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일본의 동물적 탐욕은 그 얼마나 많은 조선 백성들의운명을 바꾸어왔는가, 두메산골, 골짝골짝마다 핏줄같이 시내 흐르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 이 그 얼마인가. 만주로 가고 중국으로 가고 연해주로 가고 하와이 일본으로, 피값도 안되는 노동력을 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건만 도시에는 여전히 거지들이 떼지어 다니고 지게 하나에 목숨을 건 사대육부 멀쩡한 사내들이 정거장마다 부둣가마다 허기진 눈빛으로짐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 바로 이들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방안에 앉은 사내들 부모들이었다. 정면 돌파를 했든 측면 지원을 했든지 간에 그들의 유대는 동지로서 깊고 강한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 - P64
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고관대작을 지냈던 자, 지주들, 친일파, 그들 자손들이 동경 유학길을 떠날 때 산간 벽촌에서 그들은 외롭게싸웠으며 일본의 치졸한 문화를 묻혀와서 이 강산에 뿌릴 때 왈 신식이라 했던가? 이 무렵 강쇠는 때묻은 바지저고리 입고 광주리엮어서 등에 메고 활동사진관 앞을 지나다가 왜놈한테 봉변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 가난한 독립 투사인 아비는 술병 하나 달랑 들고서 첩첩산중, 눈 쌓인 지리산 골짜기를 지나면서 목이 터져라! 「한오백년」 그것도 두 구절밖에 모르는 가락을 되풀이하여 부르다가, 졸지에 잃은 딸아이 생각을 하다가, 죽은 지 오래된 김환을소리쳐 부르며 욕설을 퍼붓다가, 눈길에 무릎을 묻고 울다가, 그러던 강쇠는 해도사 산막에 당도하자 술병 놓고 절 한번 하고 휘에게 학문을 가르쳐줄 것을 우격다짐으로 부탁했던 것이다. 수천 년 경험의 축적인 내 역사를, 수천 년 풍토에 맞게 걸러내고 또 걸러내어 이룩한 내 문화를 부정하고 능멸하며, 내 땅에서 천 년을 자란거목을 쳐뉘며 서구의 씨앗 하나 얻어다가 심을 때, 어디 내것을보존해야 한다는 논박이라도 나올 것 같으면 - P65
"뭐 까짓것 무당 푸닥거리 같은 짓거리, 개의할 것 없어요." 하며 그들의 사상을 계몽주의라 했었지. 송관수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진보적 식자라는 그들도 믿지 않았다. 형평사 운동으로 알게된 그 진보주의자들 역시 이론의 수식가(修飾家)가 태반이었으며학식은 처세요 의복 같은 것, 일본서 한창 유행인 풍조를 옮겨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실정이었다. 결국 그들이 지니고 온 지식의 정체는 내것을 부수고 흔적을 없게 하려는 것, 소위 개조론이며 조선의계몽주의였다. 부지불식(不知識)의 경우도 있었겠으나 동경 유학생과 기독교와 일본의 계몽주의 삼박자는 잘 맞는 셈이었다. 일본은 숨어서 어떤 미소를 머금었을까? 주권과 강토는 이미 그들 - P65
수중에 있는 것, 내용이 문제 아니었을까. 창조의 활력인 사고와관념과 사상, 즉 혼의 산물인 유형 무형의 것들을 부수어내고 공동(空洞)을 만들기만 한다면 일본은 손 안 쓰고 코 푸는 격, 그 텅텅비어버린 곳에다가 괴상한 현인신(現人神)이며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집어넣고 꾹꾹 눌러 다져놓는다면 조선족은 영원히 사라질것이다. 이모, 최모, 그들 추종자들이 계몽주의 기치를 높이 쳐들고 눈가림의 두루마기 점잖게 입고 우국지사로 거룩할 때 북만주설원에서는 모포 한 장에 의지하고 잠들었을 독립군. 밖에는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등잔불과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는 어쩐지 음산했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앞산에서 도깨비불이 오고가고 할 것만 같았다. - P66
