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 P12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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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강 18


날벌레떼가 잔 날갯짓을 비벼대던 하늘이다
날벌레들은 닳아서 모두 떨어졌고 지금은 
별빛들이 잉잉거리고 있다

강 물줄기가 환하다 내 발등도 밝다

어느 날은 눈자위 꺼지고 귓속 깜깜한 저녁에

나는 걸어가며 몇 번이나 더듬대고 내 발걸음보다 더디게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서 물줄기보다 더딘 발걸음으로 어디까지 오래 걸었던가 내 발걸음보다 더딘 걸음으로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얼마나 길게 귀 기울여서 들었던가

자정에는 한 별자리가 내려와 등에 얹혔고

나는 내내 걸어서 강 물줄기를 뒤따라간다 물에 떠 흘러가는 별빛 몇이 깜박이며 뒤돌아보며 걱정스레 - P100

두런거리는 여러 말들을 고작 한두 마디도 못 알아듣는다

강 밑바닥에 별빛이 꽉 찼다 - P101

탐진강 19


읍에 가서, 예양리의, 가파르고 비좁고 이리저리굽은 골목길을 걸어 내려간다 길의 끝에는 강이다

모난 모퉁이에 부딪혀 나뒹굴고 굽은 굽이를 돌며 휘어지고 튀어나온 처맛날에 눈썰미가 잘리기도 하는 이 길을 누구의 한 生이라 이름 지어 부를 것인지, 염려한다

한때는 강을 끌어다가 내 가까이에 매어두었다 징검돌을 딛고 가며 물 위를 걷고 물길 저 너머로 조약돌을 팔매질하던, 그때는 강을 건너며 발을 적시지 않았다

지금은 강에 닿아 다만 강을 본다 먼 길을 흘러와 잠깐 닿은 강이 길을 내며 더 멀리 흘러가는 것 본다 강에 닿은 사람이 멈추지 못하고 걸어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 본다 - P102

발바닥 젖고 발목 잠기고 무릎 안에 고이고 가슴 가득 차오르고

강 건너에서 누구인가 오래전에 잊었던 내 이름을 부른다 강에 안개 짙다 - P103

백목련꽃


그걸 알아보라고 했다. 꽃이 피기는 필 것인지를, 꽃 피는 날은 날이 개이고 하늘이 훨씬 가까울 것인지를, 그런 하늘에서야 꼭 꽃이 피는지를,

장지에 눌린 창호지가 툭, 툭, 뚫리듯

머리 위 여기저기서 하늘이 뚫린다. 불쑥, 
불쑥, 꽃봉오리들이 목을 빼 들이민다. 가득하게 한 입씩 햇살을 베어 문다. 이를테면 지금 백목련꽃이 피었다. 하늘은 파랗고 저렇게 꽃이 희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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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안에


잘라낸 뒤엔 모체 가까운 곳에 두세요
고무나무의 삽수를 설명하는 전문가의 목소리가 밝다

물을 너무 자주 갈아주어도 안 됩니다
가지치기는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과정이에요

흠칫 놀라게 되는 말들이다
밝음을 신뢰하지만 밝기만 한 사람은 무섭다

난간에서 바닥으로
벽에서 창으로
주인은 나의 거처를 여러 번 옮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곁
홀로서기 좋은 위치를 궁리중이다

밤이 되면 독 안에 든 기분이 들 거야
그때까지 햇볕 이불을 충분히 덮어야 해

해결되지 않은 마음을 우후죽순 밀어올리는 계절,
봄이라 했다

태양과의 눈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여름  - P130

마른잎을 전리품처럼 매달았다, 가을
생장점이 닫히는 계절, 겨울
독 안에서
독 안에서

깨버리면 그만일 독이더라도
연두를 밀어올리려는 발걸음

당신은 나의 가지를 잘라 간다
무성하다는 뜻이다 - P131

굉장한 삶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왔는데
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

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또 늦은 건 나다
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

