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명이 넘게 투입되어 채석장을 인위적으로 바꾸었다지만, 이곳에서 인공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서 이어지는 넓은 산책로도 자연스럽게 굽어 있고,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도 마음껏 꼬불하다. 둥근 호수도 있고, 호수 안에는 기암괴석의 절벽도 있고, 절벽 위에는 로마식 건축물의 전망대도있다. 길은 계속해서 몇 갈래로 갈라지며, 영원히 이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가도 가도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은이 커다란 공원 안에 가장 많은 것은 바로 잔디밭, 완만한 언덕에도, 가파른 언덕에도 드넓은 잔디가 펼쳐진다. 그 위로는 사람들이 빼곡하다. 물론 ‘빼곡‘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뷔트 쇼몽 공원에 조금 각박한 처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아무리많아도, 그러니까 이토록 날씨가 좋은 토요일 저녁 시간에, 파리 시민 모두가 뷔트 쇼몽 공원에 온 게 아닐까 착각이 들 만큼사람이 많아도, 이 공원은 붐빌 수 없다. 여전히 한적한 공간이있다. - P199

자연의 모든 시기엔 제각각의 아름다움이 있는 법이지만,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전성기가 있는 법이다. 나는 어쩌자고뷔트 쇼몽 공원에, 날씨 좋은 6월의 저녁에, 해가 지기 전 가장빛이 아름다울 때 찾아온 걸까. 천국에 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과장이 아니다. 숲의 정령처럼 높다랗게 자란 나무들이 제각각 녹색으로, 갈색으로 몸을 치장하고 잔디밭을 빙 두르고 있다. 모든 나무들이 기분 좋은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살랑살랑 - P199

잎을 흔들며 대화를 한다. 호수 옆 나무도 치렁치렁 머리를 수면 위로 드리우고 있다. 그 나무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고 어린 사람들은 나무 밑에, 잔디 위에, 제각각 자리 잡고 앉거나누워 있다. 웃으며 술을 마시고, 웃으며 대화하고, 다시 대화하며 웃는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도 많다. 모두가 이빛나는 시간이 사라져버리기 전에 아낌없이 생을 살아버리고있다.
절벽 뒤로 곧 넘어가려는 해는 마지막으로 금가루를 온 세상에 뿌린다. 그 노란 기운을 받아 나뭇잎들이 투명한 형광으로 빛나고, 물은 금빛으로 반짝인다.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모두 금발이 되고, 모두의 실루엣에도 금색 가루가 내려앉았다. 그 누구도 아름답지 않을 수 없는 시간에, 눈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곳에 도착해버렸으니 어떻게 이곳이 천국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끝없이 사진을 찍고, 아름다움에 발을 동동 구르고,
한숨을 푹푹 내쉰다. 이것은 카메라 안에 갇히는 자연이 아니다. 천국은 그렇게 쉽게 기록되지 않는다. 기록할 순 없어도 기억할 순 있다. 매일 오면 되니까.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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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을 때도 나는 선을 넘지 못한다. 하지 말라는 건 하지않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것은 건드리지도 않는다. 결국 들킬것 같고, 결국 망할 것 같다. 불안한 건 질색이다. 영화를 보다가도 등장인물들이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하면 그때부터 엄청나게 불안해한다. 왜 저래. 하지마 좀. 하지만 선을 넘어야 다른이야기가 펼쳐진다. 선을 넘어야 예상치 못한 세상을 마주할수 있다. 선을 좀 넘어야 비로소 인생은 풍성해진다. 20년 만에회사라는 울타리를 넘는 용기를 내놓고도, 여기서 또 고분고분하게 주변만 알짱거리고 있는 내 손을 붙들고 친구가 선을넘었다. 그 순간 나를 찾아온 해방감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막혀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 구석구석까지 바람길이 나는 것같았다. 내내 접혀 있던 날개가 살짝 펼쳐진 것도 같았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고, 숨을 아주아주 깊숙이 들이마셨다. 오늘이 풀밭의 첫 주인공은 우리다. - P139

스타벅스에서 친구가 말한 건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뭔가또 대단한 것을 찾아 나서려는 나에게, 친구는 이 순간을 더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고객으로 여기지 않길 주문하고 있었다. 너도 여행을 온 거고, 나도 여행을온 거고, 우리 둘의 여행이 이곳에서 문득 겹친 것뿐이니 너무조급해하지 마. 나는 그냥 아침을 좀 더 느긋하게 바라보고 싶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친구의 이 말은 김민철여행사에 곧바로 전달되었다.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 고객의 주문이다. 아니, 오히려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순간을 친구와 함께여행할 기회였다. - P141

