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타임슬립 필립 K. 딕 걸작선 1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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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처럼 종횡무진으로 지면을 가로지르는, 일견 비옥해 보이는 운하. 그러나 운하는 생명을 겨우 유지시켜줄 정도이고, 결코 그 이상을 주지는 않는다.

p.21

"하지만 UN의 높은 나리들이 수로를 관리하고 있는 게 문제야. 물은 꼭 필요하니까 말이야. 물은 운송 수단, 동력원, 식수원뿐 아니라, 지금처럼 목욕할 때도 반드시 필요해. 놈들은 언제든 물 공급을 끊을 수 있으니까, 우리 생명줄을 잡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p.31

화성처럼 질량이 작은 행성, 그것도 느려터진 운하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동력원이 없고 석유값이 금값인 곳에서 자전거는 큰 경제적 가치를 가진다. 페달을 밟으며 모래 위를 몇백 마일 달린다 해도 돈 한푼 들지 않으니까 말이다. 기름을 먹는 엔진이 달린 운송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수리 정비 관계자나, 어니처럼 요직에 자리잡은 중요인물로 한정된다.

p.32

"난 단지 현실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야. 우린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있어. 지구에서 이민자들이 계속 와주지 않으면 우린 앉은 자리에서 말라죽는 수밖에 없어. 당신도 알잖아, 앤. B-G 캠프만 없다면, 화성은 수폭 실험으로 대기가 오염된 지구와는 전혀 다릅니다, 기형아 따위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전할 수도 있다는 걸. 난 그러고 싶었지만 B-G 캠프 탓에 공염불이 되고 말았어."

p.102

이웃 거류지들에 대한 주민들의 줄기찬 적의가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냥 짜증스러운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 감정은 점차 혐오감으로 변해갔다. 주민들은 낮에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이웃들의 흠을 찾는 일에 몰두했고, 평소에는 지극히 온화하고 매력적인 인물조차도 특정 화제를 언급하기만 하면 이성을 잃고 폭발해버리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왔다. 밤이 되면 그들의 적의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다. 국가 거류지는 밤이면 생기를 되찾기 때문이다. 낮에는 과학실험이나 개발의 장으로 기능하던 연구소가, 밤이 되면 일반주민에게 문호를 열고 사악한 폭력 도구의 생산공장으로 전용轉用되었다. 주민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 열띤 흥분과 환희를 맛보고, 당연하다는 듯이 애국심을 내세운다.

p.104

망자의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든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며, 생에 맞먹는 외포를 불러일으키는 대격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죽음은 생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힘들다.

p.111

이 기계는 전자기 테이프에 기록된 지시에 따라 과장된 연기를 수행하지만, 연기의 각 단계는 청중의 반응에 맞춰 임의로 수정된다. 고로 이것은 폐쇄 시스템이 아니며, 테이프의 기록과 아이들이 내놓은 대답을 비교하고, 조합照合하고, 분류한 다음에야 비로소 반응하는 기계다. 그러나 티칭머신이 식별하는 범주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기계 자체의 독자적인 견해 따위가 성립할 여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칭머신은 사람들에게 마치 정말로 살아 있는 생물인 듯한 환상을 준다. 기계공학의 승리라고나 할까. 티칭머신의 강점은 인간 교사와는 달리 개개의 학생들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지 수업을 진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맞춤지도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한 대의 티칭머신은 무려 천 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맡아 가르칠 수 있지만 어떤 제자를 다른 제자와 혼동하는 일은 결코 없으며, 개인차에 입각해서 반응하기 때문에 누구를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미묘하게 다른 존재로 변신한다. 기계장치인 것은 맞지만,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p.117

`학교`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가르치는 장소가 아니라, 아이들을 일정한 틀, 그것도 지독하게 제한적인 틀에 넣어 새로 찍어내는 곳이다. 따라서 `학교`는 아이들이 이어받은 문화에 대한 연결고리였고, 그들을 상대로 문화 전체를 조금씩 잘라 파는 도구에 불과했다. 아이들을 문화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도 당연히 정당화되었다. 문화의 계승이야말로 `학교`의 지상과제였다. 엉뚱한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개인의 성향을 가차 없이 교정된다.

p.118

잭 볼렌은 티칭머신만을 가치 판단의 유일한 권위로 간주하는 `학교`의 시스템을 끝끝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회의 가치관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학교`는 그런 가치들을 안정시키고, 고착시키고, 방부 처리하려는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학교` 자체가 신경증을 앓고 있다는 결론을 잭이 내린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학교`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예상을 벗어난 이변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였다. 이것은 강박증의 세계이며,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다.

p.121

…잭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신경증이 왜 인위적인 발명품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신경증이란 병에 시달리는 개인이나 위기에 직면한 사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필요가 빚은 발명품인 것이다. 따라서 신경증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라는 실비아의 말은 타당했다. 신경증이란 의식적인 멈춤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점에서 삶을 동결시켜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는 걸 막는 행위라고나 할까.

