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날 좋다 햇빛 알갱이 다 보이네
하늘에서 해가 내려 알을 슬어놓은 듯
볕 바랜 이불호청해 냄새 난다
꺄르르 가시나들 웃음소리에
울밑에 봉선화도 발돋움하겠네

희망공부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희망공부‘라는 제목과 노랫말의 첫행은 백낙청 선생의 글에서 따왔고, ‘희망함이 적다‘는 표현은 전태일 열사의 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 여자


돈도
남편도 없지
자식만 둘 있는

가진 게 너무나 많은
그 여자

슬픔 때문에
허리띠가 남아도는




*어느 젊은 시인의 시에서 보았다는, 이진명 시인의 시구를 다시 인용함.

허수아비


참새가 참새인 것은
제가 참새인 줄 모르기 때문

허수아비가 허수아비인 것은
제 머리에 새가 앉아도 가만 있기 때문

허수아비 주인이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것은
허수아비가 참새를 쫓아줄 거라 믿기 때문

이 땅의 농부가 농부인 것은
그런 줄 알면서도 벼 익는 들판에 허수아비를 세우고
우여어 우여어 허공에 헛손질하기 때문

태백산행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홀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이 좋은 봄날에


봄이 오면 대지가 입덧을 한다고
어떤 시인은 노래하는데
이 좋은 봄날에
미국이 기어이 전쟁을 하려나봐요
바그다드에서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려와요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지요
다리 다친 봄의 신음소리에
우리나라 산수유나무 새싹도 망가지겠어요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태백 하늘에 떠도는 눈발처럼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사북 지나 고한 장성광업소
철암역두 선탄장(選炭場)
석탄더미에 내리는 눈발처럼
차라리 탄압이나 받았으면
어느 시인 말마따나
바람부리에 몰려다니는 눈발처럼
반짝이며 글썽이는 눈발처럼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제가 울고 싶으니까 나더러
웃어봐!

새로운 세기의 노래


지나간 세기의 끝은 2000년
이제 새로운 시대로 들어섰지요
수수만년 쌓아올린 인류의 꿈은
지금 어느 별에 닿았는가요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그리며
땀 흘려 일하고
시인들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사랑노래 하는데
새로운 세기가 밝아오는 대지 위에
야만의 그림자가 서성이고 있네요
지나간 세기의 끝은 2000년
이제 세상도 새롭게 바뀌어야지요

시인의 말


세상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
누구의 말이던가. 문득 이 말이 떠오른다.
나는 병이 없는데도 앓는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세상이 병들지 않았다면 내가 혼자 아픈 것이다.
스스로 세상 밖에 나앉았다고 생각했으나진실로 세상일을 잊은 적이 없다.
세상을 잊다니! 세상이 먼저 나를 잊겠지.
일탈을 꿈꾸지만 나는 늘 제자리걸음이다.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는 이 막막함이란 ‘거울나라의 엘리스‘만 겪는 고통이 아닐 것이다.
2008년 여름 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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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ㅡ장엄한 일이었다ㅡ말했다
만일 신이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면ㅡ 하얗게ㅡ되는ㅡ 여자가ㅡ
그녀의 흠 잡을 데 없는 신비를ㅡ입는다는 것이ㅡ

성스러운 일ㅡ한 인생을
자줏빛 샘에 빠뜨리는 것은ㅡ
다림추도 없이ㅡ그것은 돌려준다ㅡ
영원을ㅡ 내가 숙고할 때까지ㅡ

축복이 어떤 모습일까ㅡ
그것은 자만심을 가질까?ㅡ
안개 속에서ㅡ떠다니는 것으로ㅡ 보이는
그것을 내가 손으로 잡았을 때ㅡ

그리고 그때ㅡ 이 ‘작은‘ 삶의 크기는ㅡ
현자들은ㅡ 그것을 작다고 말하지만ㅡ나의 조끼 속에서ㅡ 수평선처럼ㅡ 부풀어올랐다ㅡ
나는 조롱했다ㅡ가만히ㅡ ‘작다고!‘
[J271편] - P1036