지나가다 봐둔 예쁜 카페에 들어간다. 한적한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와 크루아상을 시킨다. 비현실적으로 봉긋하게 우유거품이 올라온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따뜻한 크루아상을 먹는다.
몰랐다. 유명하지도 않은 동네 카페에서 이토록 맛있는 크루아상을 먹게 될 줄은. 이토록 쉽게 만족하는 우리니까 굳이 멀리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집 앞 빵집의 따뜻한 바게트가 가장 맛있고, 집 앞 카페에서 따뜻하게 내주는 크루아상이 제일 맛있다는 걸 오늘 알게 되었으니. 그리고 우리의 행복은 이토록 간단한 레시피로 완성된다는 사실도. 물론 그 행복은 각자에게아주 다른 모양이다. 내 행복은 자주 미술관에 있었고, 내가 찍는 파리 사진들에 자주 있었고, 덕분에 나는 끝없이 헤매는 여행을 택했다. 친구의 행복은 여유로운 아침에, 편안한 자세에,
햇빛과 바람에 있었다. 파리에 무엇이 유명하든 말든 친구는자신의 행복 앞에 스스로를 데려다주는 법을 알고 있었다. - P143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혼자 도서관에 가던 어린이는, 처음 파리에 왔을 때도 도서관에 반해버렸다. 파리 도서관 때문에 반드시 여기에 돌아와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여기에 와서 공부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전적인 분위기의 따뜻한 조명 아래 나도 있고 싶었다. 오래전 그 꿈도 실패했는데, 그 꿈을 하루치 살아보는 것도 실패라고? 친구앞이라 실망한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불행은 이미 내 마음속에서 몸집을 한껏 부풀렸다. 친구가 복도 끝으로 가길래 나도 맥없이 친구를 따라 그쪽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무슨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놀랍게도 똑같은 타원형 도서관이 하나 더 있었다. 심지어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하늘색 조명이 놓인 개인석은 꽉 차 있었지만, 괜찮았다. 마침내 들어왔으니까. 우리는 빈 의자에 앉았다. 카메라를 꺼내서 찍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도서관이니까. 관광지가 아니니까. 카메라 소리로 민폐 관광객이 되고 싶 - P157

지 않았다. 이 공간에 스며들고 싶었다. 일상인 척 가져온 책을읽으려 했다. 하지만 실패. 책을 몇 줄 읽다가 다시 실패. 시선이 자꾸 도서관으로 향했다. 공간 자체가 너무 오랜 꿈의 모양그대로라서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 척하며 공간을 더 열심히 읽었다. 오래전이었다면 나는 얼마나 질투 섞인 눈으로 여기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봤을까. 하지만 나는 더이상 20대가 아니었고, 이들을 대책 없는 질투심으로 부러워할 나이는 지났다. 다만 이곳에 슬쩍 속해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꿈과 지금 나의 거리를 충분히 알고도 남을 나이라 다행이었다. 친구가 돌아가도 여기에 다시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 P158

실제로 나는 나중에 혼자 이곳에 와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날은 그토록 앉고 싶었던 개인석이 비어 있었다. 하늘색 조명 하나를 내 몫으로 가지고 책을 읽다 보니 불현듯 도서관이어두워졌다. 순식간에 공간은 빗소리로 가득 찼다. 유리 천장은 바깥 날씨를 그대로 공간 전체에 투영했다. 빗소리가 점점거세지며 그 큰 도서관 전체를 두드려댔지만, 나는 괜찮았다.
우산을 안 챙겨왔지만 나는 어둑해진 도서관 안에, 원하는 하늘색 조명 아래 안전하게 자리 잡았으니까. 나는 책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책이 너무 좋아서 고개를 들면 책보다 아름다운 도서관의 풍경이 보였다. 오래전 후배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일주일만 내 맘대로 시간을 쓰고 싶다는 내 말에, 후 - P158

배는 그럼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겹도록 책만 읽고 싶어"라고 말했다. 후배는 그런 대답을 하는나를 지겹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다른 대답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책만 읽어도 괜찮은 시간을 살고 싶다는 그 소원이 이런 공간 속에서 이뤄지기를 바란 적은 없다. 너무 과한 걸인생에 요구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어쩌다 나는이곳에서 지겹도록 책만 읽어도 좋을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좋아하는 것 앞에 ‘지겹다‘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호사가어찌하여 내 것이 됐단 말인가. 나는 하늘색 구름 같은 질감의꿈속에서 마음껏 뒹굴었다. 마음껏 점프했다. 한참이 지나 다시 유리 천장으로 빛이 들어올 때, 나는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섰다. 비 온 뒤 말간 세상을 말간 마음으로 걸었다.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았다. 부러움 한 톨 깃들 여지없는 말간 마음이었다. 물론 이건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후의 이야기지만.

시간은 봄처럼 야속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여전히 수많은 처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 P159

여기서 우리의 길은 갈라진다. 여기서부터는 각자의 길이다. 우리는 서로의 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잘 걷고 싶은 사람들이니까. 진하게 포옹을 하고 각자의 최선을 다해 각자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서로의 길이 평온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만큼 순진하진 않다. 다만 그 길끝에서 우리가 다시 평온하게 만나길 바랄 뿐이다. 우리 각자가 바라는 우리가 되어서. 그러기 위해 저 멀리 근사한 꿈을 세워둔다. 불가능한 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능하게 만들 거니까.

