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준 말


조문을 가서 유족과 인사를 나눌 때면 늘 말문이 막힌다

죽음을 기다리는 병실에 병문안을 갈 때도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쾌유를 빕니다
이런 유창한 관용구는 뭐가 거짓만 같은데
그럴 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내게 구박 받던 관용구는 늙은 아비처럼 나를 안아준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도 좋으니
내 것이 아닌 말이라도 좀 흘러나왔으면 싶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말이 그치는 그때,
어둠 속 벽을 떠듬거리듯 나는 말의
스위치를 더듬는다

그럴 때 만난 눈빛들은 잘 잊히질 않는다
그 눈빛들이 나의 말이다

수목장


세상 잘난 척은 혼자서 다 하고 돌아다니다가. 기일이 오면 나무에게 무릎을 꿇는다
비석 대신 정좌한 돌멩이들에게 머리를 숙인다허리를 숙인 풀잎들과 맞절을 한다
아가, 그 맘 잊지 말거라
설날 아침 절을 가르치시던 당신,
마지막 가르침도 절이다

귀의 가난


소리 쪽으로 기우는 일이 잦다
감각이 흐릿해지니 마음이 골똘해져서

나이가 들면서 왜 목청이 높아지는가 했더니 어머니 음식맛이 왜 짜지는가 했더니
뭔가 흐려지고 있는 거구나

애초에 소리였겠으나 내게로 오는 사이
소리가 되지 못한 것들

되묻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에 집중을 한다
너무 일찍 온 귀의 가난으로
내가 조금은 자상해졌다

눈사람


내가 눈을 치우는 게 아니라
눈사람이 눈을 치우는 거다
눈을 치우는 줄도 모르고
눈을 치워주는 눈사람
택배 오토바이도 가고
폐지 수레도 가고
빙판이 아찔한 구두들도
지나가라고
내가 눈을 뭉치는 게 아니라
눈사람이 나를 뭉치는 거다

눈을 쓴다

오늘은 빗자루가 펜
백지를 넘긴다

숨은 꽃


꽃이 없을 때 나무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면
나무를 보지 못한 거다

늘 꽃일 수는 없으니까.
열매도 보고 수피도 찬찬히 뜯어보는 거지
같은 초록도 색조가 바뀌어가는 걸
따라가보는 거지

꽃말을 지워보렴 차라리
라일락의 우정과 코스모스의 순정과
영산홍의 첫사랑을 놓아주니
뜻밖에, 홀가분해진 건 나

이름에 가려져 있던 이목구비가 찬찬히 눈에 들어온다
찾지 못한 꽃이 잎과 잎 사이의 하늘처럼 하늘거린다

저 무수한 틈새가 마지막 잎새가 아니겠는지,
저 의미심장을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로
머리카락을 내민 채 숨는 숨바꼭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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