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디밀자 기차표와 거스름돈이 나왔다. 행선지는 수원이었다. 인천서 수원까지, 선로가 좁고 기차도 작은 수인선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동차에 영광과 양현은 올라탔다. 삐이! 하고 내지르는 기적 소리와 함께 기동차는 움직였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유랑길을 끝낸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본다.
서해의 끝없는 개펄, 그리고 아득하게 펼쳐져 있는 염전, 두 사람은 다 같이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구 끝을 작은기차가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세상과 차단된좁은 공간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가난하고 이지러진 영혼이 빈틈없이 밀착되어 오는 것을 느낀다. 기찻간은 사람들온기로 몹시 춥지는 않았다. 독특한 억양과 사투리 비슷한 말들이이따금 귀에 흘러 들어왔고 아이 우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위축되고 긴장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레일을 넘어가는 차바퀴의 울림조차 정답고 포근하게 들려왔다. 내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나온 길이 어떠했든지 이 순간의 충일함 따사로움만을 소중하게 품에 안듯, 그러나 역시 슬프기는 했다. - P198

얼굴을 들었다. 먼,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보낸다. 하늘과 지상의 선은 뚜렷하건만 어째 사람의 삶이 수없는 곡선으로 이다지도 수없이 얽혀 있는가. 저 하늘의, 지상의선이 뚜렷하다. 인생도 명쾌한 것일 수는 없는가. 푸른 하늘에 실구름이 흐르는데 저 하늘과 같이 영롱할 수는 없는가. 그러면서도 양현은 영광과의 사랑이 아팠다. 영광이 그렇게 자상한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양현은 미처 몰랐다. 영광과 헤어지고 나면 언제나 떠오르는 것은 시니컬한 미소였고 떠밀어내는 것 같은 몸짓이었는데, 얼마나 많이 자기 자신이 허둥대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의 따뜻한 체온이 몸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년같이 웃는 얼굴, 근심 면 눈동자가 망막 속에 남아 있었다. 송영광이라는 사내,
행복의 느낌, 이미 그런 것은 양현에게 기득권을 안겨주었는데, 확신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 양현은 벌써 그것을 잃는 데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진정 크나큰 환희는 슬픔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목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아이를 데리고 땀을 흘리며 병원을 찾아온 젊은 댁네와 손마디가 굵은 아이의 아비, 무척초라해 뵈던 그들이었지만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던 풍경은 아름다웠다. 양현은 그들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 남자는 인천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하다가 낙상했으며 양현이 근무하는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양현은 부르르 떨었다. - P204

분명 그랬다. 영광에게 그 말은 제동을 건 결과가 되었다. 목표도 희망도 없이 찾아온 인천이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양현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찾아왔고 때문에 결과도 과정도머릿속에는 없었다. 그냥 뭔가에 내맡겨진 자신을 수습할 수 있게한 것이 양현의 말이었던 것이다. 부친 송관수의 얘기를 한 것도그 때문이었다.
욕망만큼, 욕망이 강하면 강한 만큼, 그것을 자제하고 그것에 제동을 거는 힘이 상승하는 영광의 심리 상태. 그 미묘한 현상이 나타니는 탓도 물론 있었고 또 자제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도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양현이 의사 노릇을 하며 생활을 꾸려갈 그러한 정착은 그것이 도시이건 농촌이건 간에 영광은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같은 관계는 사랑의 훼손으로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성격상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생활의 능력이충분한 양현은 그러나 생활의 현실을 모를 것이며 생활면에서는부동적(動的)일 수밖에 없는 영광은 현실이 그 얼마나 가열한것인지 노가다로 전전했던 동경생활에서 뼈에 사무치도록 체득했다. 영광은 그런 자기 심정을 부친의 예를 들어서 완곡하게 전하려했지만 머리와 꼬랑지를 잘라먹고 한 얘기가 과연 양현에게 어느만큼 전달이 되었는지, 그러나 영광은 더 이상 중언부언할 수가 없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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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가 관음탱화 앞에 섰을 때 백씨는 불상 앞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무엇을 기원하는지 예배를 올리는 한복차림의 그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눈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화에 대한 상식이 없었고 종교적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판쯤으로 인식했던 명희 눈에 처음 관음상이 비쳤을 때 그 현란함과 섬세한 데 호기심을 느끼긴 했다. 보관이며 영락, 투명한 옷자락의 유연한 선과 그것에 싸인 아름다운 자태는 정교했고 색조는 유려했다. 그리고 환국의 부친이자 서회의 남편 김길상에게 이와 같이 숨은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백씨는 계속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오십대 중반의 나이, 평소 집에 있을 때는 오래된 가구의 일부처럼 각별한 의미도 존재도뚜렷하지 않았는데, 하기는 모처럼의 나들이여서 차림이 달라지기는 했다. 은은한 보랏빛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모습은 오랜 세월 한복에 길들여진 독특한 멋이 있었고 또 서울 여자의 세련된 탯거리가 역력했지만 그러나 그저 그런가 보다 했던 사람이 피어오르는 향과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부처님 미소를 향해 나래를 펴듯, - P96