p.122

미래를 미리 아는 게 가능하다는 게 너희들 종교의 가르침이잖아. 그것의 어디가 그렇게 엉터리라는 거지? 지구에는 초감각을 가진 인간들이 있고, 그중 일부는 예지능력, 그러니까 미래를 읽는 능력을 갖고 있어. 물론 그런 작자들은 다른 정신병자들하고 함께 병원에 가둬두지만 말이야. 예지능력은 정신분열증의 한 증세로 간주되거든.

p.150

"생명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생물은 무작정 살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분열증 환자들이 옳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용감하지 않으면 택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들은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제적인 것들에 등을 돌리고, 대신 내면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바닥이 없는 칠흑의 밤이 지배하는 나락에서 말입니다. 그들이 나중에 거기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돌아온다면, 진정한 의미를 보고 온 그들은 어떤 존재가 될까요? 그래서 저는 그들을 존경합니다."

p.152

"저게 뭐냐?" 레오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화성인인가?" "화성인이 맞습니다." 잭은 대답했다. "세상에." 레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화성인들이란 말이군……. 토착 흑인들처럼 보이는데. 아프리카의 부시맨 같은." "유전적으로 아주 가깝다고 하더군요."

p.228

그는 일어서서 창가로 갔고, 훨씬 아래쪽에 있는 루이스 타운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통행인들이 바삐 걸어다니고 있다. 그런데 걷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차들도 마찬가지다. 왜 저렇게 속도를 내는 걸까. 움직임 전체가 묘하게 불쾌한 느낌을 준다고 할까. 사람이든 차든 매끄럽지 못한, 일종의 발작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통에 서로 충돌하거나 당장이라도 충돌할 듯한 인상을 받는다.

p.380

"여보세요. 스코트 템플입니다." 그제야 어니는 발신음이 단지 몇 번만 울렸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기다린 시간은 몇 초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배신이니 파멸이니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p.385

어니는 자기가 있는 곳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정신분열증 환자의 환상 속이라고 했어.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아. 우리가 사는 세계가 만프레드의 세계와 얼마나 닮았는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거든― 전혀 다른 곳들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차이가 있다고 해도 정도의 문제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

p.408

딕의 소시민적 주인공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갈등은 거의 언제나 현실 인식과 직결된 개인 정체성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불확실성은 플롯을 통해 해소되기보다는 현실 자체의 다중화多重化를 유발하고, 나아가서는 현실 붕괴로까지 이어진다. 어느 정도 딕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수긍하겠지만, 딕이 전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은 이유는 그가 부조리한 미래 사회를 정확하게 ‘예언’해서가 아니라―딕보다 부조리하거나 예언적인 작가들은 얼마든지 있다―편집증과 분열증으로 상징되는 20세기 과학 문명사회 특유의 ‘일그러짐’을 SF 작가의 입장에서 성실하게 직시했기 때문이다.

p.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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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타임슬립 필립 K. 딕 걸작선 1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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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프레드의 세계에 갇힌 어니 코트가 겪는 끔찍한 일들을 묘사한 대목을 다시 읽어 보았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오늘 현대인들의 일상을 그저 단순하게 나열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PKD, 그는 분명 SF의 전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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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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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이 88만 원 세대를 『표백』으로 정의하는 데 그쳤다면 『천국에서』의 김사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내딛는다. 그들에게 오늘이 왜 표백과 같을 수밖에 없는지 그들의 모든 행위가 어째서 허망한 자맥질로 끝나버리고 마는지를 한 컷의 사진처럼 찍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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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가 맞지 않는 삶을 살아온 건 그들이 먼저아닌가? 위선적이고 부패한 상류층을 비난하지만 사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원하는 게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게 아니었나?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나? 그리고 그 결과가 내가 아닌가? 그렇다. 나는 결과일 뿐이다.

p.42

한국은 너무너무 빠르게 변한 나라라서 한두살만 차이가 나도 전혀 말이 안 통하거든. 그러니까 평범한 상태인 거야, 말이 안 통하는 게.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이상하지? 근데 안 이상해. 말 같은 거 안 통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어. 그래서 오히려, 말이 통하는 상황이 어색해.

p.47

써머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무슨 말을 늘어놓아도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듣게 하는. 사람들은 그런 써머에게 쉽게 호감을 느끼며 다가오고 써머는 그들과 가리지 않고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대부분 꾸며낸 거짓말이거나, 얼핏 보면 근사하지만 내용 없는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질리거나 실망한 채로 떠나가지만 언제나 떠난 만큼 새로운 사람들이 다가왔기 때문에 써머는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라고 믿을 정도로 순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렇지 않은 상황이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p.67