우리는 우리만의 축배를 든다.
19년 동안 같이 즐겼고, 같이 울었고, 같이 웃었다.
인생에 이 이상을 바랄 수는 없다.

안녕, 나의 유일한 동기. - P163

청소부터 했다.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이불을 털고, 설거지를 하고, 향을 피운다. 오랜만에 낮잠도 잔다. 언제 나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나가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다가,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튈르리 정원, 오랑주리 미술관, 팔레 루아얄, 에펠탑, 르봉 마르셰 백화점, 오르세 미술관, 뤽상부르 공원, 마레 지구, 보주 광장, 콩코드 광장, 샹젤리제 거리, 트로카데로 광장, 바토 무슈 유람선, 사마리텐 백화점, 몽쥬약국, 몽마르트르 언덕, 생마르탱 운하, 퐁다시옹 루이비통, 생제르맹, 퐁피두 센터, 로댕 미술관, 지베르니, 오베르 쉬르 우아즈, 옹플뢰르와 몽생미셸 그리고 수많은 음식점과 카페와 술집과 시장과 공원과 성당까지. ‘파리‘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모든 곳에 다녀왔다. 쉽게 떠올리기힘든 곳도 김민철여행사는 쏙쏙 찾아내서 안내했다. 파리원정대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다. 물론 더 이상 파리에 갈 곳이없다는 건 아니다. 파리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니, 어떤 곳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다만 내가 지친 거다. - P165

이제는 애쓰지 않아도 나는 나를 찾을 수 있다. 무리하지 않아도 나를 돌볼 수 있다. 내 마음을 읽어, 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면 된다. 책과 노트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유난히 날씨가 좋은 주말이었다. 덕분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붐볐다. 공원에도 카페에도 행복한 사람들로 빼곡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밝음이, 신남이, 웃음이 버겁기만 했다. 그세계엔 내가 원하는 자리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자꾸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만 방향을 틀었다. 외로움이 필요했다. 침묵이간절했다. 그러다 발견했다. 작은 선술집을. 텅 빈 그곳을 이토록 반짝이는 날씨에 실내에서 술을 마실 멍청이는 나 빼곤없다. 나는 어둑어둑한 선술집 창가 자리에 앉았다.  - P167

파리에서 한 달씩 머무를 숙소를 구하는 나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1. 근처에 큰 공원이 있을 것(완성하고 싶은 아침이 있었으므로).
2. 두 개의 숙소가 완전히 다른 지역에 있을 것(아예 다른 도시에 도착한 기분이라면 환영).
3. 너무 비싼 동네거나 너무 한국 사람이 많은 동네는 피할것(편안하게 여행하려면 아무래도).
4. 침실과 다른 공간이 분리되어 있을 것 (나는 20대가 아니므로 이 정도는 누려도 된다).
5. 큰 창문이 있을 것(그 앞에 책상을 놓을 수 있다면 더 좋고).

5월의 집은 그 모든 기준을 통과했다. 숙소는 깨끗한 5구에 있었고, 뤽상부르 공원이 바로 옆이었고, 조금만 걸으면 무프타르 시장에 도착할 수 있고, 침실과 거실과 부엌이 분리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발 드 그라스 성당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큰 - P175

창문이 두 개나 있었다. 리뷰가 몇 개 없는 점이 매우 마음에걸렸지만, 뤽상부르 공원과 거리가 너무나 가까워서 모험을해보기로 했다. 모험은 아주 성공이었다. 하지만 5월의 숙소와동네가 너무나도 만족스러웠기에 결과적으로 나는 점점 더 쪼그라드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6월에 내가 예약한 숙소는 파리 20구, 파리의 끝, 위험하다는 평이 압도적으로 많고, 관광객은 도대체 갈 일이 없는 동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76

순식간에 택시는 그곳을 지나쳤지만, 나는 보았다. 도로 옆작은 광장을. 작은 광장 위 무대를. 그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는사람들을. 그 사람들을 아낌없이 비추는 찬란한 태양을. 시간은 이제 토요일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택시는 나를 새로운 숙소 앞에 내려주었다. 숙소 입구에서 무대가 또렷이 보였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나오는 그 잠깐에 사라질 무대가 아니었다. 그런 유의 흥이 아니었다. 나는 진정하고 벨을 누른 후 새로운 숙소로 올라갔다.
낡고 잘 관리된 나무 바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쪽벽엔 소파, 맞은편 벽엔 초록색 주방. 옆방엔 커다란 침대와 키가 큰 창문, 그 밖으로 넘실넘실 출렁이는 키가 큰 초록 나무들. 정확하게 사진으로 본 그대로다. 역시나 이번에도 숙소 찾기 대마왕이 성공적으로 일을 해버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작은 테이블부터 창문 앞으로 옮긴다. 노란색 의자도 그 앞으로옮긴다. 이로써 나는 키가 큰 나무를 창밖으로 보며 밥을 먹고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집은 더 완벽해졌다.
집에 필요한 것들을 체크한 후 나는 곧장 음악으로 향한다. - P188

