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서리
깊은 산골짜구니에 숯 굽는 연기, 구름과 함께 사라지다 구름과 함께
얕은 집 울안에 장대를 들어 과일 따는 어린애 날마다 사다리 놓고 지붕 위에 올라가더니
홍시 찍어먹는 가마귀, 검은 가마귀 가 소년을 부른다. 무서리 내린 지붕 위에 멀고 먼 하늘이 있다 구름이 있다. - P192
여정 (旅程)
또 한 번 멀리 떠나자. 거기 항구와 파도가 이는 곳, 오후만 되면 회사나 관청에서 물밀듯 나오는 사람 나도 그 틈에 끼어 천천히 담배를 물고 뒷골목에 빠끔빠끔 내다보는 소매치기, 행려병자, 어린 거지를 다려다보며 다만 떠내려가는 널판쪽 모양 몸을 맡기자.
거기, 날마다 드나드는 이국선과 해관(海關)의 창고가 있는 곳 나도 낯설은 거리에 서서 항구와 물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회사원이나 관청 사람과 같이 우정 그네들을 따라가 보자. 그러면, 항상 기계와 같이 돌아가는 계절 가운데 우수가 지나고 경칩이 지나 - P193
고향에서는 눈 속에 파묻힌 보리 이랑이 물결치듯 소곤대며 머리를들고 강기슭 두터운 얼음장이 터지는 소리, 이때의 나는 무엇이 제일 그리울 거냐.
찾아온 발길이 아주 맥히는 바닷가에서 그때, 나의 떠나온 도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신개지(新開地) 비인 터전에 새로이 포장 치는 곡예단의 쇠망치 소리. 내가 무에라 흐렁흐렁 울어야는지, 우두머니 그저 우두머니 밤과 낮, 둘밖에 없는 세상에 어째서 나 홀로 집을 버렸나. 집을 버렸나. - P194
연화시편(蓮花詩篇)
곡식이 익는다. 풀섶에 벌레가 운다. 이런 때 연잎은 지는 것이다. 차고 쓸쓸한 꽃잎 하나 줄기에 붙이지 않고 연잎은 지는 것이다. 일년 가야 쇠동 맑은 적 없는 시꺼먼 시궁창 속에 거북은 보는 게었다. 봄철 갈라지는 얼음장, 여름 찾아 점벙대던 개구리 새끼. 모든 것이 침전하였다. 모든 게 오직 까라앉을 뿐이었었다. 연잎이 시들면, 연잎이 시들면, 심심한 수면 위에 또 한 해의 향기는 스미어들고
물속에 차차로 가라앉는 오리털, 이 속에 손님이 오는 것이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무런 기맥도 없이 밤이슬은 내리어 서리가 된다. 소 몰고 돌아가는 저녁길, 저녁길의 논두렁 위에 푸뜩푸뜩 풍장치며 흩어지는 농사꾼. 오곡이 익은 게었다. 곡식이 익은 게었다.
웅덩이에는 낙엽이 한 겹 물 위에 쌓이더니 밤마다 풀섶에는 가을벌레가 울고, 낙엽이 다시 모조리 가라앉는 날, 죄그만 어족들은 보드라운 - P195
진흙 속에 연뿌리 울타리 하여 길고 긴 겨울잠으로 빠지는 것이었었다. 한때는 그 넓은 이파리에 함촉 이슬을 받들었을 연잎조차 잠자는 미꾸리와 거머리의 등을 덮는 것이나, 두 눈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기인 거북이의 등 위엔, 거북이의 하늘 위엔 살얼음이 가고 그것이 차차로 두꺼워질 뿐. 까만 머리 따 늘이는 밤하늘에도 총총하던 별 한 송이, 별 한 송이 비최지 않고 희부연 얼음장에는 붉은 물 든 감잎이 끼어 있을 뿐. 한겨울은 다시 얼어붙은 웅덩이에 눈싸리를 쌓아 얹으나 어둠 속에 가라앉은 거북이는, 목을 늘여, 구정물 마시며, 반년 동안 밤이 이읏는 아라사의 옥창(獄窓)과 같이, 맛없는 울음에 오! 맛없는 울음에 보드라운 회한의 진흙구덩이 깊이 헤치며 뜯어먹는 미꾸리와 거머리. 두꺼운 얼음장 밖으로 연이어 연이어 깜깜한 어둠이 흐른다 해도, 구름 속에 상현달이 오른다 해도 거북이의 이고 있는 하늘엔 희부연 얼음장이 깔려 있을 뿐, 한 사리 싸락눈이 쌓여 있을 뿐. - P196
귀촉도(歸蜀途) 정주(廷柱)에 주는 시
파촉(巴蜀)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리. 뜸부기 울음 우는 논두렁의 어둔 밤에서 길라래비 날려보는 외방 젊은이, 가슴에 깃든 꿈은 나래 접고 기다리는가.
흙먼지 자욱히 이는 장거리에 허리끈 끄르고, 대님 끄르고, 끝끝내 옷고름 떼고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혼자 앉아서 창 너머 뜨는 달, 상현달 바라다보면 물결은 이랑 이랑 먼 바다의 향기를 품고, 파촉의 인주빛 노을은, 차차로, 더워지는 눈시울 안에ㅡ
풀섶마다 소해자(小孩子)의 관들이 널려 있는 뙤의 땅에는, 너를 기다리는 일금 칠십원야의 샐러리와 죄그만 STOOL이 하나 집을 떠나고, 권속마저 뿌리이치고, 장안 술 하룻밤에 마시려 해도 - P197
그거사 안 되지라요 그거사 안 되지라요
파촉으로 가는 길은 서역 하늘 밑. 둘러보는 네 웃음은 용천병의 꽃 피는 울음 굳이 서서 웃는 검은 하늘에 상기도 날지 않는 너의 꿈은 새벽별 모양, 아 새벽별 모양, 빤작일 수 있는 것일까. - P1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