나래를 접듯 일어서고 엎드리는 동작을 반복하며 경건하게 예배를드리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탱화에서 눈을 떼고백씨를 바라보던 명희는 여간하여 그 예배가 끝날 것 같지 않아서다시 관음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명희는 참으로 기이한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현란하게 보이던 관음상이 폐부 깊은 곳, 외로움으로 명희 이마빼기를 치는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명희는 자기마음 탓이려니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숙연한 슬픔, 소소한 가을 바람과도 같이 영성을흔들며 알지 못할 깊고도 깊은 아픔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슬픔인 것 같았다.
법당에서 나왔을 때, 선명한 단풍과 아직은 푸름이 남아 있는 맞은편 숲이 투명한 푸른 하늘에 묻어날 듯 명희 시계에 들어왔다. 마치 인생의 한 고개를 넘은 듯 명희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나왔다. 도대체 김길상이란 누구냐 하는 의문도 명희 마음속에서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 P97

그가 출옥한 지 십여년, 그러나 명희가 길상을 만난 것은 환국이 결혼할 무렵에서 그 이후 서너 번인가? 정확하게는 환국이 결혼하던 식장에서 처음 명희는 길상을 보았다. 투사형의 장대한 체구를 상상했던 명희는 뜻밖이라 생각했다. 키는 컸지만 다소 마른 편이었고 몸가짐이 매우 조용했다. 투사형이기보다 오히려 명상적이며현실과는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언젠가 임명빈은
"출신 신분과도 다르고 활동을 한 행적과도 다르고, 학식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뭐랄까? 인간의 존엄성이라 할까, 범치 못할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더군. 그분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야. 말수도 적은 편인데 그 말도 아주 절제된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모든 것이 생래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생 - P97

역정에서 갈고 다듬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사람의 인연이란 참 신비스럽다는 생각을 했지. 신분이 극과 극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어울리는 한쌍의 부부도 세상에 그리 흔치는 않을 거야. 그분들의 인생이야말로 굉장한 드라마다."
그런 말을 했다. 문청 시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임명빈의 말투를 그때 명희는 민망스럽게 생각했다.
"드라마 아닌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그, 그야 그렇지만."
해가 떨어지고 저녁을 끝냈을 때 산사에는 어둠이 밀려왔다. 상좌가 와서 불을 밝혀주고 간 절반은 한결 넓어 보였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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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치가 산골에서 처음 이 항구에 왔을 때, 이곳이 그에게는 경이로운 신천지였다. 항구 가득히 정박한 작은 배들과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장식한 어마어마하게 큰 윤선이 뱃고동을 울리며 입항하는 광경이며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가득 쌓여 있었고 잡화상의 밤은 화려했으며 홍등가(紅燈街)의 불빛은 그 얼마나 매혹적이었던가.
그러나 몽치는 이내 그런 황홀감과 작별을 했다. 소금에 전 누더기를 입고 파도에 휩쓸리며, 파도가 오면 뒤로 나자빠지고 파도가 가면 앞으로 고꾸라지며 고기떼를 쫓아가는 배, 끝없이 넓은 바다 위에 나뭇잎 같은 배, 어로 작업은 그야말로 혈투였으며 흥분의 도가니였다. 몽치는 생사를 건 것 같은 생생한 그 삶의 현장을 사랑했다. 수만 맹수들의 포효 같은 파도와 맞서는 것이 통쾌했다. 걸걸한 바다사내들의 목청이며 핏발선 눈동자, 힘줄 솟은 적동색 팔뚝이며 짧게 해치우는 대화, 욕설로 정을 주고 속담으로 비아냥거리는 사내들, 누더기의 모습으로, 막걸리 한잔 국밥 한그릇 입가심하고 항구의 거리를 누비는 몽치였지만 그는 자꾸만 가슴이 커지는것을 느꼈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두려움은 산중, 바람소리밖에 없었던 아비 시체 곁에서 이미 다 겪어버렸다. - P286

