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서로 허락한다는 데 동의한다. (…)
둘째,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다(…)
셋째, 경제적으로 서로 독립한다

p.21

보부아르는 여자로서 자식을 키우는 일과 가사에 커다란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기를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으며, 아기에게 젖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갈아주는 여자들을 보면 혐오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자식에게 모든 정성을 쏟고 자식의 노예가 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자신에게 써야한다고 일찍부터 판단했다.

p.24

러시아 출신인 올가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사이에 끼어들면서 그들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변한다. 보부아르는 올가가 발산하는 젊음을 좋아하고 부러워했으며, 심지어는 올가와 동성애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베를린에서 돌아와 올가를 알게 된 사르트르 역시 올가가 지닌 젊음, 순수한 반항심, 때 묻지 않은 감수성에 완전히 사로잡혀 사랑에 빠진다. 사르트르는 이때를 돌아보며 1935년 3월부터 1937년 3월까지를 ‘광기와 올가에 대한 정열로 절망에 빠진 시기’로 규정한다.

p.26

보통 젊은 연인은 사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너’ 또는 ‘나’ 등의 ‘해라체’를 쓴다. 물론 이러한 호칭은 친근감의 표현이자 그들 사이를 좁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당신’이라는 호칭을 썼다. 이것은 그들 각자가 상대방을 한 명의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이 서로에게 보여준 이러한 태도는 가능한 한 서로를 객체화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결국 ‘당신’이라는 호칭은 주체성을 지닌 두 사람이 ‘우리들’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p.45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보부아르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 "나의 재판관" "나의 검열관" "인쇄를 허가하는 사람" 등으로 불렀다.

p.47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계약결혼을 통해 맺은 사랑은 인간관계의 이상을 정립하려는 그들의 노력의 소산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들이 이와 같은 관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서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50여 년에 걸쳐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끝까지 노력했다는 점이다.

p.48

언어관계에 참여하는 당사자인 나는 항상 주체성을 지녀야 한다. 다시 말해 말하는 주체인 나는 자유와 초월의 상태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가 아니면 언어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 역시 주체성을 지녀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타자 역시 나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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