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하나, 열린
오월 빛깔, 서늘한, 시간 이제는 부를 수 없는 것, 뜨겁게 입안에서 들린다.
다시금, 그 누구의 목소리도 없고,
아파오는 안구의 밑바닥. 눈꺼풀은 가로막지 않고, 속눈썹은 들어오는 것을 헤아리지 않는다.
눈물 반 방울, 한층 도수 높은 렌즈, 흔들리며, 너에게 모습들을 전해 준다.
눈 하나: Ein Auge. 첼란의 시에서 빈번히 나오는 고통의 심상이다. 외눈, 감기지 못한 눈, 뜬 채로 굳어진 눈, 생명의 물기를 잃어버린 눈, 본 것이 준고통이 각막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지층에 총총히 박혀 있는 눈등. 이 시는 「언어창살』에 수록되어 있다. - P17
꽃
돌. 내가 따라갔던 공중의 돌. 돌처럼 멀어 버린 너의 눈.
우리는 손이었다 어둠을 남김없이 퍼냈다. 찾았다 여름을 타고 올라온 단어. 꽃.
꽃ㅡ맹인의 단어. 너의 눈과 나의 눈이 물을 마련한다.
성장(成長). 마음의 벽이 한 꺼풀 한 꺼풀 떨어져 내린다.
이런 단어 하나 더, 그러면 종추(鐘錘)들이 트인 곳에서 흔들린다.
- P18
꽃: 경직된 이미지로 가득한 시집 『언어창살』에 수록된 시다. 서정시의 대표적인 대상, 혹은 시 자체의 은유로서의 꽃의 이미지는 시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굴곡을 겪어 왔지만, 이 시에서 그려지는 꽃은 시사(詩史)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경직된 의식에는 역사의 고통이 서려 있고("돌처럼 멀어 버린 너의 눈), 그 가운데서 인식된 사물은 활성화된 언어 (꽃=말)로 전이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눈물로 키운 꽃, 어렵게 찾은 소중한 언어, 허물어지는 마음의 벽,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의 꿈 역시 이 시에 담겨 있다. 종추들이 트인 곳에서 흔들린다: 얽매임 없이 울리는 여러 개의 종소리를 나타낸 표현이다. - P19
언어창살
창살 사이의 안구(眼球).
섬모충 눈꺼풀이 위로 노 저어 가 시선 하나를 틔워 준다.
유영하는 아이리스, 꿈 없이 우울하게, 심회색(心灰色) 하늘이 가깝구나.
갸름한 쇠 등잔 속, 비스듬히, 천천히 타는 희미한 관솔 등화(燈火). 빛 감각에서 너는 영혼을 알아본다.
(내가 너 같았으면. 네가 나 같았으면. 우리 한 무역풍 아래 서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낯선 이들인 우리.) - P20
타일들. 그 위에 바싹 붙어 있다. 두 개의 심회색 물줄기. 두 개의 입안 가득한 침묵.
언어창살: Sprachgitter. 원래 중세 수도원 면회실의 창살문을 가리키며 이것을 사이에 두고 수도 중인 사람과 외부 면회자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를 ‘언어창살‘로 직역한 것은, 그 창살문의 이미지가 여기서는 소통과 단절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는 언어와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가까우면서도("타일들. 그 위에 바싹 붙어 있다. 두 개의 / 심회색 물줄기.") 낯설고 단절된("두 개의 / 입안 가득한 침묵.") 인간관계가 현미경적 이미지들로 포착되어 있다. 이 시는 『언어창살』에 수록되어 있다.
아이리스: 무지개의 여신. 눈의 홍채를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안구의 홍채와 안구의 홍채 속을 헤엄치는 아이리스를 동시에 보여 준다. - P21
무덤 근처
남녘 만(灣)의 물은 아직 알고 있을까요, 어머니, 당신에게 상처를 남긴 파도를? 한가운데 물방아들이 있는 벌판은 알까요, 얼마나 나직하게 당신의 가슴이 당신의 천사들을 견뎠는지?
어떤 은(銀)포플러도 어떤 수양버들도, 이제는 당신의 근심을 거둬 가지 못하지요, 위안을 드리지 못하지요?
그런데 신은, 꽃봉오리 피어나는 지팡이를 짚고 언덕으로, 언덕 아래로, 가지 않나요?
그런데 견디시겠어요, 어머니, 아 언젠가, 집에서처럼, 이 나직한, 이 독일어의, 이 고통스러운 운(韻)을? - P22
독일어: 첼란은 복합적인 이유로 여러 언어를 뛰어나게 구사하였다. 그러나 극한의 체험(「죽음의 푸가」 해설 참조.) 이후 모든 사람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첼란은, 독일어로 시를 쓰기로 결심한다. 독일어는 그에게 오로지 고통만을 가져다준 나라의 언어, ‘살인자들의 언어‘였지만, 동시에 모국어(‘어머니의 말(Muttersprache)‘)이자 무엇보다 비명에 간 어머니와 어린시절 함께 즐겁게 읽었던 문학의 언어였던 것이다. 첼란의 어머니의 사망시기나 장소는 불명이지만, 유대인들이 송치되었던 흑해변 드네프르 강 연안(‘남녘 만‘)으로 추정된다. 이 시는 첼란이 한정판으로 냈다가 회수한 첫시집 『유골 항아리에서 나온 모래』에 수록되어 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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