딱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딱 얇은 지갑 같은 두께로 나의 치즈가 잘려졌다. 이 정도 크기라면 얼마든지 더 사도 된다. 얼마든지 다양하게 사도 된다. 마트에서 포장된 완제품 치즈는 나혼자 다 먹는 데 며칠이나 걸렸지만, 이 정도 크기로 살 수 있는 거라면 나의 치즈 세계는 앞으로 얼마나 넓어질 것인가. 나는 그 세계의 준비된 인재였다. 치즈를 위한 나의 위장은 무한대로 열려 있고, 낯선 치즈를 향한 내 마음의 넓이는 측정 불가이니 말이다.
치즈 가게에서 줄을 서며 나는 새삼 또 배웠다. 누구든 자신의 차례가 오면 그 시간을 충분히 누려도 된다는 것을. 궁금한것을 물어보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도 된다는 것을. 이곳은 - P192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문해야 하는 한국이 아니다. 내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매려하느라 너무 급한 선택을 하지않아도 된다. 내 시간에 대해 당당해져도 된다. 그것은 나의 권리. 눈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주인장까지도 기다려준다. 고민 끝에 내가 두 번째로 고른 치즈는 겉에 허브가 잔뜩 발린 Al romero 치즈였다(이름도 처음 듣는 치즈였다). 비싸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는데 다 합쳐서 겨우 8천 원. 웅장해진 마음으로, 치즈의 이름이 적힌 영수증을 손에 꼭 쥐고 가게를나섰다. 이것은 평범한 영수증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부터 파리 생활이 달라질 거라는 확약서였다. 두고 봐. 치즈계의 만수르가 되어주겠어. - P193

제일 어려울 거라 생각한 치즈 가게 관문을 넘었으니, 나는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치즈 가게 맞은편 마트에 가서 장을봤다. 늘 빵과 곁들일 생채소와 요구르트, 햄과 과일 정도만 샀는데, 새 동네에 왔더니 새 마음이 장착된 건가. 파스타와 파스타 재료를 사고, 신선한 줄기콩과 엔다이브와 오이와 딜 그리고 민트도 다발로 산다. 집 바로 앞에 벨빌 맥주 양조장이 있길래 병맥주도 종류별로 사 왔고, 작은 식료품 가게에서 올리브절임도 포장해 왔다. 양손과 어깨에 먹을 것들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텅 빈 냉장고를 꽉꽉 채웠다. 이 모든 것이이 집에서 반경 50미터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양조장까지는10미터, 양조장에서 코너를 돌면 치즈 가게, 2차선 도로를 건 - P193

너면 커다란 마트. 마트에서 다시 코너를 돌면 축제가 열리는작은 광장. 광장 옆엔 유기농 마트 그리고 낯선 나라의 궁금한식당들까지. 이토록 내게 필요한 것들이 꽉꽉 들어찬 동네라니. ‘동네‘라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동네라니.


5월에는 멀리멀리 계속 뻗어나가며 우리 동네의 지도를 그렸다.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나는 거침없이 그곳을 우리 동네로 편입시켰다. 동네는 나날이 커지기만 했다. 그러나 6월은아주 다를 것 같았다. 나는 작게, 아주 작게 지도를 그리고 싶어졌다. 그냥 이곳에 살고 싶어졌다. 밖의 파리가 어떻든, 유명한 무엇이 어떻든 간에 그냥 여기에 있고 싶었다. 그래도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궁금한 식재료들을 사다가 밥을 해 먹고, 해피 아워에는 집 앞 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고, 매일 다른 치즈를 사다 먹으며 그냥 이 작은 동네 안에 머물고 싶었다. 지도를 작게, 아주 세세하게, 시간대별로, 아주 촘촘하게 그리고 싶어졌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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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또 어떻고. 아침 산책 길에 붙어 있는 광고판을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부르델 미술관의 재개관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 바로 달려갔다. 우연에 복종하는 것이 이곳에서의 나의 의무.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다. 부르델이 로댕의 오랜 조수였다는 사실만 겨우 알고 간 부르델 미술관은 들어서자마자 나를 압도했다. 규모도 힘도 예상을 빗나간다. 고요함 속에서 저토록 뿜어 나오는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장유명한 <활 쏘는 헤라클레스> 작품 옆에서 손가락 하나, 종아리 근육 하나까지 오래 유심히 보았다. 제목에도 ‘활 쏘는‘이라고 표기돼 있지만, 이 작품에는 화살이 없다. 어떤 사람은 활쏘기 전의 포즈라 해석하고, 어떤 사람은 활 쏜 직후의 포즈라해석한다. 나는 후자의 해석에 마음을 둔다. 그 표정으로 보건대, 이미 화살은 떠난 직후니까. 안간힘을 쓰는 표정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다 쏟아부은 표정. 고요하고 강인하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까지도 운명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다. 날아간 화살은 이미 상대의 심장을 뚫었다는 걸 알 수 있었 - P54

