 있다. 열 살배기처럼 키득거리며 눈속에서 의기양양하게 까불까불 뛰어다니는 밥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버나 자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있던 그때를.
버나는 힘껏 주먹을 휘두르는 것보다 나은 방법을 알고 있다. 스트로마톨라이트를 힘차게 들어 올린 다음 밥의 아래턱에 짧고 강하게 한 방 날리는 것이다. 삐걱 하고 부서지는 소리만 난다. 밥의 머리가 뒤로 홱 꺾인다. 이제 밥은 바위 위에 대자로 뻗어 있다. 버나는 밥의 이마 위에 스트로마톨라이트를 갖다 대고 떨어뜨린다. 한번. 그리고 또 한 번 됐다. 이제 된 것 같다. - P327

번쩍 뜬 두 눈은 미동도 없고 이마는 짓이겨져 있고 얼굴 양옆으로는 피를 줄줄 흘리는 몰골이 우습기 그지없다. "꼴이 말이 아니네." 웃음이 나오는 꼴이라 버나는 웃는다. 버나의 예상대로 앞니는임플란트였다.
버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그런 다음 옷은 물론이고 장갑에도 피가 묻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다시 집어 든 다음 물웅덩이에 살그머니 빠뜨린다. 바닥에 떨어진 밥의 야구모자와재킷은 배낭에 넣는다. 밥의 배낭을 털어 보니 별것 없다. 카메라와털장갑 한 켤레, 목도리, 작은 스카치 여섯 병뿐이다. 어찌나 희망에 차 있었던 건지 안쓰러울 정도다.  - P327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지질학 표본 전시대에 놓일 것이고, 사람들이 그걸 들어 올려 관찰하고 토론하는 동안 무수한 지문으로 범벅될것이다.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버려질 것이다. 레졸루션II 여행 프로그램은 총 14일 일정으로 그동안 총 열여덟 차례 짧게 육지를 방문할 것이다. 빙원과 깎아지른 낭떠러지, 금색과 구리색과 흑단색과은회색의 산들을 지나칠 것이다. 유빙 사이를 미끄러지듯 통과할 것이고, 굴곡 없이 길게 쭉 뻗은 해안에 정박해 수백만 년 동안 빙하에깎여 나간 피오르드를 탐험할 것이다. 그토록 혹독하고 고된 여정중에 마주한 장관을 두고 과연 그 누가 밥을 기억하겠나?
여행 막바지에는 진실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밥이 제반 비용을 지불하지도, 여권을 찾으러 오지도, 자기 짐을 싸지도 않을 테니 어쩔 수 없다. 그러면 다급하고 근심 어린 말들이 오갈 것이고, 승객들이 놀라지 않도록 비밀리에 직원 회의가 열릴 것이다. 결국에는 이런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비통하게도 어젯밤 밥이 카메라로 북극광을 좀 더 잘 찍기 위해 난간에 기댔다가 유람선 밖으로 추락하고 말았다고 그 외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 P330

그러는 동안 승객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을 테고 버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까, 버나가 성공한다면 말이다. 과연 성공할까?
그러려면 좀 더 기민하게 행동해야 하지만, 마땅히 지금 상황을 홍미진진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피곤하고어쩐지 공허할 뿐이다.
그래도 평화롭고, 그래도 안전하다. 세 번째 남편이 비아그라 체험 시간이 끝난 후 아주 밉살스레 내뱉곤 했던 말처럼 모든 열정을소진한 마음에 찾아든 평온이다. 빅토리아 시대인들은 늘 섹스를 죽음과 연관지었다. 시인도 있었는데 누구였더라? 키츠? 테니슨?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하나하나 떠오를 것이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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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손의 사랑」은 농담으로 시작되었다. 아니, 무모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는데, 마리화나를 적잖이 피워 대고 싸구려 위스키를 퍼마신 탓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화근이었다. 하겠다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빌어먹을 계약 조건과 엮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건, 그 계약은 그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였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무를 수 없는 계약이다. 계약 종료일을명시하지 않은 탓이다. 우유갑이나 요거트 통이나 마요네즈 병에 적힌 상미기한 같은 유효 기간을 적어 두었어야 했는데, 대체 뭘 안다고 덜컥 계약을 해 버린 거지? 고작 스물둘밖에 안 됐으면서, 돈이필요했다.
그래 봐야 푼돈이었다. 고로 말도 안 되는 계약이었다. 착취였다. - P243

그 셋은 어쩌다 그를 그런 식으로 이용해 먹을 수 있었던 걸까? 물론 그들은 계약의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서명까지 떡하니박힌 그 빌어먹을 계약서를 운운할 뿐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그는현실을 받아들이고 돈을 내어줘야 했다. 처음에는 돈을 주지 않으려했다. 하지만 그러고 있으니 이레나가 변호사를 고용했고 이제는 다들 벼룩을 달고 사는 개처럼 변호사를 두고 있다. 이레나는 한때 그와 가까운 사이였으니 조금 봐줄 법도 했으나 그건 가당찮은 일이었다. 이레나는 매해 태양 빛 아래서 더 단단해지고 더 건조해지고 더뜨거워지는 아스팔트 같은 심장의 소유자였다. 돈이 이레나를 망가뜨렸다. - P244

그의 돈이 이레나를 망가뜨렸다. 이레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변호사를 선임할 만큼 형편이 넉넉했던 건 그 덕분이니 이레나를 망가뜨린 것은 그의 돈이었다. 그가 선임한 변호사도 그들이 선임한 업계최고의 수완 좋은 변호사들 못지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가 승소의 기쁨을 가져다줄 것인가를 두고 서로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고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골절상을 입은 하이에나의 아침 밥상에 오르는 먹이는 언제나 의뢰인이었다. 변호사들은 의뢰인을 처음에는 한입씩 베어 먹다가 나중에는 가죽이나 힘줄이나 발톱만 남을 때까지 휜담비나 쥐나 피라냐 떼처럼 조금씩 뜯어먹는 족속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십 년간 돈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이 마땅히 지적했듯 이 일을 법정으로 끌고 가 봐야 승소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가 서명했다. 그 간악한 계약서에 새빨간 뜨거운 피로 그가 서명했다. - P244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다 안다고! 유약을 발라 반질거리는 파랗고 하얀 타원형 명판에 대고 소리치고 싶다. 다 잊어버려야 하는데, 최대한 여기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잊어야 하는데 발목에 걸린 족쇄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영화제며 문학 페스티벌이며 코믹 페스티벌이며 몬스터 페스티벌이며 하는 것들에 참석하러 이 도시를 찾을 때마다 스리슬쩍 보고 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계약서에 서명한 과거의 바보짓을 상기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호러클래식‘이라는 세 단어를 통해 씁쓸한 만족감을 주는 명판이니 어쩔수 없다. 잭은 이 명판에 지나치리만치 집착한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이룬 중대한 삶의 성취에 바치는 헌사이 터다. 그런 것이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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