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새벽, 술을 거나하게 한 잔 걸치고 포장마차를 나오다가 유달리 붉게 반짝이는 네온 십자가를 보았다. 심심해서 ‘별 헤는 밤’이 아니라 ‘빨간 십자가 헤아리는 밤’을 하고 있는데, 혀 꼬인 친구 녀석의 이야기.

 

 “내, 옛날에 교회에 다닌 적 있다. 두 달 동안.”

 “그래? 그래서?”

 “뭐가 그래서고. 그냥 십자가 보니까 생각나서 한 이야기지. 친구 따라 갔는데 글마(?) 지금도 열씨미(?) 다니지. 난 지금도 종교란 게 가끔 설득 안되면 지옥간다고 협박이나 해대는 웃기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근데 그 녀석이 힘든 일 이 있을 때마다 종교에 의지하는 걸 보니 부럽기도 하더라.”

 “끄윽(아스파라긴산과 알코올 냄새!) 그렇게 치면 종교란 게 없는 사람이 어디 있노? 우리 엄마만 하더라도 자식들이 종교였지.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와서 주 패고 그랄 때, 딱 죽고 싶어도 ‘자식들 땜에’ 그라잖아. 그게 종교지, 뭐.”

 “그렇네. 그러면 나한테는 종교가 술인가? 웃기네...... 옥아, 니는 뭐꼬?”

 “뭘 것 같노?”

 “아마...... 니 자신. 니 말하는 거 들어보면 거의 ‘나교주의 교주’ 아이가. 지 혼자 다 똑똑해뿌고. 키키키.”

 “내 종교가 ‘나’? 아니, 내 삶!”

 “니 삶? 그게 그거지.”

 “니는 그카이끼네 백 날 가도 똑똑하다 소리 한번 못 듣는다. 아나? ‘나’는  완결. 고정. 불변. 존재. 그런 이미지. 그냥 ‘나’지, 다른 어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나’. 그러나 ‘내 삶’은 정 반대지. 미완. 과정. 살아가는 관계. 다른 사람, 사물과의 관계가 없다면 내 삶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노? 내 삶을 이루는 것에 나는 없어. 정작 ‘나’는 다른 사람의 삶 속에만 살아 있지.”

 “이...씨... 하여튼간에 말도 안되는 거 끼아 맞추는데는 도산기라. 우기기는.”

 “말도 안되기는. 하나 더 얘기 하까? 니는 내 삶이란 종교의 기도방식이 뭔지 아나?”

 “...... 이노무 택시는 와 이래 안 오노?”

 “일.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기 위한 과정, 그게 ‘일’이다.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 돈이고, 보람이고.”

 “속 좋은 소리 하고 있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니 겉은 생각하면 욕 얻어 묵는다. 그냥 돈 벌어갖고 묵고 살 일자리라도 있으면 다행인 줄 알아야제. 남자들도 놀고 묵는 판에. 하이튼 그 놈에 ‘커리어 우먼’이라는 환상. 야,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니나 속 좋은 소리 하지 마라. 여자들은 집에서라도 죽어라고 인정도 안해 주는 일 해야지만, 남자들은 놀고 묵어도 혹시나 심기가 불편하실까 ‘기살리기 운동’이라도 하는 세상 아이가. 커리어 우먼? 웃기시네. 차 몰고 가다가도 ‘미친 년, 운전도 못 하민서 와 기 나오노. 집에서 솥뚜껑 운전이나 좀 더 하고 있지.’  따위 쌍소리를 골백번도 더 듣는 세상이 21세기 대한민국인데, 뭐? 그 안에서 일하는 여성이 꿈이라. 꿈은 꿈이지, 개꿈......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열 받았나? 미안하다. 근데 니 보면 거의 일에 목숨 걸었는 거 같다. 일이 그래 재미있나?”

 “니 예수쟁이 친구한테 물어봐라. 기도 그거 재미로 하는지. 하고 싶은 일은 재미있어도 하고 없어도 하고 억지로라도 하고. 세상에는 두 가지 일이 있지. 해야 되는 일 하고, 하고 싶은 일. 나는 이왕이면 하고 싶은 일 하고 살란다.”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은 일이 바로 하고 싶은 일의 다른 한 면 아이가. 그 정도 댓가도 없이 하고 싶은 일하고 살라캤디나? 남자들 대가리는 하여튼간에. 택시 왔다. 가자.”

 

나는 일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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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18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님, 이런 술친구(게다가 남자) 있어서 좋으시겠어요.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입니다. 재밌어 웃다가 잠시 '나'를 생각하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