산짐승의 울부짖음과 산 속에 있는 모든 생령(生)들의 그 가만가만 부르며 화답하는 숲속을 치닫고 벼랑을 타며 바람이 키웠고 햇빛이 보살핀 아이, 지감은 지식을 베풀었으며 해도사는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주었다. 휘는 우의를, 영선은 누이 같은 사랑을주었다. 그렇게 예비된 육신과 영혼이 파도에 부딪치고 바다에 내던져지고, 나약하며 사악하고 선량하면서 노회하고,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열정과 냉담, 온갖 특성의 인간들 속에서 몽치는 폭을넓히며 대응해 가고 있는 것이다.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간신히 소주 한 병을 구한 몽치는 서문고개 언덕, 휘의 집으로 갔다. 빈집같이 집안이 조용했다. 안방은 깜깜했고 작은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 P287

눈을 부릅뜨고 죽은 조준구의 형상은 끔찍했다.
몽치는 부릅뜬 조준구의 눈을 쓸어서 감겨주었다.
끔찍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기능, 존재했던 육체의 마지막 한오리 한방울까지 훑어내고 짜내버린 종말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고 머리끝이 치솟는 것 같은 공포감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연민을 느끼게 했다. 생명에 대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연민이었다. 호박덩이 같았던 두상은 쪼그라져서 조그맣게 돼 있었다. 몸도 줄어들어서 아주 작아져 있었다. 손가락은 모두 펴진 채, 그 다섯손가락은 갈고리처럼 굽어져 있었다. 3년을 넘게 병상에 있었는데 어쩌면 조준구의 마지막 일 년은 살아 있었다기보다 죽음을 살았는지 모른다. 죽은 후의 과정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시신을 씻을 때 욕창으로 탈저(脫疽)된 부분이 문적문적 떨어져나왔고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의를 입히고 갈고리 같이 된 손가락을 펴고 두 팔을 가지런히 한 뒤 염포(殮布)로 묶고,
그러는 동안 몽치는 땀을 많이 흘렸다. 거들어주는 휘도 땀을 흘렸다. 염습을 끝내고 나왔을 때 별안간
"아이고 아이고오!"
머리를 푼 병수댁네가 들린 사람같이 곡성을 올렸다. 그 소리는 심야의 정적을 찢고 사람을 놀라게 했다. 곡성은 마치 한줄기 빛이되어 시공을 뚫고 저 머나먼 저승의 나라, 명부(冥府)의 캄캄한 삼도천까지 울리어 가고 있는 듯 이상하고도 이상한 귀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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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양현이, 가족들 사랑을 한몸에 받는 양현이, 의전학생인 양현이, 시샘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기생의 딸인 양현이, 집안과는 아무 상관도 핏줄도 없는 양현이, 그런 그가 장중의 구슬 같은 존재라는 것은 분노를 살 만한 일이 아닌가. 집안의 큰며느리로, 그 역시 귀하게 당당하게 자란 처지고 보면, 덕회의 입장에서보면 절대적으로 약자인 양현이 주인처럼 행세한다,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더 이상 얘기를 듣지 않아도 일목요연하게 명희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양현의 고통을 가족들이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의 불화가 초래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것 때문이겠는데 양현의 고통은 참는 것에 있는것이 아니며, 덕회의 악의를 견디어내기 힘들어서도 아니며 서희나 환국이를 기만해야 하는 자신의 태도에 있는 것 같았다. 명희는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울음을 멈춘 양현은 다소 진정이 되었는지 구겨넣어 두었던 것을 꺼내고 보니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는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 P175