다. 거센 빗소리가 미술관 앞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나는 작품과 충만하게 함께였다.
나는 내가 좋아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작가의 세계에기꺼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동네 산책을 하다가 자드킨 미술관을 발견하고 그의 아틀리에를 통째로 대여한 기분을 만끽하며 (관람객이 나 혼자였다) 조각들을 마음껏 즐겼고, 퐁피두 센터옆의 아틀리에 브랑쿠시도 나에겐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미술관이 공짜였다(다시 말하지만, 파리는 자기방식대로 친절하다). - P55

마침내 꽃도 샀다. 여행자의 신분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그것. 노트르담 대성당 옆을 지나가다가 꽃시장을 발견하고, 그곳에 들어가서 작약 열 송이를 샀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누군가의 파리 사진에서 작약을 보았다. 뭐지. 저렇게 크고, 저렇게 탐스럽고, 한 송이만으로도 저토록 풍성한 저 꽃은.
그땐 그 꽃이 작약인 줄도 몰랐다. 창밖의 파리 지붕들을 배경으로 오래된 나무 창틀 앞에 놓인 꽃병 사진이 이상하게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 사진을 부적처럼 컴퓨터 바탕화면에 걸어놓고 나는 오래도록 파리를 향한 마음을 키웠다. 그 꽃이 작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작약은 파리를 상징하는 나의 꽃이 되었다. - P56

거짓말처럼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거센 비. 웬만한 비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프랑스 사람들도 차양 밑으로 뛰어 들어가는 비였다. 거리가 빠르게 텅 비었다. 우산을 썼지만 한쪽 어깨가 순식간에 젖었다. 우산을 푹 쓰고 빠른 속도로 걷는데 뭔가 이상했다. 이렇게나 비가 내리는데, 물웅덩이마다 햇빛이 고여 있었다. 고개를 드니 거리 전체가 비와 햇빛으로 반들거렸다. 이건 무지개의 신호인데? 하며하늘 쪽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봐버렸다. 너무나도 큰 쌍무지개를 모두가 뛰느라, 비를 피하느라 못 보고 있었지만, 나는봐버렸다. 본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다가 또 하염없이 무지개를 봤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큰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내내 내 얼굴에는 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세 좋게 내리는 비와 기세 좋은 해가 만든 크고 선명한 그 무지 - P64

개도 오래 하늘에 걸려 있었고.
이걸로 다 되었다. 뭘 더 바라겠는가. 마침내 내가 이런 시간에 도착했는데, 두꺼운 갑옷을 입고 의무와 책임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매 순간 칼을 겨누며 나에게 달려오는 수많은 요구들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앞으로,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던 시기가 있었다. 결코 혼자가 아니었지만, 결코 누구와도 함께일 수 없었던 시간들. 혼자 삼키고 혼자 무릎을 털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갑옷을 고쳐 입는 동안 마음에는 굳은살이 많이 박였다. 지금부터 굳은살을 다 떼어내고, 생살의 따끔따끔한 시기를 거쳐, 새살이 돋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보드라운 시간들이 필요하다. 오늘 먹은 버터의 부드러움을 마음에 바르고, 각양각색의 치즈들로 감싸서, 일곱 가지 무지개의 빛깔을 쬔다면 너무 늦지 않게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조급할 필요는 없다. 비로소 나도 낯선 시간에 당도한 것이니까. 나도 낯선 시간의 틈에 닻을 내린 거니까. 우선은 낚싯대를드리우고 마음의 물결을 멍하니 바라보자. 애초에 물고기를바라고 던진 낚싯대가 아니지 않니. - P65

응? 뭐? 눈물?

친구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부터 들어찼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친구가 눈물을 닦으며 웃는다. 어, 이 정도라고? 나는 당황한다. 이 방에 사로잡혀서 한 시간 넘게 모네의 <수련>만 보다가 결국 다른 전시관은 보지도 못하고 나가야만 했던 오래전의 나를 소환한다. 그때의 나라면 지금의 친구를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모네의 <수련>을 본다고 연보라색 옷까지 맞춰 입고 나온 친구를 지금의 나는 놀리지만, 오래전의 나라면친구 옆에서 같이 울었을 테니까. 여긴 아름다움이 온몸에 직진으로 와서 안겨버리는 공간이니까. - P85

