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타임슬립 필립 K. 딕 걸작선 1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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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처럼 종횡무진으로 지면을 가로지르는, 일견 비옥해 보이는 운하. 그러나 운하는 생명을 겨우 유지시켜줄 정도이고, 결코 그 이상을 주지는 않는다.

p.21

"하지만 UN의 높은 나리들이 수로를 관리하고 있는 게 문제야. 물은 꼭 필요하니까 말이야. 물은 운송 수단, 동력원, 식수원뿐 아니라, 지금처럼 목욕할 때도 반드시 필요해. 놈들은 언제든 물 공급을 끊을 수 있으니까, 우리 생명줄을 잡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p.31

화성처럼 질량이 작은 행성, 그것도 느려터진 운하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동력원이 없고 석유값이 금값인 곳에서 자전거는 큰 경제적 가치를 가진다. 페달을 밟으며 모래 위를 몇백 마일 달린다 해도 돈 한푼 들지 않으니까 말이다. 기름을 먹는 엔진이 달린 운송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수리 정비 관계자나, 어니처럼 요직에 자리잡은 중요인물로 한정된다.

p.32

"난 단지 현실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야. 우린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있어. 지구에서 이민자들이 계속 와주지 않으면 우린 앉은 자리에서 말라죽는 수밖에 없어. 당신도 알잖아, 앤. B-G 캠프만 없다면, 화성은 수폭 실험으로 대기가 오염된 지구와는 전혀 다릅니다, 기형아 따위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전할 수도 있다는 걸. 난 그러고 싶었지만 B-G 캠프 탓에 공염불이 되고 말았어."

p.102

이웃 거류지들에 대한 주민들의 줄기찬 적의가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냥 짜증스러운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 감정은 점차 혐오감으로 변해갔다. 주민들은 낮에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이웃들의 흠을 찾는 일에 몰두했고, 평소에는 지극히 온화하고 매력적인 인물조차도 특정 화제를 언급하기만 하면 이성을 잃고 폭발해버리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왔다. 밤이 되면 그들의 적의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다. 국가 거류지는 밤이면 생기를 되찾기 때문이다. 낮에는 과학실험이나 개발의 장으로 기능하던 연구소가, 밤이 되면 일반주민에게 문호를 열고 사악한 폭력 도구의 생산공장으로 전용轉用되었다. 주민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 열띤 흥분과 환희를 맛보고, 당연하다는 듯이 애국심을 내세운다.

p.104

망자의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든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며, 생에 맞먹는 외포를 불러일으키는 대격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죽음은 생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힘들다.

p.111

이 기계는 전자기 테이프에 기록된 지시에 따라 과장된 연기를 수행하지만, 연기의 각 단계는 청중의 반응에 맞춰 임의로 수정된다. 고로 이것은 폐쇄 시스템이 아니며, 테이프의 기록과 아이들이 내놓은 대답을 비교하고, 조합照合하고, 분류한 다음에야 비로소 반응하는 기계다. 그러나 티칭머신이 식별하는 범주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기계 자체의 독자적인 견해 따위가 성립할 여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칭머신은 사람들에게 마치 정말로 살아 있는 생물인 듯한 환상을 준다. 기계공학의 승리라고나 할까. 티칭머신의 강점은 인간 교사와는 달리 개개의 학생들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지 수업을 진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맞춤지도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한 대의 티칭머신은 무려 천 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맡아 가르칠 수 있지만 어떤 제자를 다른 제자와 혼동하는 일은 결코 없으며, 개인차에 입각해서 반응하기 때문에 누구를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미묘하게 다른 존재로 변신한다. 기계장치인 것은 맞지만,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p.117

`학교`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가르치는 장소가 아니라, 아이들을 일정한 틀, 그것도 지독하게 제한적인 틀에 넣어 새로 찍어내는 곳이다. 따라서 `학교`는 아이들이 이어받은 문화에 대한 연결고리였고, 그들을 상대로 문화 전체를 조금씩 잘라 파는 도구에 불과했다. 아이들을 문화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도 당연히 정당화되었다. 문화의 계승이야말로 `학교`의 지상과제였다. 엉뚱한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개인의 성향을 가차 없이 교정된다.

