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상 겨레고전문학선집 1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 / 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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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열하를 무더운 여름밤에 걷넌다. 여행은 짐짓 큰 물을 만나기도 하고, 이색적인 것에 눈이 멀고, 낯선 일들과 밤에 술을 마시며 글을 나누고, 비를 맞으며 걷기도 한다. 그리고 자랑을 하다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황제를 만나지 못할까 초초해지도 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왜 이리 느긋한지 모르겠다. 나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열하를 따라간다. 

연암은 열하를 건너며, 과장이나 왜곡을 통한 형상의 이미지를 다듬지 않고 그가 본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다. 때론 낯선 풍경에 낯선 이름으로 답답하게 읽히는 부분이 있지만, 이는 그의 시절로 돌아가 보았을 때 비로소 이해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길 위에서 글을 적고, 그가 걸은 만큼 본 것을 적기에 사념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다. 무엇보다 낯선 풍경을 접하고, 혹시라도 뛰어넘을까 이렇게 하인에게 타이런다.

"다음부터는 무엇이든지 처음 보는 것이거든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 가릴 것 없이 지체말고 고해 바치렷다!(187쪽)

이렇게 호기심 많은 불혹의 어른이 쓴 일기는, 충실하다.

연암은 여행 중에 사효수라는 아홉살짜리 어린아이를 만난다. 그는 "더위도 곤하고 또 졸리기에 말에서 내려 좀 걷어서" 가다가 먼발치에서 오는 아이를 길을 막고 선다. 그러자 아이가 공손하게 인사를 하니 이름을 묻고, 무슨 책을 읽었는지 묻는다. 그는 갈길이 바빠 아이랑 많은 이야기를 건내지 못했지만, "길을 가면서도 사 소년의 얌전하게 생긴 모습과 동작이 생각에 떠오르면서 눈에 늘 삼삼했다"(262쪽)고 말한다. 이런 순수한 마음은, 어린이 같은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순수하면서도 때론 엉뚱하기도 하다. 7월 13일, 신민둔에 들러 글 자랑을 하려다 망신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나는 흔히 길가 점방 문 위에 써 붙여 놓은 '기상새설(欺霜賽雪)'이라고 쓴 넉 자 간판을 보고 내 속짐작으로 장사치들이 응당 지킬 본분을 자랑 삼아, 마음이 맑고 깨끗하기는 서릿발이나 다름없고 눈보다도 더 희다는 뜻으로 저런 간판을 걸었나 보다 생각했고,"(196쪽)

이리하여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는데, 전당포 주인이 고개를 쩔쩔 흔들면서 "당토 않은데!"라고 하자, 괘씸해하여 분을 삭히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날, 소흑산에 들러 글을 쓰는데, "조선의 명필이다"(208쪽)라는 소리에 표정이 바뀌어 허뭇해 한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점방에 걸어 둘 네 글자를 써 보겠다며 자청하여 예의 그 [기상새설]을 쓴다. 그러자 주인이 가만히 보고서는,

"우리 점방들은 단벌로 부인네들 머리꽂이만 사고 팔고 할 뿐이지. 가루 점방은 아닙니다."(212쪽)

'기상새설'은은 밀가루처럼 하얀 것을 판다는 의미인데, 그가 너무 앞서서 해석을 하고 쓴 것이다. 또한 옹졸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오늘 여바란 듯이 써 내려갔지만 집을 잘못 찾아 들어온 것이다. 어찌 불혹(不惑)을 넘긴 이가 글에 미혹됨이 있단 말인가. 나는 이런 그의 글을 통해 솔직함과 한 사람의 인품을 본다. 그는 스스로 잘났다고 내세우지 않고, 그가 본 모습을 차분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열하일기(上)는 중국에 대한 예찬으로 장돌을 깔았다. 그는 수레며, 벽돌 등에 대한 쓰임새를 유심히 보고 우리나라에 가져와도 좋다고 한다. 그리고 비가 와서 떠내려가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풍경에 대한 묘사도 이어간다. 고단한 일상 속에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보고, 느낀 감정을 소탈하게 적어내려가는 짐짓 그 무게를 지루할 수 있지만... 연암의 발자취를 따라 갈 수 있어 소풍가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겁다.

연암의 글솜씨는 더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으니, 과장하고 숨김 또한 없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그의 글솜씨는 과히 '따라가면 좋겠네, 따라가면 좋겠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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