올해 한해만 죽기로 결심하고 공부를 한다면 내년 봄에는 졸업이다. 그리고 어느 길을 택하든 간에 양현은 자연스럽게 최씨네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양현은 자유로운 천지를 꿈꾼적이 없었지만 하여간에 독립을 해야 한다는 문제는 양현에게 초미의 현실이었다.
‘일년만 참으면 돼. 일년만 꾸욱 참자.‘
양현은 형무소에 있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만나지 못한 기간을따진다면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나 만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해서 더욱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 그리움 때문에 자기만을 따돌린 덕희의 처사가 그토록 깊이 상처가 되었는지 모른다. 여하튼 덕희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도 지나쳤다 싶었는지 요즘 많이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양현이 명희집에서 잔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사실 덕회는 전전긍긍했다. 명희가 진상을 알게 되고 어른들이나 남편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여간한 낭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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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일본의 동물적 탐욕은 그 얼마나 많은 조선 백성들의운명을 바꾸어왔는가, 두메산골, 골짝골짝마다 핏줄같이 시내 흐르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 이 그 얼마인가. 만주로 가고 중국으로 가고 연해주로 가고 하와이 일본으로, 피값도 안되는 노동력을 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건만 도시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떼지어 다니고 지게 하나에 목숨을 건 사대육부 멀쩡한 사내들이 정거장마다 부둣가마다 허기진 눈빛으로짐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 바로 이들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방안에 앉은 사내들 부모들이었다. 정면 돌파를 했든 측면 지원을 했든지 간에 그들의 유대는 동지로서 깊고 강한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 - P64

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고관대작을 지냈던 자, 지주들, 친일파, 그들 자손들이 동경 유학길을 떠날 때 산간 벽촌에서 그들은 외롭게싸웠으며 일본의 치졸한 문화를 묻혀와서 이 강산에 뿌릴 때 왈 신식이라 했던가? 이 무렵 강쇠는 때묻은 바지저고리 입고 광주리엮어서 등에 메고 활동사진관 앞을 지나다가 왜놈한테 봉변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 가난한 독립 투사인 아비는 술병 하나 달랑 들고서 첩첩산중, 눈 쌓인 지리산 골짜기를 지나면서 목이 터져라!
「한오백년」 그것도 두 구절밖에 모르는 가락을 되풀이하여 부르다가, 졸지에 잃은 딸아이 생각을 하다가, 죽은 지 오래된 김환을소리쳐 부르며 욕설을 퍼붓다가, 눈길에 무릎을 묻고 울다가, 그러던 강쇠는 해도사 산막에 당도하자 술병 놓고 절 한번 하고 휘에게 학문을 가르쳐줄 것을 우격다짐으로 부탁했던 것이다. 수천 년 경험의 축적인 내 역사를, 수천 년 풍토에 맞게 걸러내고 또 걸러내어 이룩한 내 문화를 부정하고 능멸하며, 내 땅에서 천 년을 자란거목을 쳐뉘며 서구의 씨앗 하나 얻어다가 심을 때, 어디 내것을보존해야 한다는 논박이라도 나올 것 같으면 - P65

"뭐 까짓것 무당 푸닥거리 같은 짓거리, 개의할 것 없어요." 하며 그들의 사상을 계몽주의라 했었지. 송관수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진보적 식자라는 그들도 믿지 않았다. 형평사 운동으로 알게된 그 진보주의자들 역시 이론의 수식가(修飾家)가 태반이었으며학식은 처세요 의복 같은 것, 일본서 한창 유행인 풍조를 옮겨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실정이었다. 결국 그들이 지니고 온 지식의 정체는 내것을 부수고 흔적을 없게 하려는 것, 소위 개조론이며 조선의계몽주의였다. 부지불식(不知識)의 경우도 있었겠으나 동경 유학생과 기독교와 일본의 계몽주의 삼박자는 잘 맞는 셈이었다. 일본은 숨어서 어떤 미소를 머금었을까? 주권과 강토는 이미 그들 - P65

수중에 있는 것, 내용이 문제 아니었을까. 창조의 활력인 사고와관념과 사상, 즉 혼의 산물인 유형 무형의 것들을 부수어내고 공동(空洞)을 만들기만 한다면 일본은 손 안 쓰고 코 푸는 격, 그 텅텅비어버린 곳에다가 괴상한 현인신(現人神)이며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집어넣고 꾹꾹 눌러 다져놓는다면 조선족은 영원히 사라질것이다. 이모, 최모, 그들 추종자들이 계몽주의 기치를 높이 쳐들고 눈가림의 두루마기 점잖게 입고 우국지사로 거룩할 때 북만주설원에서는 모포 한 장에 의지하고 잠들었을 독립군.
밖에는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등잔불과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는 어쩐지 음산했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앞산에서 도깨비불이 오고가고 할 것만 같았다. - P66

