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은 또 어떻고. 아침 산책 길에 붙어 있는 광고판을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부르델 미술관의 재개관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 바로 달려갔다. 우연에 복종하는 것이 이곳에서의 나의 의무.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다. 부르델이 로댕의 오랜 조수였다는 사실만 겨우 알고 간 부르델 미술관은 들어서자마자 나를 압도했다. 규모도 힘도 예상을 빗나간다. 고요함 속에서 저토록 뿜어 나오는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장유명한 <활 쏘는 헤라클레스> 작품 옆에서 손가락 하나, 종아리 근육 하나까지 오래 유심히 보았다. 제목에도 ‘활 쏘는‘이라고 표기돼 있지만, 이 작품에는 화살이 없다. 어떤 사람은 활쏘기 전의 포즈라 해석하고, 어떤 사람은 활 쏜 직후의 포즈라해석한다. 나는 후자의 해석에 마음을 둔다. 그 표정으로 보건대, 이미 화살은 떠난 직후니까. 안간힘을 쓰는 표정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다 쏟아부은 표정. 고요하고 강인하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까지도 운명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다. 날아간 화살은 이미 상대의 심장을 뚫었다는 걸 알 수 있었 - P54

다. 거센 빗소리가 미술관 앞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나는 작품과 충만하게 함께였다.
나는 내가 좋아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작가의 세계에기꺼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동네 산책을 하다가 자드킨 미술관을 발견하고 그의 아틀리에를 통째로 대여한 기분을 만끽하며 (관람객이 나 혼자였다) 조각들을 마음껏 즐겼고, 퐁피두 센터옆의 아틀리에 브랑쿠시도 나에겐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미술관이 공짜였다(다시 말하지만, 파리는 자기방식대로 친절하다). - P55

마침내 꽃도 샀다. 여행자의 신분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그것. 노트르담 대성당 옆을 지나가다가 꽃시장을 발견하고, 그곳에 들어가서 작약 열 송이를 샀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누군가의 파리 사진에서 작약을 보았다. 뭐지. 저렇게 크고, 저렇게 탐스럽고, 한 송이만으로도 저토록 풍성한 저 꽃은.
그땐 그 꽃이 작약인 줄도 몰랐다. 창밖의 파리 지붕들을 배경으로 오래된 나무 창틀 앞에 놓인 꽃병 사진이 이상하게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 사진을 부적처럼 컴퓨터 바탕화면에 걸어놓고 나는 오래도록 파리를 향한 마음을 키웠다. 그 꽃이 작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작약은 파리를 상징하는 나의 꽃이 되었다. - P56

거짓말처럼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거센 비. 웬만한 비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프랑스 사람들도 차양 밑으로 뛰어 들어가는 비였다. 거리가 빠르게 텅 비었다. 우산을 썼지만 한쪽 어깨가 순식간에 젖었다. 우산을 푹 쓰고 빠른 속도로 걷는데 뭔가 이상했다. 이렇게나 비가 내리는데, 물웅덩이마다 햇빛이 고여 있었다. 고개를 드니 거리 전체가 비와 햇빛으로 반들거렸다. 이건 무지개의 신호인데? 하며하늘 쪽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봐버렸다. 너무나도 큰 쌍무지개를 모두가 뛰느라, 비를 피하느라 못 보고 있었지만, 나는봐버렸다. 본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다가 또 하염없이 무지개를 봤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큰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내내 내 얼굴에는 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세 좋게 내리는 비와 기세 좋은 해가 만든 크고 선명한 그 무지 - P64

개도 오래 하늘에 걸려 있었고.
이걸로 다 되었다. 뭘 더 바라겠는가. 마침내 내가 이런 시간에 도착했는데, 두꺼운 갑옷을 입고 의무와 책임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매 순간 칼을 겨누며 나에게 달려오는 수많은 요구들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앞으로,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던 시기가 있었다. 결코 혼자가 아니었지만, 결코 누구와도 함께일 수 없었던 시간들. 혼자 삼키고 혼자 무릎을 털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갑옷을 고쳐 입는 동안 마음에는 굳은살이 많이 박였다. 지금부터 굳은살을 다 떼어내고, 생살의 따끔따끔한 시기를 거쳐, 새살이 돋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보드라운 시간들이 필요하다. 오늘 먹은 버터의 부드러움을 마음에 바르고, 각양각색의 치즈들로 감싸서, 일곱 가지 무지개의 빛깔을 쬔다면 너무 늦지 않게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조급할 필요는 없다. 비로소 나도 낯선 시간에 당도한 것이니까. 나도 낯선 시간의 틈에 닻을 내린 거니까. 우선은 낚싯대를드리우고 마음의 물결을 멍하니 바라보자. 애초에 물고기를바라고 던진 낚싯대가 아니지 않니. - P65

응? 뭐? 눈물?

