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람들은 자국 문화의 우월함과 프랑스어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으므로 원문 충실성은 크게 신경을 안 쓰고 프랑스 미녀를 탄생시키는 데 집중했다. 그렇지만 독일 문학가들의 입장은 달랐다. 슐라이어마허는 「번역의 다른 방법에 대하여」(1813)에서 프랑스처럼 길들일 게 아니라 번역 과정에서 낯선 것들이 독일어에 들어오게 하여 독일어가 더욱 풍부해지게 하자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번역에 골몰하던 횔덜린도 "번역이 마치 체조처럼 독일어에 좋은 영향을 준다. 아름답고 위대한 외국어의 변덕에 억지로 적응하다 보면 아름답게 유연해진다"고 말한 바 있다. 횔덜린은 충실성을 극단으로 추구하다가 체조를 넘어 곡예에 이르렀는지 존경하는 실러에게 비웃음을 사고 말았으나. 이후 20세기에 "원문이 투명하게 비쳐 보이게"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 벤야민도 같은 입장이다. 벤야민은 시를 있는 그대로 번역해야 번역에 영향을받아 언어가 자란다고 하며 그 낯섦과 버석거림을 ‘산통(birthpangs)‘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주로 언어와 문학의 관점에서 낯설게 
하기의 장점과 효용을 역설했으나, 20세기 후반에 와서 번역 이론이 탈식민주의 연구와 결합하며 낯설게 하기는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얻게된다.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지금까지의 번역 연구가 서로 - P140

다른 언어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중대한 문제로 지적했다. 실제로 식민화 과정에서 번역이 지배자의 세계관이나 통치 체계를 강제하고 식민지의 언어와 문화를왜곡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역할을 했음에도 번역 연구는 그 점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식민 권력은 성경을 토착어로 번역해 서구의 종교와 세계관을 식민지인에게 전파하는 것에서 시작해, 지배자의 언어로 원주민의 설화와 역사 등을 번역해 원주민 문화를 연구하고 통제했다. 이렇게 언어적·문화적 침투가 이루어진 후에 실용적 · 통치적 필요에 따라 지배자의 언어를 강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식민지인들은 언어와 문화적 정체성을 잃고 자신을 드러낼 목소리를 잃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우리도 직접경험으로 아는 일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제가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여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를 파괴하는 잔인한 식민지 정책을 펼치면서 우리말도 커다란 위기를 겪었다. - P141

그러니 번역이란 순수하게 언어적이거나 문학적인 행위일 수 없고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사이의 불평등한 지위와 권력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화적·언어적 자신감이나 우월감의 유무에 따라, 바깥으로부터의 문화적 수혜를 바라는지 아니면 자국의 문화를 지키기를 바라는지에 따라 번역 태도는 달라진다.
이를테면 에드워드 피츠제럴드는 원문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생각 없이 낯선 것을 자기에게 맞게 바꾸어 흡수했다. 피츠제럴드는 오마르 하이얌의 시들을 가위로 오리고 풀로 붙이는 작업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친구에게 편지로 이렇게전했다. "이 페르시아인들을 마음껏 자유롭게 번역하는 것이즐거워. (내 생각에는) 페르시아인들은 대단한 시인이 아니라서 이렇게 거리낌 없이 일탈할 수 있어. 아무래도 예술적으로좀 만져줄 필요가 있으니까."(강조는 원문)  피츠제럴드의 자유로운 번역을 문화적 우월감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피츠제럴드에게는 오마르의 시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고 오마르를 ‘내 소유물(my property)‘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피츠제럴드가 남달리 오만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당시 일반전이 관념이 그랬다.  - P142

