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이 잡혀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조지에게 전한 사람은아일린이었다. 바로 아일린이 밤마다 호텔 로비에서 감수하고있는 위험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일린은 스페인에서자신이 했던 경험들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걸 알게된다. 그 경험은 조지의 일반적인 지식, 아일린은 기여한 적도 관련된 바도 없는 지식이 되어 있다. 경찰이 "누구든 손닿는 대로 체포하고 있었다"는 건 아일린의 동료들 이야기였다. 퍼지고 있던 소문, 벨트에 폭탄을 술 장식처럼 매달고 라운지를 성큼성큼 걸어다니던 러시아인 스파이・・・ 모두 아일린이 조지에게 말해 준 것들이다. 아일린 자신도 ‘내 아내‘로 일반화되어 있다. 아일린의 모든 정체성과 행동과 지식이 멋대로 조지의 것이 되어 있다. - P270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언어를 아일린은 사실상 찾아낼 수가 없다. 아일린은 조지의 원고 페이지들을, 여백에 온통 휘갈겨진 자신의 글씨들을 노려본다. 아일린은 누구에게도 보이지않을 방식을 통해서만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마치 발판이나 뼈대처럼, 최종 결과에서는 사라지거나 가려져 버리는 무언가처럼. 아일린이 생각하기에 자기말소 성향이란 오직 그것을지닌 사람이 여전히 존재할 때만 효과가 있다. 자신이 한 역할이 보잘것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거기에 오히려 주의를 집중시키는 교묘한 방법으로서만 자기말소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리 없는데, 그런데, 여기 그것이 있다.
아일린은 유리 재떨이에 가느다란 담배를 내려놓는다. 누군가가 여기, 타자로 치고 있는 행간에서 날 발견할 일이 있기는 할까. - P271

그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남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다. 리디아는 자신이 오웰을 거절하면 ‘내숭을 떤다‘는 모욕을 듣게 될 거라고 예상한다. 리디아가 ‘그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그건 곧 유머 감각이 없다는 뜻이 될 터였다. 리디아는 명확히 말로표현할 수 없는 상황 속에 갇혀버린다. 그 상황에서는 사랑하는 친구의 병든 남편과 키스하는 것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보다 어째선지더 쉬운 일이 되어버린다. 그 키스가 아일린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어쩌면 죽음을 부르는 키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다. 아일린이 스페인에서 언제든 죽을 수 있었던 조르주 코프에게 자신을 하나의 위안으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리디아는 자신을 오웰이 누려 마땅한 기쁨으로 여긴다.
키스는, 특히 첫 키스는 그저 키스만은 아니다. 그건 여성이 헤쳐 나가야 하는 하나의 상황이 된다.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내숭 떠는 여자 아니면 걸레, 혹은 유머감각 없는 년 아니면 공범이다. 그 둘을 나누는 경계선은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나아가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비좁은 공간이다. - P283

그 부부중 남편은 우리 아버지처럼 의학 교수였다. 그런데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에 그 교수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몸을 굽히더니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자신의 사타구니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무슨 말을, 농담 같은 걸 했을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이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다.
나중에 나는 그 일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머니도그곳에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가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는 걸 믿을수가 없다. 어딘가에 정신을 팔고 계셨던 걸까? 음식을 챙기느라고? 정신없이 날뛰는 개를 제지하느라고? 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꼭 자루에 든 버섯들을 만지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는 웃었다. 비유를 좋아하는 분이었으니까. 그리고 흔히들 말하듯, 그게 다였다.
나는 정신적 외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 상황은 너무도 공공연하게벌어졌기에 위협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가 받은 충격은 한남자가 자기 아내와 우리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우리 집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그래도 된다고 느꼈거나, 그래야 한다고느꼈거나, 어쩌면 둘 다였을지 모른다는 깨달음에서 왔다. 그리고그는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보이지않는 존재가 된다는 건 손끝에 버섯들이 와닿고, 귓가에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은 경험이다. - P288