친구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부터 들어찼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친구가 눈물을 닦으며 웃는다. 어, 이 정도라고? 나는 당황한다. 이 방에 사로잡혀서 한 시간 넘게 모네의 <수련>만 보다가 결국 다른 전시관은 보지도 못하고 나가야만 했던 오래전의 나를 소환한다. 그때의 나라면 지금의 친구를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모네의 <수련>을 본다고 연보라색 옷까지 맞춰 입고 나온 친구를 지금의 나는 놀리지만, 오래전의 나라면친구 옆에서 같이 울었을 테니까. 여긴 아름다움이 온몸에 직진으로 와서 안겨버리는 공간이니까. - P85

그런 거다. 관계는 주고받는 거다. 나는 내가 하는 게 편하고, 함께 있는 누군가가 신경을 안 쓰는 게 좋고, 그리하여 결국 다 내가 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좋고 싫음도 지나치게 분명하기에 나는 내가 좋은 걸 해야만 하고, 싫은 표정은 숨길 줄 모른다. 그 와중에 수시로 멈춰 사진을 찍고, 뭔가를 끄적이고, 자꾸 자기 세상으로 빠져버린다. 내가 생각해 도나는 데리고 다니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인간이다. 친구는 그런 나를 다 받아주고 거리를 유지해주고 또 혼자 있을 시간까지 준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안다. 덕분에 상대에게 나를 적당히 맞추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무리가 없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관계는 평생 가까이에서 제자리걸음이다. 변치 않고 계속 제자리걸음을 했더니 관계는 깊고 깊고 깊어졌다. 근데...... 나의 소중한 친구...… 또 딴 데로 가네?
"보미야, 그쪽 아니라니까. 이쪽으로 온나. 으이구." - P96

스스로를 꿈으로 만드는 데 이토록 성공한 도시가 또 있을까. Paris‘라는 단어를 새기기만 해도 팔리는 상품들이 있다.
그 단어를 듣기만 해도 꿈꾸는 얼굴로 돌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파리라는 단어 속에서 각자의 꿈은 다르겠지만그 배경엔 언제나 에펠탑이 있다. 에펠탑은 겨우 130년 만에이 오래된 도시의 수많은 상징들을 물리치고 이 도시의 지울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당연히 2024년 파리 올림픽의 메달에도 에펠탑이 있다. 말 그대로다. 에펠탑 보수 공사에서 채취한철조각 91킬로그램을 활용해 금은동 메달 뒷면에 에펠탑의 실제 철조각을 박은 것이다. 이로써 모든 운동선수들의 꿈에 프랑스란 꿈이 더해졌다. 이 꿈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언제나 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 P108

카몽이스의 흉상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오르며 시선은 고집스럽게 계단으로만 향한다. 내 뒤에 에펠탑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으로 에펠탑을 만나는 순간을 내게 주고 싶기 때문이다. 계단을 다 올라 마침내 뒤돌아선다. 건물들 사이로 세느강이 보이고, 그 뒤로 에펠탑이 있다. ‘너 여기 파리야!‘라고 빼기는 얼굴로 알려주는 에펠탑. ‘감동할 순간이야!"라고 교육하는 에펠탑. 그 교육을 나는 오래도록 받았다.
하지만 볼 때마다 감정의 수위는 교육의 범위를 넘어선다. 저렇게나 아름답다고? 저렇게나 웅장하다고? 나의 로망이 저토록 거대했다고? 뻔한 것을 보고 뻔하지 않게 감동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금세 눈물이 맺힌다. 나는 당황한다. 솔직히 이나이에 에펠탑을 보고 눈물까지 맺힐 일은 아니지 않나. 에펠탑이 처음도 아니고, 파리가 처음도 아니고. 하지만 어쩌겠나. 이렇게 반응하는 이 몸도 나의 일부인걸. 그토록 좋은 것이다. 내가 파리에 있다는 사실이. 나의 지난한 일상이 꿈과 뒤섞이는이 기적이. - P111

돌아가는 길엔 점점 더 어두워지며 조명들이 제대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파리는 이제 유명 배우 같다. 어둠 속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는 파리를, 흔들리는 배 위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어쩜 이 도시는 주름살 하나 없이 이렇게 잘늙었을까 감탄만 나온다. 잘 관리된 노년. 영원한 낭만, 오래된과거가 현재형으로 빛난다. 강 표면까지 끝없이 흔들리며 각양각색의 조명들을 반사하고 있다. 문득 이 도시에서 인상파화가가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확신이 든다.
솜씨 좋은 인상파 화가가 강물 위에 끝없이 작품을 그리는 중이다. 붓질은 섬세하고, 순간순간 결과물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나는 세느강 수면에서도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한다. - P113

