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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오랫동안 사귀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있다. 이십대 후반에 만나 삼십대 중반까지 함께 했으니 서로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이다.
연애란 게 잘 사랑하는 것보다 잘 헤어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란 말이 맞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 오랜 연애가 나쁜 사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도 가끔씩 만나서 일상의 안부를 묻고, 삶의 철학을 나누고, 힘든 인생을 위로해 주는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 무덥던 열대야의 하루, 이 친구를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가운데 헤어진 다음에도 이렇게 만나는 게 혹시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만에 하나 내가 상대가 원하지 않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았다. 느닷없이 왜 그런 질문을 하냐기에 사실대로 대답했다.
“며칠 전에 김형경이 쓴 ‘사람풍경’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 보니까 나처럼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실연 뒤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해서 상황을 부정하고 자기 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잖아. 그래서 혹시 내가 지금 그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나를 빤히 들여다보던 그 친구가 피식 웃으면 하는 말.
“야, 너 제발, 책 좀 고만 읽어라. 책이 멀쩡한 애 다 버려 놓는다.”
책 읽는 게 유일한 취미생활인 내게, 우리나라 국민들의 평균독서량을 깎아내리는 데 일조하는 내 친구가 건넨 충고치고는 너무도 멋진 우문현답이었다. 둘이서 한참을 깔깔대며 웃어대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친구가 덧붙였다.
“나는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내가 마음바탕이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근데 살면서 내 마음에 부옇게 먼지가 쌓여도 별로 닦을 생각도 않고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누가 밖에서 자꾸 창을 두드리잖아. 그래서 널 보기 위해서 자꾸 창을 닦게 되고 그러다 보니 내가 얼마나 맑은 창을 가진 사람인가 다시 알게 됐지. 너를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장담해. 너를 만나서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거든. 너는 내 안의 나를 다시 찾게 해 준 사람인데 그 관계가 연인이든, 친구든 상관없어. 지금도 늘 네게 진심으로 고마워.”
정말 내가 들은 그 어떤 사랑의 속삭임보다 충만하고 멋진 말이었다. 나를 더 사랑하게 되는 사랑...
“고맙다. 근데 너, 나 왜 찼냐?”
친구는 내 농담에 아무런 답 없이 웃었다. 나도 별다른 대답을 기대했던 게 아니어서 같이 웃고 말았다.
친구는 헤어질 때, 자기를 만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를 미워하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이 관계가 식상해진 것도 아니지만 자신과의 연애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나는 두 말 않고 동의해 주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대도 당연히 헤어져야하겠지만 자신을 더 사랑하려고 한다는데 붙들 까닭이 없지 않나.
친구의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안다. 지금도 자기를 제대로 사랑해보려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내 친구에게 그 날 가까운 서점으로 함께 가서 ‘사람풍경’을 사 주었다.
“나는 책 고만 좀 읽어야겠지만, 너는 이 책 꼭 좀 읽어야겠더라.”
자기 마음을 닦기 위해, 자기 인생에 정면으로 맞서 보기 위해, 그래서 다른 이를 더 잘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최고의 동반자가 될 자격이 있다 믿는다.
부디 내 사랑하는 친구가 자기 마음의 창을 닦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그래서 그 말간 마음 바깥에 아름다운 풍경들을 모두 사랑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뭉게구름 흘러가는 눈부신 하늘과, 바람에 몸 흔드는 나무들, 지저귀는 새들의 영롱한 노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다른 이들의 창문도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면, 거기다 내가 아니어도 혹 그의 창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어 그와 함께 길을 걷는 새로운 행복도 찾게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