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가 맞지 않는 삶을 살아온 건 그들이 먼저아닌가? 위선적이고 부패한 상류층을 비난하지만 사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원하는 게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게 아니었나?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나? 그리고 그 결과가 내가 아닌가? 그렇다. 나는 결과일 뿐이다.
p.42
한국은 너무너무 빠르게 변한 나라라서 한두살만 차이가 나도 전혀 말이 안 통하거든. 그러니까 평범한 상태인 거야, 말이 안 통하는 게.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이상하지? 근데 안 이상해. 말 같은 거 안 통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어. 그래서 오히려, 말이 통하는 상황이 어색해.
p.47
써머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무슨 말을 늘어놓아도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듣게 하는. 사람들은 그런 써머에게 쉽게 호감을 느끼며 다가오고 써머는 그들과 가리지 않고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대부분 꾸며낸 거짓말이거나, 얼핏 보면 근사하지만 내용 없는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질리거나 실망한 채로 떠나가지만 언제나 떠난 만큼 새로운 사람들이 다가왔기 때문에 써머는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라고 믿을 정도로 순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렇지 않은 상황이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p.67
불황이라고들 하잖아. 아랍에선 혁명이 일어났고. 월가에선 점거시위를 하고 있어. 근데 여긴 정말이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매일 새로운 술집과 까페가 생겨나고 있잖아.
p.80
"한국인으로 산다는 건 엄청나게 힘든 일이거든. 어려서는 죽도록 열심히 공부를 해야 돼. 졸업을 하면 죽도록 열심히 일을 해야 되고. 근데 옛날엔 그렇게 하면 희망이라도 있었거든. 부자가 된다거나. 근데 이젠 그런 것도 없어. 그냥 다들 죽지 않으려고 죽도록 열심히 사는 거야. 내가 졸업해서 취직한다고 해도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결혼을 하는 데도 돈이 들어. 아이를 낳는 데는 더 많이 들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정말이지 지옥이야. 가난하면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죽는 수밖에 없어. 그게 한국이야."
p.82
정부에서는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고 하지만 다 거짓말이야. 그건 부자들 얘기지. 호텔 바에 앉아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니 그딴 이야기를 지껄이는 사람들한테나 맞는 얘기야. 엄마는 연금이 삭감될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셔. 평생을 성실하게 일을 했는데 결과가 이거야. 이 나라는 평범한 사람들을 책임지지 않아. 근데도 사람들은 태평해 보이지.
p.86
다리를 건너자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케이는 버스를 향해 끝없이 늘어선 아파트들을, 마치 처음 본 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침내 버스가 서울로 진입했을 때 케이는 도시의 완벽한 무질서함에 감탄했다.
p.116
젊은이들은 확실히 매력적인 타깃이었다. 교육 수준이 높고, 인터넷을 포함한 최신 기술에 능숙하며, 민감하고 까다로운 취향을 가졌으며, 정치적으로는 중도좌파에서 자유주의자 사이의 스펙트럼에 걸쳐 있는 사람들. 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전생애에 걸쳐 자본주의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래서 뼛속 깊이 소비주의적이라는 데 있었다.
p.120
공항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다시 나오는 순간까지, 여행의 모든 과정은 쇼핑과 동일하다.
p.126
커피는 아주 달았고, 너무 달아서 그외의 맛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케이에게 뉴욕의 나날들은 그 커피의 맛과 비슷했다. 너무나도 달았고, 하지만 쓴맛은 그 단맛에 감추어져 있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p.128
써머는 뉴욕을 미친 일회용 도시라고 불렀지만 뉴욕은 서울에 비하면 구석기시대에 멈춰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 문제는 변화가 아니었다. 변화에 아무런 규칙도 없다는 거였다. 아니, 규칙이 있기는 했다. 그건 하나였다. 새로 들어선 것이 모든 면에서 전에 있던 것을 압도해야 한다는 것. 레코드 가게가 있던 낮은 건물은 오층짜리 미국계 프랜차이즈 도넛 가게로 바뀌었고, 오래된 주택은 건물전면이 유리로 된 나이트클럽이 되었다. 변화는 먼저 있던 것들에 대한 존중을 완벽하게 결여하고 있었다.
p.135
갈수록 세련되어지는 도시의 풍경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시한폭탄이 장착된 극장에서 상연되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화려한 영화와 같았다. 끔찍한 결말이 다가오고 있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화려한 이야기에 매혹되어 있었다.