마지막으로 유람선은 에펠탑 앞에서 다시 방향을 튼다. 에펠탑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그 순간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조명을 반짝인다. 그 육중한 몸이 빛으로 별처럼 가벼워진다. 모두의 눈 속으로, 핸드폰 속으로, 강물 위로 아름다움이 낙화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주머니를 꺼내 떨어지는 별빛을, 스치는 반짝임을, 친구 얼굴에 일렁이는 감동을 담는다. 기억하고 싶은 그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꾹꾹 눌러 담아서 아쉬움으로 꼭꼭 닫아둔다. 이 시간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애틋하게 간직할 기억들이다. 40대 친구 둘이서 하는 여행도,
아이 없이 이토록 마음 편히 있는 시간도, 시시각각 터지는 웃음도, 무엇보다 이토록 빛나는 도시에 우리가 머물렀다는 사실까지도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지금 이곳의 모든 것이 아쉬워질 것이다. 이곳에 우리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가장 믿지 못할 무엇이 될 것이다. 뚱뚱해진 기억 주머니를 단단히 챙긴다. 주머니 안에는 온통 친구와의 파리 추억뿐이다. - P114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친구와 떨어져서 앉게 되었다. 나는우리가 지나는 역이 비르하켐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친구에게 바로 문자를 보낸다.
‘지금이야, 창밖을 봐•친구가 문자를 확인하고 고개를 드는 바로 그 순간 지하철은 세느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건물들 사이에 가려졌던 에펠 - P114

탑이 갑자기 탁 트인 세느강을 배경으로 튀어나온다. 빠르게달려나가던 모든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른다. 매 순간이 분절되어 찬란하게 새겨진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몸서리를 친다. 그 장면에 이젠 친구의 표정까지 더해졌다. 친구의 저표정은, 진짜다. 이 아름다움은, 진짜다.

우리가 이 아름다움 속에, 같이 있었다.

이 문장은 오래도록 믿기지 않을 것만 같다. - P115

한 세계가 가고 다른 한 세계가 왔다. 겨우 두 시간 만에 세계는 완전히 뒤바뀐다. 여행 친구를 선택하는 건 실은 어떤 여행 세계를 선택하느냐와 같은 문제라는 걸 깨닫는다. 좀 더 친숙한 세계를 택할 것인가, 좀 더 모험심 가득한 세계를 택할 것인가, 요리와 술이 넘치게 흐르는 세계를 택할 것인가. 천천히 오래 보는 세계를 택할 수도 있고, 빠르게 많이 경험하는 세계를 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게 새로운 세계가 찾아왔고, 덕분에 나는 완전히 다른 파리에 도착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친구에게 내가 지금까지 있었던 보미라는 세계의 이야기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다 보따리는 본격적으로 풀린다.
"밥 먹을 때 와인 한 잔 시켰다가 보미에게는 술 중독이라는소리 들었잖아."
"보미 언니는 술 못 마셔?"
"걘 주량이 맥주병 목이거든." - P126

2023년 5월 21일 / 선영과 오랑주리 / 다시, 마티스 전

가장 용기가 되는 건 과정들. 그림을 그린 과정을 그대로 기록한 20개의 사진 속에서 없던 무늬가 생기고, 줄무늬는 격자무늬로 바뀌고, 다리의 모양이 바뀌며 그림 속 여자의 고개가 빳빳하게 들리는 걸 본다. 가장 완벽한 상태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적절한 자신의 스타일에, 자신의 세계에 맞는 작품을 찾는과정. 그 여정. 그것이 내 세계를 찾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거의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6개월 동안 떠난 마티스의 타히티섬 여행을 기억할 것.


그림 속 세계에는 옳고 그름이 없었다. 다만 화가의 선택이필연이 될 뿐이다. 이곳은 거대한 성공의 세상이 아니라, 나만의 세상 속에서 나만의 빛남을 쟁취해나가는 세상이다. 내가창조주인 나의 세상 속에서 나만의 필연을 찾아가는 여정. 마티스 전시에서 유독 내 마음을 울린 건 그 여정이었다. 그의 고 - P133

민이, 그의 방황이, 그의 선택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이 지금내 눈앞에 있다. 그것이 나에게는 큰 자극이었다. 영원히 머물고 싶은 자극. 품이 넓어 언제든 새롭게 해석되는 자극. 나는잔뜩 상기된 얼굴로 선영이를 만났다. 나와 달리 선영이는 담담했다.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이곳을 둘러본 것만으로도친구에게 이 미술관은 소임을 다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모두가 파리의 미술관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녀의 행복이미술관 형광등 아래에 없다면 다른 곳을 찾아보면 된다. 파리는 크고, 그 매력은 결코 하나가 아니니까. 그럼 친구에게 꼭맞는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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