나룻배의 사공 목소리가 맑은 햇빛을 뚫고 울려왔다. 그리고 배는 하류를 향해 내려갔다. 맞은편은 전라도 땅, 강물에 기슭을 적신 가파로운 산에는 수목이 울창했다. 백로가 환상같이 흰 깃을 펴고 날아간다. 산기슭에 잠긴 물빛은 산그늘 때문인지 푸르고도 녹색이다.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구나.‘
하얼빈에서 신경까지, 언덕 하나 없는 광활한 대륙이 눈앞에 떠올랐다. 숨이 막히게 끝이 없었던 광막한 대지, 그것은 어떤 공포감이었다. 홍이는 영광에게 바다는 불안하다고 말했다. 만주의 그 끝없는 벌판을 연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들고나고 하는 배들의 그 뱃고동 소리 때문이었을까. 떠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떠나지않고 있는 것은 더욱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보연이 나오면서 홍이는 차츰 전과 같이 침착해졌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으나 사실 그는 떠나는 데 있어서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 싸워야 하는, 전부를 내던져서 싸워야 하는 신념에 대한 회의였다. 그러나 그 회의는 그를 조선에 주저앉힐 만큼 큰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회의라기보다 홍이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이었는지 모른다.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로구나!"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어 말해본다. 그리고 이곳 이땅에서 씨앗이 하나 떨어져 자기 자신이 생겨난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 P84

"배신감을 느꼈다는 자네 심정 이해하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는 집착할 그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그게 조선의 현실이다. 모두가 피해자며 조선이라는 땅 자체가 집착할 그아무것도 없는 감옥인 게야."
"그렇겠지요. 그럴 겁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냉담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느꼈을까요."
"이서방, 파도가 눈에 뵈지 않는다고 바다가 조용한 건 아닐세. 상어떼가 무리를 지어 날뛰고 피래미 한 마리 숨을 곳이 없다면 조용한 그 자체는 더 무서운 것 아니겠나? 그러나 절망하지 말게. 민중들은 아직 순결하다.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지식인들이 일본인이라 할 때 대다수 민초들은 왜놈 왜년이라 하네. 역사적인 자부심과 피해 의식은 그들 속에 굳게 간직되고 있어. 그들은 일본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모멸하고 복종하는 체하면서도 결코 섬기지 않아. 그들은 조선의 대지(大地)이며 생명이다. 감옥에서 탈출할 수있고 그럴 계기가 주어진다면 민초들은 다 뛸 것이야. 의병의 의기는 아직 그들에게 등불로 남아 있어."
"형님은 사회주의입니까?"
"아니다." - P93

"지금도 맘에 맺혀 있습니까?"
"아, 아니다. 그런 것 없다. 세월이 가버렸는데 머할라꼬 그런 기이 남아 있겠노."
"세월이 가도 못 잊는 일이 있지요."
"못 잊는 일이야 많제."
한복은 조심스럽게 물 웅덩이를 건너뛰었다.
"하지마는 나는 내 한이 많아서 남 원망할 새도 없었다. 원망을 받아야 할 내가 누구를 원망하겠노."
"이제 그런 생각 하지 마시오. 형님이 무슨 죄졌다고."
"와 나한테 죄가 없겠노. 전생에서 지은 죄가 있었겄제."
"쓸데없는 소리."
한복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키운 거는 바람이고 빗물이고 마을사람이다."
"......"
"내 어릴 적에 거두어주시든 영만이어무니(두만네)도 생각이 나고, 오늘겉이 창대비가 쏟아지는 빗길을 가는데 이어 한자락을 짤라 매듭을 지어주면서 쓰고 가라 하든 낯선 아지매, 그런 사람도 가끔 생각이 난다."
"잊어버리시오."
세월이 가도 못 잊는 일이 있다 했으면서도 홍이는 한복이 더러 잊으라 한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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