불황이라고들 하잖아. 아랍에선 혁명이 일어났고. 월가에선 점거시위를 하고 있어. 근데 여긴 정말이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매일 새로운 술집과 까페가 생겨나고 있잖아.

p.80

"한국인으로 산다는 건 엄청나게 힘든 일이거든. 어려서는 죽도록 열심히 공부를 해야 돼. 졸업을 하면 죽도록 열심히 일을 해야 되고. 근데 옛날엔 그렇게 하면 희망이라도 있었거든. 부자가 된다거나. 근데 이젠 그런 것도 없어. 그냥 다들 죽지 않으려고 죽도록 열심히 사는 거야. 내가 졸업해서 취직한다고 해도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결혼을 하는 데도 돈이 들어. 아이를 낳는 데는 더 많이 들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정말이지 지옥이야. 가난하면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죽는 수밖에 없어. 그게 한국이야."

p.82

정부에서는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고 하지만 다 거짓말이야. 그건 부자들 얘기지. 호텔 바에 앉아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니 그딴 이야기를 지껄이는 사람들한테나 맞는 얘기야. 엄마는 연금이 삭감될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셔. 평생을 성실하게 일을 했는데 결과가 이거야. 이 나라는 평범한 사람들을 책임지지 않아. 근데도 사람들은 태평해 보이지.

p.86

다리를 건너자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케이는 버스를 향해 끝없이 늘어선 아파트들을, 마치 처음 본 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침내 버스가 서울로 진입했을 때 케이는 도시의 완벽한 무질서함에 감탄했다.

p.116

젊은이들은 확실히 매력적인 타깃이었다. 교육 수준이 높고, 인터넷을 포함한 최신 기술에 능숙하며, 민감하고 까다로운 취향을 가졌으며, 정치적으로는 중도좌파에서 자유주의자 사이의 스펙트럼에 걸쳐 있는 사람들. 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전생애에 걸쳐 자본주의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래서 뼛속 깊이 소비주의적이라는 데 있었다.

p.120

공항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다시 나오는 순간까지, 여행의 모든 과정은 쇼핑과 동일하다.

p.126

커피는 아주 달았고, 너무 달아서 그외의 맛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케이에게 뉴욕의 나날들은 그 커피의 맛과 비슷했다. 너무나도 달았고, 하지만 쓴맛은 그 단맛에 감추어져 있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p.128

써머는 뉴욕을 미친 일회용 도시라고 불렀지만 뉴욕은 서울에 비하면 구석기시대에 멈춰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 문제는 변화가 아니었다. 변화에 아무런 규칙도 없다는 거였다. 아니, 규칙이 있기는 했다. 그건 하나였다. 새로 들어선 것이 모든 면에서 전에 있던 것을 압도해야 한다는 것. 레코드 가게가 있던 낮은 건물은 오층짜리 미국계 프랜차이즈 도넛 가게로 바뀌었고, 오래된 주택은 건물전면이 유리로 된 나이트클럽이 되었다. 변화는 먼저 있던 것들에 대한 존중을 완벽하게 결여하고 있었다.

p.135

갈수록 세련되어지는 도시의 풍경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시한폭탄이 장착된 극장에서 상연되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화려한 영화와 같았다. 끔찍한 결말이 다가오고 있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화려한 이야기에 매혹되어 있었다.

p.167

사라졌다고 믿었던 부랑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전후의 거리를 메웠던 넝마주이들과 달랐다. 대부분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넥타이를 매고 집을 나섰던 가장들이었다.

p.179

…온갖 멋져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펑크, 아나키즘, 아방가르드, 공산주의, 혁명, 마약, 히피, 섹스…… 물론 철저히 개념적인 차원에서였다. 서구의 청소년들과 달리 그 개념들을 실제로 현실에 적용해볼 자유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개인에게 허용된 유일한 표현 방식인 패션을 통해 케이는 그것들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p.188

제일 날 미치게 만들었던 게 뭔지 알아?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 내가 그런 일로 혼이 나갔다는 걸. 네 가족도 아니잖아? 애인도 아니잖아? 아니 씨발, 너는 인식능력이 지렁이 수준이냐? 너랑 관련 없으면 못 슬퍼해? 너랑 피를 나누거나 떡을 친 상대가 아니면 공감능력이 발휘가 안돼? 너는 그래? 그렇게 모자란 새끼냐 너는?

p.245

갑자기 자신의 인생이 아주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하찮고, 시시하며, 싸구려인데다, 가짜. 어, 이태원에서 파는 가짜 명품 가방 같다. 왜냐면, 음, 왜냐하면, 끝나버렸으니까. 진짜들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럼 나는 뭐지? 어쩌면 나는 복제품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썩 잘 만들어진. 아니, 너무 그럴듯해서 진짜랑잘 구분도 안 가는. 하지만 가짜. 가짜는 가짜.