p.167
사라졌다고 믿었던 부랑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전후의 거리를 메웠던 넝마주이들과 달랐다. 대부분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넥타이를 매고 집을 나섰던 가장들이었다.
p.179
…온갖 멋져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펑크, 아나키즘, 아방가르드, 공산주의, 혁명, 마약, 히피, 섹스…… 물론 철저히 개념적인 차원에서였다. 서구의 청소년들과 달리 그 개념들을 실제로 현실에 적용해볼 자유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개인에게 허용된 유일한 표현 방식인 패션을 통해 케이는 그것들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p.188
제일 날 미치게 만들었던 게 뭔지 알아?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 내가 그런 일로 혼이 나갔다는 걸. 네 가족도 아니잖아? 애인도 아니잖아? 아니 씨발, 너는 인식능력이 지렁이 수준이냐? 너랑 관련 없으면 못 슬퍼해? 너랑 피를 나누거나 떡을 친 상대가 아니면 공감능력이 발휘가 안돼? 너는 그래? 그렇게 모자란 새끼냐 너는?
p.245
갑자기 자신의 인생이 아주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하찮고, 시시하며, 싸구려인데다, 가짜. 어, 이태원에서 파는 가짜 명품 가방 같다. 왜냐면, 음, 왜냐하면, 끝나버렸으니까. 진짜들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럼 나는 뭐지? 어쩌면 나는 복제품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썩 잘 만들어진. 아니, 너무 그럴듯해서 진짜랑잘 구분도 안 가는. 하지만 가짜. 가짜는 가짜.
p.261
도대체 얘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지? 이십년이 넘게 함께 살아온 동생인데, 생각해보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정상인가? 하지만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잖아? 잘 살아왔잖아? 근데 왜 갑자기 고장이 났지? 케이는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그들 또한 동생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케이는 알 수 있었다.
p.273
있잖아 경희야, 난 망해본 적이 없어. 망하는 게 뭔지 몰라. 왜냐면 처음부터 망했거든. 난 태어날 때부터 인생이 쭉 이런 상태였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돼? 그런 느낌 알아? 계속, 계속, 계속, 좆같을 거라는 느낌.
p.373
어떤 인간이라도, 그가 진정 훌륭한 인격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 해도, 그 인간의 일상을 이십사시간 관찰한다면 남는 것은 혐오의 감정뿐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인간, 같은 집에서 살을 맞대고 사는 인간들에게 종종 가장 강력한 혐오의 감정을 느낀다. 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매초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는 없다. 인사를 해야 하고, 뭔가 먹어야 하며, 화장실에 가야 한다. 2001년 9월 11일, 삼천구 남짓의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로 진동하고 있는 맨해튼 남부에서도 모든 것이정지될 수는 없었다. 남은 자들의 삶은 지속되어야 했다. 아마 진짜 악의라는 게 있다면, 우리를 구역질나게 하는 삶의 본질적인 끔찍함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남은 자들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
p.427
써머, 나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 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댄 말이야. 걔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걔는 나가고 싶었던 거야. 수족관 밖으로. 그래서 부수려고 했던 거야. 근데 왜냐고? 왜 나가고 싶었냐고? 이 고요함은 가짜니까. 어, 이 평화는, 진짜가 아니니까. 그렇지가 않다면 자꾸만 나를 모든 것에서 멀어지게 만들 리가 없어. 날 이렇게 외롭게 만들 리가 없어. 어, 이제 진짜 알겠어. 너도 알고 있었지? 아니,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어. 근데 말할 수가 없었을 뿐이지. 아니,말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뿐이었어. 말은 아무 힘이 없었어. 그래서 그냥 사라져버렸어.
p.444
모든 게 망가졌는데, 왜 아무것도 무너져내리지 않아? 왜 다 무너져내렸는데 아무것도 끝장나지 않지? 왜 끝장이 났는데,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거냐고?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거야.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거라고. 그런데 여기가 천국이래.
p.446
근데 나 진짜로 궁금한 게 있어. 수족관 속에 있는 물고기가 수족관을 부수면 어떻게 돼? 죽겠지. 뻔하지. 하지만 수족관 속에 있는 건 살아 있는 거야? 그래, 나는 이게 묻고 싶은 거야.
p.4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