2016년 데버라 스미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TheVegetarian 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뒤에 번역 논쟁이뜨겁게 벌어졌다. 최근에 구체적인 사례를 두고 이만큼 열띤논쟁이 벌어진 일은 없었을 듯하다. 처음 수상 소식이 들려왔을 때 (한 시인의 노벨문학상 수상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한국인들은 한국문학의 위상을 높이는 쾌거라며 들떠서 축하하고 칭찬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인터넷에 The Vegetarian의 오역 의심 사례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번역 작품을 원본과 비교해본 국내 번역가들은 다들 나처럼 아연했을 듯싶다. 데버라스미스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로운 번역을 했던 것이다.  만약 국내 번역가가 외국의 유명한 작품을그렇게 번역했다면 곧 오역 논쟁에 휩싸였을 것이고 영원히 출판계에 발을 붙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 P145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논리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첫 번째논문에서 의미 충실성을 따지는 것이 국수적 민족주의라고 본것은 아무리 봐도 과잉 해석이다. 또 두 번째 논문에서 남성 인물이 더 가부장적일수록, 여성 인물이 더 독립적일수록 더 페미니스트적인 텍스트라는 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 아닌가? 아니, 아시아 여성의 텍스트에 페미니스트적 인식이 부족하다고보고 서구 독자의 수준에 맞추어서 관점을 강화하는 번역을했다면 그 자체가 문제적이지 않나? 데버라 스미스의 번역을옹호하려면, 원문 충실성보다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개별 문학작품으로서 이룬 성취에 초점을 맞춰야 할 텐데, 이 논문에서는 번역의 장점을 다시 원문과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 번역을 원문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스미스의 번역을 정당화하는 데 실패한다. 번역이 원문과 비교해서 ‘더 가부장적‘이고 ‘더 이기적‘이고 ‘더 독립적‘이 - P149

라고 주장한다면, 원문과 비교해서 덜한 것들도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조재룡은 같은 번역에 대한 비평에서 "단호하고 폭력적이고 단순한 남편은 […] [번역에서] 우유부단하고 고민에 휩싸인 남편이 된다"거나 "번역은 원문의 수동적인 아내에게 능동성을 부여하고, 원문의 폭력적인 남편에게는 인내심과 합리성을 선사한다고 평가하고, 이런 점을 번역이 "남성 중심주의 전반의 구조적 문제나 남성 편향적 가족 이데올로기의 폭력성, 직장의 위계와 권력의 횡포, 남성의 종속성과 비굴함 전반을 지워버리는 사례로 지적한다." 그렇다면 TheVegetarian은 채식주의자』에 비해 더 페미니스트적인가, 아닌가? 뭘 얻었고 뭘 잃었는지를 견주어서는 결론이 날 수가 없다. The Vegetarian 이 부정한 미녀로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원문에 대한 비교 우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작품 자체의 성취로 인정받아야 한다. - P150

영어권에서는 번역이 별로 필요 없는 반면, 그 밖의 다른 언어권에서는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려면 혹은 상을 받으려면 일단 영어로 번역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 의해서도 번역 관행의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미국 책을 들여올 때는 경쟁이 붙는 경우가 많고 한국 출판사는 을이된다. 원문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원저작권자에게 번역자 약력과 번역 샘플, 번역서 표지, 제목 등을 미리보여주고 허락을 받아야만 번역서를 출간할 수 있을 때도 있다. 반면 미국 출판사에서 한국 책을 수입할 때는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입맛에 맞게 바꿀 수도 있고 번역도자유롭게 할 수 있다.
또 얼마나 낯선가에 따라 길들이는 정도의 차이가 난다. 평균적인 한국 독자가 미국 문화에 친숙감을 느끼는 정도와 평균적인 미국 독자가 한국 문화에 친숙감을 느끼는 정도는 크게다르다. 거리가 있을수록 많이 길들이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심에서 변방으로 갈 때는 충실성을 지키며 번역할 수 있지만, 변방에서 중심으로 갈 때는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들어올 때까지 길들여야 하기도 한다. - P154