오늘날 애머스트역사학회는 디킨슨이 입었던 드레스(또는 적어도 ‘눈으로 만든 옷‘ 중 하나)를 보관용 비닐 자루에 담아 그녀의 집 벽장에 걸어두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녀의 자의식을 의식하며 옷이 작으리라고 기대하겠지만, 아름답게 주름잡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옷은 기대보다 크다. 그리하여 그 드레스는 디킨슨의 집을 방문하는 학자들에게 그녀의 핵심적 은유에 담긴 지속적인 수수께끼를 상기시킨다. 반면 좀 더 실용적인 방문객들은 그런 옷을 같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숨을 멈출 정도로 놀라며 경외심을 드러낸다.
이 옷의 흰색은 실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정확하게 무엇을 보여주는 걸까? 흰 드레스는 지적인 여자로 하여금 실용적인 차원의 어떤 어려움도 견디도록 어떤 보답을 주는 건가? 윌리엄셔우드는 흰 물건에 대한 디킨슨의 강박증을 멜빌의 강박증과 비교하면서, ‘그녀는 기독교적 수수께끼가 아니라 기독교적 신비를, [...] 소생을 수반하는 세속적 죽음의 역설을 [...] 알리겠다는 결심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 P1037

누군가가 법으로
나의 재산을 빼앗는다면
그 법령은 나의 박식한 친구이리라
그러나 불법에 대한 어떤 보상도 없네
여기에서도 그곳에서도
그러하니 공평치 않아라ㅡ
시간과 정신의 절도
낮의 골수의 절도
거미에 의한,
아니면 그것을 금지시키소서 주여
내가 명세서에 기입하는 것을.
[J1167편]


죽음을 향한 ‘미끄러짐‘처럼, ‘충돌의 법칙‘인 ‘파멸‘처럼, 디킨슨의 거미는 여기에서 자연의 과정, 또는 인간의 법령이 저항할 수 없는 법칙을 나타낸다. 게다가 거미는 ‘흰옷을 입은 여자‘의 삶에 난 틈새의 거주자로서 ‘운명의 총아였던 괴물 같은아이/분신과 유사하다. 동시에 거미들은 특히 여성의 운명 (처녀의 순백이 강요하는 대가인 불임의 운명)의 전령들이다. - P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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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속에서


빛 안에 어둠이 있었네
불을 끄자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냈네
집은 조용했고
바람이 불었으며
세상 밖에 나앉아나는 쓸쓸했네

흔적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그림자만 남아 있다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2년인데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이 보낸
체납주민세 납부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곡동 어디 자식들 몰래 살아 계신가 싶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가을날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달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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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낸 이후 십삼 년이 지났다.
힘겹게 다시 한 권의 시집을 묶으며 무언가 한마디 없을수 없겠는데, 의외로 담담해진다. 문득 밤낚시를 드리우던 기억이 난다. 가슴이 철렁하도록 찌가 한 번 솟구쳐오르기를 기다리다가 날이 샜다. 생각하건대 내가 시를 써온 일이 이와 같았다. 작은 움직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고 그것이 커다란 감동으로 다시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욕심이었다. 80년대의 처음부터 너무 큰 충격을 받아왔던 탓일까.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고, 감각의 촉수는 그만큼 무뎌져 있었다. 살아오면서 모서리가닳고 뻔뻔스러워진 탓도 없지 않으리라. 입술을 깨물면서나는 다시 시의 날을 버린다. 일상을 그냥 일상으로 치부해버리는 한 거기에 시는 없다. 일상 속에서 심상치 않은인생의 기미를 발견해내는 일이야말로 지금 나에게 맡겨진 몫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외친다. 나의목소리가 귓전을 때리지 않고 당신들의 당신들의 당신들의 가슴을 울리기를 기대하면서.

