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 누군가의 실체에 대해 혹은 그 실체를 대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떠올릴 수 있다면, 이 세상이 아닌 마음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 세상을 떠난 그녀를 한번도 본 적이 없더라도, 그녀의 글을 통해 그녀가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껴왔고, 여전히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비록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없지 않을까?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따금씩 그녀를 떠올리고, 그녀와 나눈 글을 생각하고, 그녀가 남긴 글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녀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 속에, 기억 속에서...
2.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것을 희망하는지도 모른다. 무한하지 않은 삶을 살더라도, 아주 오랜시간이 지나 자신의 유골조차 흔적 조차 없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주길, 그래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기를.. 영생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떤이는 업적이 연연하고, 명예와 권력을 갈망하고,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창작물에 열정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여 그 업적과 훌륭함을 인정 받은 사람만이 누군가의 하나의 '의미'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자신의 삶의 향기를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소시민적인 삶을 살고, 평범한 삶을 살아도,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노력하고,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가고, 이웃과 소통함으로써 자신이 실존함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군가에게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일상에서 생기는 모든 불안의 근원, 도취상태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것,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는 그 불안감의 정체가 '죽음'이라고 말했다. 인간에게 그 불안감은 숙명적이며,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고 주장하며, 그는 죽음의 불안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실존을 되찾는 길이라고 했다. 즉,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거나 그 불안에 허덕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앞질러 그 죽음을 떠안으면 '죽음의 불안'은 오히려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웃으로 그녀의 글을 엿보면서, '죽음의 불안'이 아닌,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를 보았다. 그래서 무례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마지막도 그렇게 자유로웠으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이와같은 생각을 하도록 한다는 것은 그녀의 삶, 그것의 의미를 증명하는 것이리라.
4.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나도 그에게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인간은 '나'와 '너'의 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인간은 현실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피상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를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은 '관계'로 이어지고, 그것은 가상공간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기억들이 결코 가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나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허락해주고, 슬픈 일이 있었을 때, 새해가 되었을 때, 먼저 와서 안부를 물어주던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더 좋은 세상에서, 더 건강한 모습이길....부디 편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