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1918년 충청북도 보은 출생.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 정지용으로부터 시를 배울1933년 조선문학』에 시 「목욕간」을 발표함으로써 작품 활동 시작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지산(智山)중학교에 전입. 1936년 지산중학교 수료. 「낭만』,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가. 1937년 명(明)대학 전문부에 입학.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 제1시집 『성벽』(풍림사) 발간.. 1938년 명치대학 전문부를 중퇴하고 귀국. 1939년 제2시집 「헌사』 (남서방) 발간. 1945년 해방 후 시작(詩作) 재개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 「예세닌 시집』 (동향사)번역 출간. 제4시집 「병든 서울』 (정음사) 발간. 1947년 제3시집 『나 사는 곳』(헌문사) 발간. 월북. 1948년 산문집 『남조선의 문학예술』 발간. 병 치료차 모스크바로 감. 1949년 모스크바를 떠나 귀국함. 1950년 소련 기행 시집 「붉은 기』 발간. 1951년 지병인 신장병으로 사망. - P-1
황혼(黃昏)
직업소개에는 실업자들이 일터와 같이 출근하였다. 아무 일도 안 하면 일할 때보다는 야위어진다. 검푸른 황혼은 언덕 알로 깔리어오고 가로수와 절망과 같은 나의 긴 그림자는 군집(群集)의 대하(大河)에 짓밟히었다.
바보와 같이 거무러지는 하늘을 보며 나는 나의 키보다 얕은 가로수에 기대어 섰다. 병든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 근육이 풀릴 때 향수는 실마리처럼 풀려나온다. 나는 젊음의 자랑과 희망을, 나의 무거운 절망의 그림자와 함께, 뭇사람의 웃음과 발길에 채이고 밟히며 스미어오는 황혼에 맡겨버린다.
제 집을 향하는 많은 군중들은 시끄러이 떠들며, 부산히 어둠 속으로 흩어져버리고, 나는 공복의 가는 눈을 떠, 희미한 노등(路燈)을 본다. 띄엄띄엄 서 있는 포도위에 잎새 없는 가로수도 나와 같이 공허하고나.
고향이여! 황혼의 저자에서 나는 아리따운 너의 기억을 찾아 나의 마 - P22
음을 전서구(傳書鳩)와 같이 날려보낸다. 정든 고샅. 썩은 울타리. 늙은 아베의 하얀 상투에는 몇 나절의 때묻은 회상이 맺혀 있는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여! 병든 학이었다. 너는 날마다 야위어가는......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 일 잘하는 기계는 나날이 늘어나 가고, 나는 병든 사나이. 야윈 손을 들어 오랫동안 타태(惰怠)와, 무기력을 극진히 어루만졌다.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보이지 않는 황혼 속에서, 나는 힘없는 분노와 절망을 묻어버린다. - P23
화원(花園)
꽃밭은 번창하였다. 날로 날로 거미집들은 술막처럼 번지었다. 꽃밭을 허황하게 만드는 문명. 거미줄을 새어나가는 향그러운 바람결. 바람결은머리카락처럼 간지러워∙∙∙∙∙∙ 부끄럼을 갓 배운 시악시는 젖통이가 능금처럼 익는다. 줄기째 긁어먹는 뭉툭한 버러지. 유행치마 가음처럼 어른거리는 나비 나래. 가벼이 꽃포기 속에 묻히는 참벌이. 참벌이들. 닝닝거리는 울음. 꽃밭에서는 끊일 사이 없는 교통사고가 생기어났다. - P34
북방(北方)의 길
눈 덮인 철로는 더욱이 싸늘하였다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서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 힘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 북으로 간다고 어린애는 운다 철마구리 울듯 차창이 고향을 지워버린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친다 - P68
불길한 노래
나요 오장환이요. 나의 곁을 스치는 것은, 그대가 아니요. 검은 먹구렁이요 당신이요. 외양조차 날 닮았다면 얼마나 기쁘고 또한 신용하리요. 이야기를 들려요. 이야길 들려요 비명조차 숨기는 이는 그대요 그대의 동족뿐이요. 그대의 피는 거떻다지요 붉지를 않고 거멓다지요. 음부 마리아 모양, 집시의 계집애 모양,
당신이요 충충한 아구리에 까만 열매를 물고 이브의 뒤를 따른 것은 그대 사탄이요 차디찬 몸으로 친친이 날 감아주시요. 나요 카인의 말예(末裔)요 병든 시인이요. 벌(罰)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능금을 따먹고 날 낳았소.
기생충이요. 추억이요. 독한 버섯들이요. 다릿한 꿈이요. 번뇌요. 아름다운 뉘우침이요. 손발조차 가는 몸에 숨기고, 내 뒤를 쫓는 것은 그대 아니요 두엄자리에 반사(半死)한 점성사(占星師), 나의 예감이요. 당신이요. - P76
견딜 수 없는 것은 낼룽대는 혓바닥이요. 서릿발 같은 면도날이요. 괴로움이요. 괴로움이요. 피 흐르는 시인에게 이지(理智)의 프리즘은 현기로웁소 어른거리는 무지개 속에, 손꾸락을 보시요 주먹을 보시요. 남빛이요 ㅡ빨갱이요. 잿빛이요. 잿빛이요. 빨갱이요. - P77
초봄의 노래
내가 부르는 노래 어데선가 그대도 듣는다면은 나와 함께 노래하리라. "아 우리는 얼마나 기다렸는가......" 하고
유리창 밖으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한겨울 나는 아무 데도 못 가고 부질없는 노래만 불러왔구나.
그리움도 맛없어라 사무침도 더디어라
언제인가 언제인가 안타까운 기약조차 버리고 - P85
한동안 쉴 수 있는 사랑마저 미루고 저마다 어둠 속에 앞서던 사람
이제 와선 함께 간다. 함께 간다. 어디선가 그대가 헤매인대도 그 길은 나도 헤매이는 길
내가 부르는 노래 어데선가 그대가 듣는다면은 나와 함께 노래하리라. "아 우리는 얼마나 기다렸는가......" 하고 - P86
붉은 산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이따금 솔나무숲이 있으나 그것은 내 나이같이 어리고나.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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