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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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것처럼 대중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말이 또 있을까?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든 한 마디씩 할 수 있지만 그것의 정체를 제대로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한 걸까?

살까 말까 망설인 책이었다. 광고의 내용으로 보아서 '삶과 죽음을 함께 한 위대한 사랑'으로 '죽음까지는 꿈도 못 꾸고 삶도 대충대충 가끔 함께 하는 것에 그치는 비루한 보통의 사랑'을 하고 있는 나같은 인간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글이 아닐까 싶어서.

그런데 왜 샀지?

아마 열렬한 애정고백을 하는 이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란 게 끌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작가가 노동 이론가이자 생태주의를 정립한 초기 이론가라는데 조금 홀렸을지도. 사실은, 20여 년간 아내를 간호하고 함께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 조금 혹했을지도...  

100쪽도 안 되는 얇은 책이었다.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읽고 나서 한 첫 마디.

"광고를 이렇게 밖에 못 하나?"

위대한 사랑 고백을 기대하고 읽는 사람들에게는 '뭔 소리 하는 건지...' 알아 듣기 힘든 책이 될 듯하다.

오히려 나처럼 늘 '사랑이 밥 먹여주냐?'라며 시니컬하게 지껄이는 인간들에게는 '넌 밥만 먹고 사냐?'는 의외의 조언이 기다리고 있다.

앙드레 고르가 젊은 날,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했듯이 나 역시 '사랑' 따위에 목숨 거는 이 세상을 경멸했다. 나조차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그 답을 찾아서 미친 듯이 사유의 숲을 헤매다녀도 답이 보이지 않는데, '당신'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누구지? 나의 실존과 당신의 실존이 만나는 지점, 그런 게 있기는 한가?

그러나 나 역시, 현실 속에서 사랑을 했고, 사랑하는 상대에게 극진하게 늘 최선을 다했고, 나와 '당신'의 실존이 불안한 만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더 진실했다.

그러나 말로는 늘, '영원한 사랑이 어디 있니?', '너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 따위 해 본 적 없어.'라고 '영원'을 향한 나의 기대와 '너만을 사랑하고 싶은'나의 감정을 외면했다.

그 기대와 감정을 내 지성과 이론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에야 알 수 있다.

나를 살아가게 해 준 힘이, 나의 그 잘난 지성과 이론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그 모든 현실의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앙드레 고르가 이 책에서 아내에게 하고 싶었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제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합니다.'가 아니었을까?

나도 더 늦기 전에 내 연인에게 고백하고 싶다.

"영원한 사랑 따위 믿지 않지만,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이 마음만은 진실입니다."

"당신만을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해도, 이 하루 하루를 사랑하다 보니, 어느새 생을 마감할 날이 다가와서 결과적으로 당신만을 사랑하게 됐다면 그도 참 행복한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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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2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전히 변함없는 사랑을 믿는답니다.
로맨티스트이지요. 하하


산딸나무 2008-01-28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글을 보면 그런 느낌이 묻어나지요^^

ghwngo 2008-01-29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나무 님의 글이 너무 재밌습니다.

산딸나무 2008-01-2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는 분이네요.
반갑습니다.
제가 아시는 분인 것 같은데 누구신지 좀 알려주세요.
궁금한 거 있으면 잠 못 자거든요^^

ghwngo 2008-01-30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책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들렀습니다. 들렀다가 산딸나무 님의 글에 푸욱 빠졌구요. ^^*
오늘밤은 푹 자실 수 있겠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산딸나무 2008-01-3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