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
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
다 들킬 거면서
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
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
해서
오래 불을 바라보던 저녁이 있다

그 불이 장작만 태웠더라면 좋았을걸
바람이 불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솥이 끓고
솥이 끓고 - P144

세상 모든 펄펄의 리듬 앞에서
나는 자꾸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된다

신비로워, 딱따구리의 부리
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
잔물결이라는 말

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신기를 신비로 바꿔 말하는 연습을 하며 솥을 지킨다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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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


그는 다섯 개의 칼을 가졌다

나는 색이 곱고 결이 유순한 나무 도장을 하나 집어
그에게 건넨다

그는 먼저 구획을 나눈 뒤
칼을 골라 든다
이 자리에서 삼십 년을 했어요
요즘은 기계로 파는 데가 많지만 도장이라는 게 필시 칼맛이거든요
묻지 않은 말끝엔 잘 왔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나는 잘 왔다는 말을 생일 축하인 양 곱씹으며
가게 내부를 둘러본다
한쪽 벽면 가득 열쇠가 걸려 있고
한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침침해서
이름을 일으키려면 그의 이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안내삼아야 한다

그는 여러 번 칼을 바꿔 든다
곡선을 위한 칼과 직선을 위한 칼
도려내는 칼과 깎는 칼
시작하는 칼과 끝맺는 칼을 지나 - P110

서서히 떠오르는 이름을 보면서

당신도 나를 이렇게 만들었겠군요
저 먼 지평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것들을 열쇠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열쇠 이전의 열쇠들은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 열거나 잠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여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잠그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너무 오래 의자에 앉아 있어 의자가 되어버린 적막에게
잠시 속내를 털어놓는 동안

도장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울퉁불퉁하고 기계로 판 것만큼 정교하지 않다

값을 치르고 미닫이문을 끼익 연다
등뒤에 다섯 개의 칼, 골몰하던 뒤통수를 남겨두고

문턱을 넘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본다 - P111

칼과 열쇠가 한통속인 이유를
도처에 문이 있는 세계에
나를 외로이 남겨둔 이유를 묻고 싶었다 - P112

물색


그 집에선 낙엽 냄새가 났다

순간 위령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대신
단지 끝에 공원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던데 한번 가볼까. 말했다

그러나 그리로 가지는 않고

우리는 살 집을 찾으려는 거잖아
오전 열한시인데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웠어

살아 있는 집은 따로 있다는 듯이
말했다


*

그날은 도망치듯 낮잠을 잤다

수박 속살을 뭉개며 노는 아이들
팔뚝을 타고 흐르는 다홍빛 물

창을 열고 초를 켠다 - P116

집은 가진 것을 내보이는데
그럼 나는 무얼 내보이는 사람인가 
생각하면서


*

집을 본다. 이불을 깨지 않는 집
집을 본다. 파충류를 기르는 집

서향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어요 암막 커튼이 필요 없거든요
벽면 가득 곰팡이가 피었는데 두 사람이 살기엔 이만한 집이 없다고