그런 거다. 관계는 주고받는 거다. 나는 내가 하는 게 편하고, 함께 있는 누군가가 신경을 안 쓰는 게 좋고, 그리하여 결국 다 내가 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좋고 싫음도 지나치게 분명하기에 나는 내가 좋은 걸 해야만 하고, 싫은 표정은 숨길 줄 모른다. 그 와중에 수시로 멈춰 사진을 찍고, 뭔가를 끄적이고, 자꾸 자기 세상으로 빠져버린다. 내가 생각해 도나는 데리고 다니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인간이다. 친구는 그런 나를 다 받아주고 거리를 유지해주고 또 혼자 있을 시간까지 준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안다. 덕분에 상대에게 나를 적당히 맞추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무리가 없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관계는 평생 가까이에서 제자리걸음이다. 변치 않고 계속 제자리걸음을 했더니 관계는 깊고 깊고 깊어졌다. 근데...... 나의 소중한 친구...… 또 딴 데로 가네?
"보미야, 그쪽 아니라니까. 이쪽으로 온나. 으이구." - P96

스스로를 꿈으로 만드는 데 이토록 성공한 도시가 또 있을까. Paris‘라는 단어를 새기기만 해도 팔리는 상품들이 있다.
그 단어를 듣기만 해도 꿈꾸는 얼굴로 돌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파리라는 단어 속에서 각자의 꿈은 다르겠지만그 배경엔 언제나 에펠탑이 있다. 에펠탑은 겨우 130년 만에이 오래된 도시의 수많은 상징들을 물리치고 이 도시의 지울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당연히 2024년 파리 올림픽의 메달에도 에펠탑이 있다. 말 그대로다. 에펠탑 보수 공사에서 채취한철조각 91킬로그램을 활용해 금은동 메달 뒷면에 에펠탑의 실제 철조각을 박은 것이다. 이로써 모든 운동선수들의 꿈에 프랑스란 꿈이 더해졌다. 이 꿈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언제나 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 P108

카몽이스의 흉상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오르며 시선은 고집스럽게 계단으로만 향한다. 내 뒤에 에펠탑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으로 에펠탑을 만나는 순간을 내게 주고 싶기 때문이다. 계단을 다 올라 마침내 뒤돌아선다. 건물들 사이로 세느강이 보이고, 그 뒤로 에펠탑이 있다. ‘너 여기 파리야!‘라고 빼기는 얼굴로 알려주는 에펠탑. ‘감동할 순간이야!"라고 교육하는 에펠탑. 그 교육을 나는 오래도록 받았다.
하지만 볼 때마다 감정의 수위는 교육의 범위를 넘어선다. 저렇게나 아름답다고? 저렇게나 웅장하다고? 나의 로망이 저토록 거대했다고? 뻔한 것을 보고 뻔하지 않게 감동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금세 눈물이 맺힌다. 나는 당황한다. 솔직히 이나이에 에펠탑을 보고 눈물까지 맺힐 일은 아니지 않나. 에펠탑이 처음도 아니고, 파리가 처음도 아니고. 하지만 어쩌겠나. 이렇게 반응하는 이 몸도 나의 일부인걸. 그토록 좋은 것이다. 내가 파리에 있다는 사실이. 나의 지난한 일상이 꿈과 뒤섞이는이 기적이. - P111

돌아가는 길엔 점점 더 어두워지며 조명들이 제대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파리는 이제 유명 배우 같다. 어둠 속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는 파리를, 흔들리는 배 위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어쩜 이 도시는 주름살 하나 없이 이렇게 잘늙었을까 감탄만 나온다. 잘 관리된 노년. 영원한 낭만, 오래된과거가 현재형으로 빛난다. 강 표면까지 끝없이 흔들리며 각양각색의 조명들을 반사하고 있다. 문득 이 도시에서 인상파화가가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확신이 든다.
솜씨 좋은 인상파 화가가 강물 위에 끝없이 작품을 그리는 중이다. 붓질은 섬세하고, 순간순간 결과물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나는 세느강 수면에서도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한다. - P113

마지막으로 유람선은 에펠탑 앞에서 다시 방향을 튼다. 에펠탑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그 순간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조명을 반짝인다. 그 육중한 몸이 빛으로 별처럼 가벼워진다. 모두의 눈 속으로, 핸드폰 속으로, 강물 위로 아름다움이 낙화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주머니를 꺼내 떨어지는 별빛을, 스치는 반짝임을, 친구 얼굴에 일렁이는 감동을 담는다. 기억하고 싶은 그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꾹꾹 눌러 담아서 아쉬움으로 꼭꼭 닫아둔다. 이 시간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애틋하게 간직할 기억들이다. 40대 친구 둘이서 하는 여행도,
아이 없이 이토록 마음 편히 있는 시간도, 시시각각 터지는 웃음도, 무엇보다 이토록 빛나는 도시에 우리가 머물렀다는 사실까지도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지금 이곳의 모든 것이 아쉬워질 것이다. 이곳에 우리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가장 믿지 못할 무엇이 될 것이다. 뚱뚱해진 기억 주머니를 단단히 챙긴다. 주머니 안에는 온통 친구와의 파리 추억뿐이다. - P114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친구와 떨어져서 앉게 되었다. 나는우리가 지나는 역이 비르하켐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친구에게 바로 문자를 보낸다.
‘지금이야, 창밖을 봐•친구가 문자를 확인하고 고개를 드는 바로 그 순간 지하철은 세느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건물들 사이에 가려졌던 에펠 - P114

탑이 갑자기 탁 트인 세느강을 배경으로 튀어나온다. 빠르게달려나가던 모든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른다. 매 순간이 분절되어 찬란하게 새겨진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몸서리를 친다. 그 장면에 이젠 친구의 표정까지 더해졌다. 친구의 저표정은, 진짜다. 이 아름다움은, 진짜다.