변소 청소가 그 모든 일의 절정(혹은 밑바닥)이었다. 조지는몸이 좋지 않아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아일린의 머릿속에 깊이새겨진 한순간이 있다. 일을 반쯤 했을 때, 조지가 저 창문을 열고 아일린을 불렀다. 아일린은 조심스럽게 몸을 빼냈다. 변기위로 넘쳐흐른 짙은 색 배설물에서 부츠 신은 발을 꺼냈다. 소용돌이치는 그 오물은 너무도 역겨웠고, 악취에 속이 뒤집힐지경이었다. 아일린은 조지가 뭐라고 하는지 들으려고 창문 쪽으로 네 걸음을 떼었다. 그러고는 거기 서 있었다. 조지의 녹색낚시용 장화를 신고, 장갑 낀 두 손을 옆으로 벌리고, 온몸이 똥투성이가 된 채로,
"차 마실 시간이잖아요. 안 그래요?" 그때 조지는 그렇게 말했다. - P334

아일린의 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었다. 조지가 자신을 위해 차를 끓여주려고 그 말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들지 않았다.
아일린은 딸기가 든 그릇을 창문 아래 싱크대 한쪽에 내려놓는다. 유리병들을 찬물에 씻고 헹구기 시작한다. 팔뚝에 팔꿈치까지 소름이 돋는 순간, 아일린은 깨닫는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그것이 어떻게 느껴지게 될 지 이해하는 거라고 아일린은 언제나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일린은 경험 자체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경험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머리가 채 깨닫기도 전에 피를 얼려버릴 수 있다. 아일린은 그 경험의 세부사항이 그렇듯 끔찍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조지가다른 여자들과 섹스하기 위해 자신에게 ‘허락‘을 구할 거라고는 그에게 강력해진 기분을 선사하는 건 그 여자들과의 섹스일까? 아니면 아일린이 느끼는 모멸감이 그런 효과를 내는 걸까? 모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아일린이 겨우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일이 중요하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는 건 (아일린은 마지막으로 헹군 유리병을 마른행주 위다른 병들 옆에 놓는다) 결국 아일린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존재인 척하는 것이다. 아일린은 수도꼭지를 잠근다. 다정한 윌리엄이 필요하다. "흔들리는 마음의 균형을 바로잡는 워즈워스가. - P335

몽상가가 된다는 건 훗날의 작품이라는 꿈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예술가처럼 사고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자신이 남기고 갈 무언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닭들이 있고 폭탄이 터지지만 정해진목적은 없는 삶과는 달리, 이 꿈에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 오웰이 쓰는 모든 책은 불멸에 대한 착수금이 된다. 오웰은 유명한 작가가되겠다는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는 아일린이 필요하다. 인생이라는 끊임없이 흐르는 혼돈으로부터 원인과 결과를, 인물들과 그들의 운명을풀어내는 이야기꾼으로서 아일린이 지닌 재능이 필요하다. 삶을 변화시킬 수 없을 때는 아이러니로, 조각난 삶을 다시 한데 엮어내고싶을 때는 은유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아일린의 재능이 필요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일깨워줄 수 있는 로런스가 있었을 때, 아일린은 그런 재능 모두를 오웰에게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로런스가 사라졌다. 로런스의 죽음은 아일린에게서 삶에 대한 꿈을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다른 모든 꿈이 그렇듯, 그 꿈 역시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 어렵다. - P362

로런스가 세상을 떠난 뒤로, 아일린은 매일 아침 깨어날 때마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다시금 쓰러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오늘 아침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 내일은 다시 그럴 것 같지만, 오늘은 아니다. 지금, 오빠와 함께 사라져버렸던 아일린의 일부는 되돌아오는 중이다. 눈을 뜨는 순간 아주 짧은 찰나지만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안다. 오빠를 남겨두고떠나는 순간에는 새로운 슬픔이 가슴을 찔러온다.
아일린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모두가 누군가를 잃었고, 그 슬픔을 용감하게, 혹은 연극적으로 품고 살아간다. 대부분은 용감하게, 즉 드러내지 않은 채 품고 지낸다.
하지만 하혈과 어지러움, 복부의 통증과 온몸을 짓누르는 불쾌함을 숨기기는 더 어려워졌다. 한 달 전, 그웬은 아일린에게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단호히 말했다. 때로 아일린은 그저 침대시트 아래 놓인 하나의 곡선에 불과한 존재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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