*

경사로를 따라 굴러간 수박은
너무 커서 맨홀에 빠지지 않았다
결국 쪼개져 붉음을 들키고 만다


*

모든 절단면은 칼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 P117

집은 듣고 있었을까
유리컵에 실금이 가는 소리

모르고 물을 따라 마셨는데 목이 따끔하다
잔가시가 가득한 날들이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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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과 윤국에 대한 근심 걱정과 그리움 사이에 가끔 끼여드는 송영광을 향한 환국의 감정이다. 그것은 오랜 우정을 통하여 서로 알고 이해하는 데서 우러난 순수한 감정인 것이다. 물론 천성적으로 타고난 영광의 인간적 매력에 매료된 점도 있었지만 상처 받은 영혼의 신음, 깊은 곳에 묻어둔 통곡 같은 것, 외톨이의 애잔한 그림자를 끌고 가는 듯한 모습, 그것은 슬픈 것이었지만 환국에게는아름다운 것이기도 했다.
섬세하고 화사한 영광의 감수성을 사랑했으며 굽힐 줄 모르는 내면의 견고한 은빛 성(城)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특히 그림을 그릴 적에 환국은 영광을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어떠한 장점에도 백정이라는 신분의 꼬리표는 불어다녔다. 그 꼬리표는 그의 삶을 강인하게 지배하려 했고 그것에 불복하여 현실에서 유리, 방랑의 길을 택하였던 송영광. 환국은 길을 걷다가, 한밤중에도 가끔 그의 삶을 생각할 때가 있었다. 떠난 뒤에는 더욱 선명하게 그의 모든 것이 떠오르곤 했다.
‘영광의 어디가 어때서? 양현이 불행해질 것이라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째서 불행해지나. 왜 그런 말을 했지? 전염병 환자처럼,
양현으로부터 물러나라고, 그에게 상처를 주기론 나라고 예외는아니었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나를 용서했다.‘
환국은 그런 말을 혼자 중얼거릴 때 깊은 회한에 빠진다.
- P247

‘영원한 자유인 송영광, 세속적 욕망을 다 버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취했던 사내, 넌 백정의 그 시퍼런 칼날같이 절벽에 서 있었고방금 잡은 짐승의 피같이 신선(新鮮)했다. 상식에 찌든 내가 널 보고 무슨 말을 했지? 양현과 너를 저울대에 올려놓고 마치 인색한장사꾼처럼 저울질을 했다. 도대체 사람과 삶은 저울대에 올려놓을 수 있는 뭐 그런 거였나? 어쩌면 영광은 자신의 생애, 단 한번, 양현을 위하여 현실과 타협하려 했는지 모른다. 단 한번의 기회였는지 모른다. 그것을 박탈할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있었는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지나놓고 보면 양현이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주변 사정에 따라서 마음을 달리할 그런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양현이가 세속적 욕망이 강했다면 영광이를 단념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비밀을 묻어둔 채 우리를 기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흑 오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순전히 양현의 감정 문제였지 두 사람이 뭐 장래를 약속한사이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나도 안다."
"?"
"그애는 외로웠고 짝을 찾고 싶었을 거야."
이 경우 짝은 반드시 남자를, 결혼 상대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동류(同類)를 찾는다는 그런 뜻의 표현이다.
"네, 바로 그랬을 것입니다" - P248

찬하는 발길을 옮겼다. 명희는 말뚝같이 길 위에 서 있었다.
조찬하와 오가다는 환국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찬하가 급한 걸음으로 오가다를 따라잡았을 때 굳어버린 듯 오가다는 말이없었다. 뿐만 아니라 찬하를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귀었음에도, 옆에서 일의 전말은 알고 있었지만 찬하는 오가다에게 자기 마음 깊은 곳까지는 털어놓지 않았다. 그것은 굳이 비밀로 하려는 의도라기보다 찬하의 교양에 속하는 일인 듯싶었다. 보여지는 것을 감추려 하지는 않았으나 자기 감정에 대한 설명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가다는 가장 첨예하고 가장 절망적인 바닷가에서의 사건을 목격했으며 부서지고 깨어지는 찬하의 모습을 보았다. 한 사나이가 철저하게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오가다는 너무나잘 알고 있었다. 그때 찬하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얼마나 낭패를 했으면, 얼마나 자신이 처참했으면 인실과 오가다를 낯선항구에 내버려둔 채 말 한마디 없이 혼자 떠나지 않았던가. 그것은또한 오가다에게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꿈같이 인실과 맺어졌고아들 쇼지와 이어진 진하고도 끈끈한 인연의 줄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거대하고 은밀하며 기적과도 같은 우연, 만나는가 하면 헤어지고 아아, 인간들의 끝이 없는 드라마, 오가다는진정 그 찬란함에 눈부심을 느낀다.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간에 행복이든 불행이든 간에 삶은 찬란하고도 신비롭다. 그것은 어떠한 힘으로, 무엇에 의해 짜여졌더란 말인가.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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