우리가 이 아름다움 속에, 같이 있었다.

이 문장은 오래도록 믿기지 않을 것만 같다. - P115

한 세계가 가고 다른 한 세계가 왔다. 겨우 두 시간 만에 세계는 완전히 뒤바뀐다. 여행 친구를 선택하는 건 실은 어떤 여행 세계를 선택하느냐와 같은 문제라는 걸 깨닫는다. 좀 더 친숙한 세계를 택할 것인가, 좀 더 모험심 가득한 세계를 택할 것인가, 요리와 술이 넘치게 흐르는 세계를 택할 것인가. 천천히 오래 보는 세계를 택할 수도 있고, 빠르게 많이 경험하는 세계를 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게 새로운 세계가 찾아왔고, 덕분에 나는 완전히 다른 파리에 도착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친구에게 내가 지금까지 있었던 보미라는 세계의 이야기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다 보따리는 본격적으로 풀린다.
"밥 먹을 때 와인 한 잔 시켰다가 보미에게는 술 중독이라는소리 들었잖아."
"보미 언니는 술 못 마셔?"
"걘 주량이 맥주병 목이거든." - P126

2023년 5월 21일 / 선영과 오랑주리 / 다시, 마티스 전

가장 용기가 되는 건 과정들. 그림을 그린 과정을 그대로 기록한 20개의 사진 속에서 없던 무늬가 생기고, 줄무늬는 격자무늬로 바뀌고, 다리의 모양이 바뀌며 그림 속 여자의 고개가 빳빳하게 들리는 걸 본다. 가장 완벽한 상태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적절한 자신의 스타일에, 자신의 세계에 맞는 작품을 찾는과정. 그 여정. 그것이 내 세계를 찾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거의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6개월 동안 떠난 마티스의 타히티섬 여행을 기억할 것.


그림 속 세계에는 옳고 그름이 없었다. 다만 화가의 선택이필연이 될 뿐이다. 이곳은 거대한 성공의 세상이 아니라, 나만의 세상 속에서 나만의 빛남을 쟁취해나가는 세상이다. 내가창조주인 나의 세상 속에서 나만의 필연을 찾아가는 여정. 마티스 전시에서 유독 내 마음을 울린 건 그 여정이었다. 그의 고 - P133

민이, 그의 방황이, 그의 선택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이 지금내 눈앞에 있다. 그것이 나에게는 큰 자극이었다. 영원히 머물고 싶은 자극. 품이 넓어 언제든 새롭게 해석되는 자극. 나는잔뜩 상기된 얼굴로 선영이를 만났다. 나와 달리 선영이는 담담했다.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이곳을 둘러본 것만으로도친구에게 이 미술관은 소임을 다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모두가 파리의 미술관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녀의 행복이미술관 형광등 아래에 없다면 다른 곳을 찾아보면 된다. 파리는 크고, 그 매력은 결코 하나가 아니니까. 그럼 친구에게 꼭맞는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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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파리 지도는 새롭게 계속 그려졌다. 아침마다 유명한 파리가 그냥 우리 동네로 편입되었다. 부자 동네 생제르맹이 우리 동네가 되고, 뤽상부르 공원이 우리 동네 큰 정원이되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과거로 데려가는 자동차가 달린 길을 걸었다가, 오웬 윌슨처럼 그 성당 계단에 앉아 조용한 우리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주저 없이 그 새벽, 내발이 닿는 곳 모두를 우리 동네라 불렀고, 기꺼이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 동네는 점점 더 커져갔다. 길은 반듯하지 않아 늘 나를 낯선 곳에 데려다 놓았으니까. 그리고 나의 정처 없는 새벽 산책을 끝내는 건 언제나 바게트였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는 빵집을 발견하면, 혹시라도 그곳에 ‘ler prixmeilleure baguette (바게트 대회 1등 수상)‘라고 적혀 있으면,
나는 주저 없이 산책을 끝내고 지갑을 열었다. - P33

트라디를 뜯어 먹으며 하는 일은 늘 같았다. 오늘의 운명 찾기. 식탁 앞에 앉아 수년간 구글맵에 표시해놓은 별들을 헤매며 오늘 내 기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운명의 장소를 찾는 것이다. 매일의 산책 길을 선택하는 이야기나, 끌리는 빵집이 나오는 순간 산책을 멈춘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눈치를 챘을지도모르겠다. 그렇다. 어차피 파리 자체를 운명이라 여기며 온 이상, 이곳에서 나는 철저히 운명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의마음이 이끄는 그곳이 바로 오늘 나의 운명, 평소 그토록 계획짜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파리에서는 아무 계획이 없다. 모두에게 말했다. "정말 아무 계획 없어." 물론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말했다. "계획을 안 짜는 걸 계획했겠지." 엄마, 그렇게 나를 단숨에 간파하지 말라고. - P35

