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다. 해마다 새 다이어리를 장만하면 맨 앞 장에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그 편지의 말미에는 한 해 동안 잊지 말고 살아야 할 실천들을 적어둔다. 바쁘다는 핑계로 살면서 외면하기 쉬운 가치들은 나에게 계속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날마다 들고 다니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펼쳐보는 다이어리라, 그 편지는 의외로 큰 도움이 된다.
지난해 내가 나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니, 내가 가진 것들을 일깨우면서 감사하며 살라고 적어두고 있었다. 많이 지쳐있던 나를 위로해 주던 편지였다. 그리고 그 밑에는 ‘사유하기’라는 항목을 가장 앞에 써 두었다. “쉬지 말고 사유하자. 매순간 살아있음을 느끼자.”라는 말도 덧붙여서 그 실천이 지니는 가치도 확인시켜 주었다.
일 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글귀를 적을 때 내 마음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삶이란 살아있어도 살아있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한 해를 ‘허송세월’이란 놈에게 도둑질 당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보니, 그 글귀 덕에 ‘남들이 다 하니까’하는 일, ‘남들이 다 가지니까’ 가지는 관계. ‘남들이 다 추구하니까’ 추구하는 욕망 따위에 시간 뺏길 일이 없어 좋았다. 매 순간 내 사유의 결과로 얻은 일, 관계, 욕망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올 해는 무엇을 가장 중요한 다짐으로 정할까, 12월 시작할 때부터 고민했다. 한 달 내내 사유하다가 크리스마스 즈음에야 깨달음을 얻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국채보상공원 앞을 지나오다 보니 색색의 전등이 나무마다 불을 밝히고 있었다. 썰매를 끌고 가는 루돌프가 크리스마스 시즌임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내게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마음이 편치 않다. 나무의 생장을 방해하는 것도 안타깝고, 전기가 낭비되는 것도 언짢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 아닐 텐데, 왜 저런 관행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 저 화려한 색색의 불빛은 무슨 까닭으로 밝혀지고 있는 걸까?
“저런 것이라도 없으면 연말 분위기가 안 나잖아.”
같이 있던 친구가 내 쓸데없는 생각을 타박하고 나섰다.
연말 분위기라……. 그렇구나. 저 불빛이 연말의 분위기를 돋우어주기 위해 있는 거구나.
그런데 연말의 분위기라는 것의 정체는 결국 화려함과 흥성거림으로 치장된 자본과 도시의 욕망이 아닐까? 한 해를 돌아보기 위해 자기 속으로 빠져드는 명상 따위에 저 화려함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평소와 다른 들뜸과 흥성거림으로 더 많은 욕망을 소비하게끔 하기 위해, 저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불꽃을 보고 뛰어드는 나방처럼 인간들도 저 불빛을 보며 소비의 욕망에 홀려 들어가는 것이겠지.
그 순간, 자본과 도시가 강요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나로 살고 싶었다. 그 무엇에도 홀리지 않고 깨어있고 싶었다. 내 욕망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세상에서 그것들을 욕망하는 내가 과연 진짜 ‘나’일 수 있을까? '내가 욕망하는 현실'이 ‘욕망하고 있는 나’라는 실재가 아닌 세상, 섬뜩하다.
그 깨달음을 통해서 올 해 내 실천을 ‘깨어 있기’라고 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나는 올 한해, 깨어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온전한 나로 살고 싶다. 다이어리 앞에 ‘깨어있기’라고 적은 다음에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생각을 모아 본다. 눈을 뜨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자본이 강요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눈을 닫고 살아야겠다. 눈을 닫고 살다보면 내 중심과, 내 마음으로 난 길이 보이리라.
새해에는 내 마음속에 난 고즈넉한 길을 따라 걸으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