p.261

도대체 얘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지? 이십년이 넘게 함께 살아온 동생인데, 생각해보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정상인가? 하지만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잖아? 잘 살아왔잖아? 근데 왜 갑자기 고장이 났지? 케이는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그들 또한 동생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케이는 알 수 있었다.

p.273

있잖아 경희야, 난 망해본 적이 없어. 망하는 게 뭔지 몰라. 왜냐면 처음부터 망했거든. 난 태어날 때부터 인생이 쭉 이런 상태였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돼? 그런 느낌 알아? 계속, 계속, 계속, 좆같을 거라는 느낌.

p.373

어떤 인간이라도, 그가 진정 훌륭한 인격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 해도, 그 인간의 일상을 이십사시간 관찰한다면 남는 것은 혐오의 감정뿐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인간, 같은 집에서 살을 맞대고 사는 인간들에게 종종 가장 강력한 혐오의 감정을 느낀다. 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매초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는 없다. 인사를 해야 하고, 뭔가 먹어야 하며, 화장실에 가야 한다. 2001년 9월 11일, 삼천구 남짓의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로 진동하고 있는 맨해튼 남부에서도 모든 것이정지될 수는 없었다. 남은 자들의 삶은 지속되어야 했다. 아마 진짜 악의라는 게 있다면, 우리를 구역질나게 하는 삶의 본질적인 끔찍함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남은 자들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

p.427

써머, 나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 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댄 말이야. 걔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걔는 나가고 싶었던 거야. 수족관 밖으로. 그래서 부수려고 했던 거야. 근데 왜냐고? 왜 나가고 싶었냐고? 이 고요함은 가짜니까. 어, 이 평화는, 진짜가 아니니까. 그렇지가 않다면 자꾸만 나를 모든 것에서 멀어지게 만들 리가 없어. 날 이렇게 외롭게 만들 리가 없어. 어, 이제 진짜 알겠어. 너도 알고 있었지? 아니,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어. 근데 말할 수가 없었을 뿐이지. 아니,말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뿐이었어. 말은 아무 힘이 없었어. 그래서 그냥 사라져버렸어.

p.444

모든 게 망가졌는데, 왜 아무것도 무너져내리지 않아? 왜 다 무너져내렸는데 아무것도 끝장나지 않지? 왜 끝장이 났는데,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거냐고?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거야.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거라고. 그런데 여기가 천국이래.

p.446

근데 나 진짜로 궁금한 게 있어. 수족관 속에 있는 물고기가 수족관을 부수면 어떻게 돼? 죽겠지. 뻔하지. 하지만 수족관 속에 있는 건 살아 있는 거야? 그래, 나는 이게 묻고 싶은 거야.

p.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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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서로 허락한다는 데 동의한다. (…)
둘째,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다(…)
셋째, 경제적으로 서로 독립한다

p.21

보부아르는 여자로서 자식을 키우는 일과 가사에 커다란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기를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으며, 아기에게 젖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갈아주는 여자들을 보면 혐오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자식에게 모든 정성을 쏟고 자식의 노예가 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자신에게 써야한다고 일찍부터 판단했다.

p.24

러시아 출신인 올가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사이에 끼어들면서 그들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변한다. 보부아르는 올가가 발산하는 젊음을 좋아하고 부러워했으며, 심지어는 올가와 동성애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베를린에서 돌아와 올가를 알게 된 사르트르 역시 올가가 지닌 젊음, 순수한 반항심, 때 묻지 않은 감수성에 완전히 사로잡혀 사랑에 빠진다. 사르트르는 이때를 돌아보며 1935년 3월부터 1937년 3월까지를 ‘광기와 올가에 대한 정열로 절망에 빠진 시기’로 규정한다.

p.26

보통 젊은 연인은 사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너’ 또는 ‘나’ 등의 ‘해라체’를 쓴다. 물론 이러한 호칭은 친근감의 표현이자 그들 사이를 좁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당신’이라는 호칭을 썼다. 이것은 그들 각자가 상대방을 한 명의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이 서로에게 보여준 이러한 태도는 가능한 한 서로를 객체화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결국 ‘당신’이라는 호칭은 주체성을 지닌 두 사람이 ‘우리들’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p.45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보부아르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 "나의 재판관" "나의 검열관" "인쇄를 허가하는 사람" 등으로 불렀다.

p.47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계약결혼을 통해 맺은 사랑은 인간관계의 이상을 정립하려는 그들의 노력의 소산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들이 이와 같은 관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서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50여 년에 걸쳐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끝까지 노력했다는 점이다.

p.48

언어관계에 참여하는 당사자인 나는 항상 주체성을 지녀야 한다. 다시 말해 말하는 주체인 나는 자유와 초월의 상태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가 아니면 언어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 역시 주체성을 지녀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타자 역시 나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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