1991년 3월정희성

그리움 가는 길 어디메쯤


오월 어느날 그 길가
설운 세상 살던 사람 쓰러져
아지랑이 펴오르고
이상도 해라
웬일로 눈시울 붉은
꽃잎 하나 지고 있다
나의 사람아
그리움 가는 길 어디메쯤
더러는 피어 있는
진달래도 있어
피맺힌 너의 넋을 만나도 보리

4월 북한산에 올라


지나간 사월을 그리워 말자
사월이 가면 오월이 오는 법
황사 휘몰아치는 산정에 서서
보라, 때가 되면 모진 바람 속에서도
진달래 흐드러져 피지 않더냐
사일구는 사월에 오지 않아도
이 땅의 오월에 다시 찾아오고
눈물 어룽진 남녘 땅에
봄이 오는 소리 들리지 않더냐
그러나 이제는 냉정해지자
피 흘려 쓰러진 벗들 앞에서
속절없는 다짐을 하지는 말아야지
흙바람을 맞으며
아아 성난 불의 마음으로
가슴 깊이 응어리진 얼음의 마음으로
사월은 사월에 오지 않아도
한겨울 눈 속에 꽃맹아리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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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청 명


황하도 맑아진다는 청명날
강머리에 나가 술을 마신다
봄도 오면 무엇하리
온 나라 저무느니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
머리칼 날려 강변에 서면
저물어 깊어가는 강물 위엔
아련하여라 술취한 눈에도
물 머금어 일렁이는 불빛

우리들의 그리움은


우리들의 믿음은
전쟁이 지나간 수수밭
죽은 내 형제의 머리맡에
미군이 벗어놓은
군화 속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소망은
끝끝내 결재되지 않을
보수정당의 서류함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기도와
못다 한 노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울음은
이 봄에 생생하게 피어날
보리밭에 있고

시퍼렇게 시퍼렇게
물어뜯긴 선창과
파리하게 떨고 있는 공장의
캄캄한 불빛 속에 있어

우리들의 사랑은 다시금
순환하는 계절의 저 눈밭에
봄이 와서 붉게 피어날 진달래와
참호 속에 얼어붙은 젊은 기침과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 싹터

그리움은 이다지도
시퍼렇게 멍든 풀잎으로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수런대는가

오오 민주주의여

용산시장에서
어느 여성근로자의 일기


공장은 문을 닫았다
가진 것이라곤 노동밖에 없는 우리
꼬쟁이의 모가지는 열두 개
상처마다 옹근 매듭 아리고 쓰리어라
눈물 고인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모두들 열심히 살아가자며
용산시장 골목길을 빠져나가네
어디서들 이렇게 흘러왔는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등을 떠밀고
떠밀리며 듣는 저 아우성과
발끝마다 질척이는 비릿한 냄새
철교 위를 지나는 기차소리는
멀고 먼 고향길을 달려가는가
용산시장의 공기는 끈끈하여
차마 우리의 발길을 붙드는구나
노동밖에는 팔 것이 없는 우리
꼬쟁이의 모가지는 열두 개

저마다 자기들의 상품을 놓고
내일을 향해 외쳐대는 아우성이
어쩌면 재미있는 노래일 수 있으련만
삶이란 역시 힘겨운 것일까
노동판에서 돌아와 지게를 받치고
국수그릇 앞에 쭈그려 앉은
저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이제
어디다 대고 무릎을 꿇어야 하나
처음엔 쳐다보기도 싫던 그 모습
어느덧 아버지의 얼굴로 떠오르며
모두들 그렇게 꺾여서는 안되느니
힘을 합쳐 열심히들 살아가라고
당부하면서 눈물 속에 흐려지면서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붉은 꽃


어디쯤일까 어디쯤일까
그리움 가는 길에 발돋움하고
누구를 향한 마음에
이렇게 몸부림쳐 붉은 꽃일까
먼발치로 사라지는 세월을 두고
한세상 마당귀에 불을 지르네

눈 덮인 산길에서


눈이 내리네
바람 맞서 울고 섰는 나무들이
눈에 덮이네
그대와 걷던 산길
북한산 기슭의 그 외딴 숫막
함께 앉던 그 자리에도
눈이 내려 쌓이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와도
굳은 맹세 변함 없건만
괴로워라 지금 여기 없는 그대를 위해
나는 술잔을 채울 뿐
눈이 오는 날은
울고 싶어라
그러나 기약한 그날은 갑자기
눈처럼 오는 법이 없기에
빛나는 아침을 위해
나는 녹슨 칼날을 닦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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