p.118

잭 볼렌은 티칭머신만을 가치 판단의 유일한 권위로 간주하는 `학교`의 시스템을 끝끝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회의 가치관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학교`는 그런 가치들을 안정시키고, 고착시키고, 방부 처리하려는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학교` 자체가 신경증을 앓고 있다는 결론을 잭이 내린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학교`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예상을 벗어난 이변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였다. 이것은 강박증의 세계이며,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다.

p.121

…잭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신경증이 왜 인위적인 발명품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신경증이란 병에 시달리는 개인이나 위기에 직면한 사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필요가 빚은 발명품인 것이다. 따라서 신경증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라는 실비아의 말은 타당했다. 신경증이란 의식적인 멈춤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점에서 삶을 동결시켜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는 걸 막는 행위라고나 할까.

p.122

미래를 미리 아는 게 가능하다는 게 너희들 종교의 가르침이잖아. 그것의 어디가 그렇게 엉터리라는 거지? 지구에는 초감각을 가진 인간들이 있고, 그중 일부는 예지능력, 그러니까 미래를 읽는 능력을 갖고 있어. 물론 그런 작자들은 다른 정신병자들하고 함께 병원에 가둬두지만 말이야. 예지능력은 정신분열증의 한 증세로 간주되거든.

p.150

"생명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생물은 무작정 살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분열증 환자들이 옳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용감하지 않으면 택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들은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제적인 것들에 등을 돌리고, 대신 내면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바닥이 없는 칠흑의 밤이 지배하는 나락에서 말입니다. 그들이 나중에 거기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돌아온다면, 진정한 의미를 보고 온 그들은 어떤 존재가 될까요? 그래서 저는 그들을 존경합니다."

p.152

"저게 뭐냐?" 레오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화성인인가?" "화성인이 맞습니다." 잭은 대답했다. "세상에." 레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화성인들이란 말이군……. 토착 흑인들처럼 보이는데. 아프리카의 부시맨 같은." "유전적으로 아주 가깝다고 하더군요."

p.228

그는 일어서서 창가로 갔고, 훨씬 아래쪽에 있는 루이스 타운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통행인들이 바삐 걸어다니고 있다. 그런데 걷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차들도 마찬가지다. 왜 저렇게 속도를 내는 걸까. 움직임 전체가 묘하게 불쾌한 느낌을 준다고 할까. 사람이든 차든 매끄럽지 못한, 일종의 발작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통에 서로 충돌하거나 당장이라도 충돌할 듯한 인상을 받는다.

p.380

"여보세요. 스코트 템플입니다." 그제야 어니는 발신음이 단지 몇 번만 울렸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기다린 시간은 몇 초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배신이니 파멸이니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p.385

어니는 자기가 있는 곳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정신분열증 환자의 환상 속이라고 했어.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아. 우리가 사는 세계가 만프레드의 세계와 얼마나 닮았는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거든― 전혀 다른 곳들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는 차이가 있다고 해도 정도의 문제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

p.408

딕의 소시민적 주인공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갈등은 거의 언제나 현실 인식과 직결된 개인 정체성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불확실성은 플롯을 통해 해소되기보다는 현실 자체의 다중화多重化를 유발하고, 나아가서는 현실 붕괴로까지 이어진다. 어느 정도 딕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수긍하겠지만, 딕이 전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은 이유는 그가 부조리한 미래 사회를 정확하게 ‘예언’해서가 아니라―딕보다 부조리하거나 예언적인 작가들은 얼마든지 있다―편집증과 분열증으로 상징되는 20세기 과학 문명사회 특유의 ‘일그러짐’을 SF 작가의 입장에서 성실하게 직시했기 때문이다.

p.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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