나룻배의 사공 목소리가 맑은 햇빛을 뚫고 울려왔다. 그리고 배는 하류를 향해 내려갔다. 맞은편은 전라도 땅, 강물에 기슭을 적신 가파로운 산에는 수목이 울창했다. 백로가 환상같이 흰 깃을 펴고 날아간다. 산기슭에 잠긴 물빛은 산그늘 때문인지 푸르고도 녹색이다.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구나.‘ 하얼빈에서 신경까지, 언덕 하나 없는 광활한 대륙이 눈앞에 떠올랐다. 숨이 막히게 끝이 없었던 광막한 대지, 그것은 어떤 공포감이었다. 홍이는 영광에게 바다는 불안하다고 말했다. 만주의 그 끝없는 벌판을 연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들고나고 하는 배들의 그 뱃고동 소리 때문이었을까. 떠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떠나지않고 있는 것은 더욱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보연이 나오면서 홍이는 차츰 전과 같이 침착해졌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으나 사실 그는 떠나는 데 있어서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 싸워야 하는, 전부를 내던져서 싸워야 하는 신념에 대한 회의였다. 그러나 그 회의는 그를 조선에 주저앉힐 만큼 큰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회의라기보다 홍이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이었는지 모른다.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로구나!"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어 말해본다. 그리고 이곳 이땅에서 씨앗이 하나 떨어져 자기 자신이 생겨난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 P84
"배신감을 느꼈다는 자네 심정 이해하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는 집착할 그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그게 조선의 현실이다. 모두가 피해자며 조선이라는 땅 자체가 집착할 그아무것도 없는 감옥인 게야." "그렇겠지요. 그럴 겁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냉담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느꼈을까요." "이서방, 파도가 눈에 뵈지 않는다고 바다가 조용한 건 아닐세. 상어떼가 무리를 지어 날뛰고 피래미 한 마리 숨을 곳이 없다면 조용한 그 자체는 더 무서운 것 아니겠나? 그러나 절망하지 말게. 민중들은 아직 순결하다.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지식인들이 일본인이라 할 때 대다수 민초들은 왜놈 왜년이라 하네. 역사적인 자부심과 피해 의식은 그들 속에 굳게 간직되고 있어. 그들은 일본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모멸하고 복종하는 체하면서도 결코 섬기지 않아. 그들은 조선의 대지(大地)이며 생명이다. 감옥에서 탈출할 수있고 그럴 계기가 주어진다면 민초들은 다 뛸 것이야. 의병의 의기는 아직 그들에게 등불로 남아 있어." "형님은 사회주의입니까?" "아니다." - P93
"지금도 맘에 맺혀 있습니까?" "아, 아니다. 그런 것 없다. 세월이 가버렸는데 머할라꼬 그런 기이 남아 있겠노." "세월이 가도 못 잊는 일이 있지요." "못 잊는 일이야 많제." 한복은 조심스럽게 물 웅덩이를 건너뛰었다. "하지마는 나는 내 한이 많아서 남 원망할 새도 없었다. 원망을 받아야 할 내가 누구를 원망하겠노." "이제 그런 생각 하지 마시오. 형님이 무슨 죄졌다고." "와 나한테 죄가 없겠노. 전생에서 지은 죄가 있었겄제." "쓸데없는 소리." 한복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키운 거는 바람이고 빗물이고 마을사람이다." "......" "내 어릴 적에 거두어주시든 영만이어무니(두만네)도 생각이 나고, 오늘겉이 창대비가 쏟아지는 빗길을 가는데 이어 한자락을 짤라 매듭을 지어주면서 쓰고 가라 하든 낯선 아지매, 그런 사람도 가끔 생각이 난다." "잊어버리시오." 세월이 가도 못 잊는 일이 있다 했으면서도 홍이는 한복이 더러 잊으라 한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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