2020년에 김초엽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부터 나는 소설을 쓸 때 ‘그녀‘를 되도록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인칭대명사를 둘러싼 논쟁을 접하면서 예전처럼 아무 입장 없이 ‘그너‘를 쓰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김초엽 소설가가 고민하는 지점은 이런 것이다.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파생된 존재라는 것처럼 우리를 둘러싼 언어는 남성을 기본형으로 간주하고그것에 슬그머니 ‘여‘를 덧붙여 여성을 보편에서 배제한다. 물론 소설에서 흔히 쓰이는 ‘그‘와 ‘그녀‘도 그런 혐의에서 무결하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 들은 유명한 난센스 문제가 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 아버지는 즉사하고, 아들은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런데 호출을 받고 온 외과 의사가 아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난 이환자 수술 못 합니다. 이 애는 내 아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일어난 걸까? 출생의 비밀은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답이지만, 의사는 환자의 어머니였다. 요즘 사람들은 쉽게 답을 떠올리고왜 이게 난센스 문제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어릴 때는 의사는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고정관념의 허를 찌르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고정관념의 흔적이 ‘여의사, 여경, 여배우‘ 등에 남아 있다(‘남의사, 남경, 남배우‘가 얼마나 어색하게 들리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그녀‘를 유럽어에서 받아들여 쓰게 되었는 - P174

데, 이제는 서양에서도 남녀를 구분하는 대명사를 불편하게여긴다. 자신이 이분법적 성별 체계에 속하지 않는 논바이너리(non-binary)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면서 ‘he/she‘ 대신 ‘they‘를 삼인칭 복수 겸 단수 대명사로 쓰는 경향이 눈에 뜨인다. 경칭으로도 ‘Ms‘나 ‘Mr‘ 대신 ‘Mx‘를 붙이기도 한다.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친구에게 들었는데, 이렇게 논바이너리로 정체화한 학생을 임의로 ‘he/she‘로 지칭하면 차별이 될수 있어서 늘 신경 쓰고 조심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는 한국어에 성별 구분 대명사가 본디 없었고지금도 미미한 지위밖에 지니지 못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국어에 성별 표지가 없어서 번역을 거치며성별 정보가 지워지기도 하고 그게 손실로 느껴질 때가 없는건 아니다. 내가 리베카 솔닛의 [해방자 신데렐라]]를 번역할때도 손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다. 해방자 신데렐라는 리베카 솔닛이 전래 동화 [신데렐라]를 세심하게 다듬어 오늘날 시대감각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고쳐 쓴 그림책이다. 다시 쓴 이야기에도 신데렐라가 흘리고 간 구두를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왕자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장면이 있다. 이구두 주인이 여기 있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차례로 이렇게대답한다. - P175

나는 글에도 편하고 자연스러운 구어체를 쓰는 
편을 더 좋아해서 웬만하면 삼인칭대명사는 잘 넣지 않는다. 물론 삼인칭대명사 없이 번역하기가 불가능한 글도 있고, 삼인칭대명사든 뭐든 동원해서 문어적 느낌을 살려주어야 하는 글도 있으니 삼인칭대명사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 같은 것은 없다. 또 성별을 나타내는 삼인칭대명사를 쓰지 않음으로써 사라지는 정보가 있음도 생각해야 한다.
번역이 아무리 자연스럽고 편안한 한국어를 추구한다고할지라도 번역문에는 번역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그 흔적이 번역문의 미덕이 된다.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포개어지고 간섭이 일어날 때 아롱거리는 무늬가 언어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는다. 나는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을 흉내내려 하는데 번역가를 흉내 내어 글을 쓰는 사람도 있고, 이런교환과 충돌을 통해 언어의 가능성이 최대로 이끌어내어지기도 한다. 내가 쓰는 언어에도 지금까지 내가 읽고 번역한 무수한 글들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타자의 텍스트를 씹고 삼키고 흔적도 남지 않게흡수해버리는 번역도 있다. 다음 장에서는 길들이다 못해 잡아먹어버리는 식인주의 번역(Cannibalist Translation)을 다룬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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