나는 책마다 퐁피두 센터에 대한 사랑을 숨겨두었다. 《모든 요일의 기록》에서는 "여행이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 아침 바게트가 일상이 되고, 노천카페가 일상이 되고, 밤새워 쓰는글이, 퐁피두 센터가 (중략)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라고 썼고,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는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이 땅을 떠나 그 땅에 도착해야만 하는가. (중략) 너무 보고 싶어 세 번이나 들러서보고 또 봤던 미술관 한 귀퉁이의 조각상만 다시 보고 싶었다"
라고 썼고,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에선 "여행자라면 누구나 이마에 박고 살아가는 자신만의 별.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도 이마엔 자신만의 별이 박혀 있단다. (중략) 나의 별은 파리 퐁피두 센터에 있었는데, 너의 별은 밤의 베네치아에 있었구나"라고 썼다. 심지어 이 책의 시작 부분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스무 살, 파리에게 첫눈에 반했다. - P37

무엇이 그렇게 좋았을까. 또렷하게 말하긴 조금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나는 그곳에 있는 나를 좋아했다. 처음 보는 그림에 그토록 마음을 내주고, 처음 알게 된 화가의전시실에 오래도록 앉아 있는 나를 좋아했다. 위로할 길 없는슬픔을 가진 조각상이 마음 쓰여서 퐁피두 센터 앞을 지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매번 다시 들어가는 나를, 찬찬한눈길로 그 조각상의 구석구석을 토닥이며 위로하는 나를 좋아했다. 모네의 그림도 좋아하고, 반 고흐의 그림에도 열광했지만 그 감정과 이 감정은 달랐다. 20대의 나는 유독 특정 슬픔에예민하게 반응했다. 토해내는 슬픔이 아니라 속으로 삼키고또 삼켜 내장이 너덜너덜해져 버린 슬픔을 잘 알아봤다. 그런슬픔이 퐁피두 센터에 있어 나는 이해받고 있다고 느꼈다.
스무 살 때만 매일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그다음 파리에 왔을 때도 아침이면 늘 퐁피두 센터에 들렀다가 어디론가 다시 떠나곤 했다. 겉에서 보기만 해도 좋았고, 좋아하는 장소에 그렇게 쉽게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도 좋았고, 하루가 좋아하는마음에서 시작되는 것도 좋았다. 그러니 이번 여행을 퐁피두센터에서 시작하는 것은 예정된 나의 운명이었다. - P38

밤 9시, 미술관이 문을 닫는다는 방송이 나올 때가 되어서야나는 간신히 퐁피두 센터를 빠져나왔다. 저 멀리 에펠탑 옆으로 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며. 이러니 계속 올 수밖에 없지, 라고 중얼거리며. 이러니 오래도록 그림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도 몰랐던, 내게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작품들이 다 챙겨서 오롯이 내게 안겨주고 있으니 말이다.
구글맵을 켜서 집까지 가는 길을 검색했다. 퐁피두 센터에서 집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이 사실이 어찌나 어이가없는지, 퐁피두 센터 앞에 서서 혼자 바보처럼 웃었다.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데 눈에는 어쩐지 눈물이 고였다. 이곳에 오고 싶어 그 오랜 시간을 헤맸는데, 이제는 버스 한 번이면올 수 있다. 버스 한 번이면 내 몫의 용기를 챙길 수 있다. 언제든. 그야말로 언제든, 믿기지 않지만, 이것이 내가 도착한 곳이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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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망매
ㅡ흰 꽃들의 노래


너는
거기 앉아
죄 없이 눈부시구나

봄 나무 불길 속에 앉아
헤헤 웃고 있구나

손 흔들며 뛰어갈 때
귓불을 흔들던 작은 귀걸이
때죽나무 조롱조롱 흰 종을 달고

무얼 하고 놀고 있느냐

산천 가득 다시 돋는
하얀 꽃망울
종아리 아래 빛나던
열여덟 네
뒤꿈치처럼

햇빛 재잘거리는 물속
젖은 얼굴에 흰 수국
못다 한 말 자줏빛 꽃술로 품고
산목련 숭어리마다 맺힌 응어리

설운 땅 닿지 말고 딛고 가라고
절뚝절뚝 철쭉이 피네 오르네
더 놀고 가렴
다물지 못한 입에 이팝꽃 피네
천석 만석
저녁을 짓네

이 멀고 억울한 향기
나는 알지
네 몸 냄새
캄캄한 향기

무덤가에 휘이 호랑지빠귀
네 휘파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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