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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1949년 여름 옹진과 개성에서 일어난 전투는 대부분 한국군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1949년 여름 시점에 북한은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르면 1947년 여름 무렵 이승만 정권이 미군을 잔류시키기 위해 소요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1949년에는 미군 철수를 실현시키기 위해공격과 반격을 자제했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 미군은 철수했고 지난 40년중에서 오직 1년 동안 한국은 겉으로 보기에 미군 전투부대의 보호를 받지못하거나 미국이 작전통제권을 갖지 못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 P19

8월 13일 신성모 장관은 8월 4일 아침 옹진에서 사령부로 보낸 보고들은 대부분 경계경보에 관련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 보고의 내용은 [옹진]반도의 한국군이완패해 북한의 맹공에 아무 대항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참모들과 상황을 검토했지만(..) 옹진의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북진하는것이라고 군부는 주장했다. 군부는 철원을 목표로 즉시 북진해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 장관은 로버츠 장군의 조언에 따라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한정된 규모의 증원군을 옹진에 투입하는 절차에 즉시 착수했다고 말했다.
진해에서 열리고 있던 이승만과 장제스의 회담에 참석했던 총리 [이범석]는 돌아오자마자 신 장관을 불러 좀더 용기를 내서 북한을 공격해야 했다고 질책했다. 이범석 장군이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신 장관의 말을 듣고 나는 놀랐다. 이튿날 진해에서 돌아온 이 대통령도 그에게 철원 공격을 반대하는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 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8월 16일 무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승만은 채병덕 참모총장 김석원으로 교체하려는 생각을 내비쳤다. 김석원은 이 대통령이 오래 총애해온 인물이었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기 전인지난 가을, 이 대통령은 콜터 장군과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군에서 복무한경험이 있는 김석원은 애국심에 불타는 남한군에게 소총 2만 정을 공급해주면 "북한을 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국방장관과 참모총장, 미국의 군사고문은 모두 김석원 장군에게 반대했다. 그들은 김석원을 훌륭한 군인이 아니라 허풍쟁이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예전 일본군이 사용하던 반자이 자살 돌격 작전으로 전선의 관할 지구에서 북한군 - P31

사로잡힌 유격대와 좌익 의심자 가운데 처형되지 않은 사람은 정치적 신념과 소속 정당을 "변경하는 강한 압박을 받았다. 경찰은 고문을 널리 자행했고, 전향을 거부하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미국 사회과학자들의 면밀한 조사에 따르면, 지방에서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로 고발된 사람은 모두 이른바 보도연맹(6장 참조)에 가입해야 했는데, 그 조직은 "의심스러운 사람을 모두 감시하고 ・・・) 이전의 사상에서 전향시키기 위해 (・・・) 경찰이 지역에서 조직하고 관리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전향했지만 대부분 이승만 정권의 경찰에게 살해됐다. 위 학자들의 연구 결과,
한 작은 마을에서는 그런 사망자가 6명 발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이런 방식은 원래 식민지 시대 헌병대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전향시키려고 사용한 것이었다. 그것은 일제의 분할통치 방법 가운데 가장 증오스러운 것으로, 본질 자체는 사악하지만 저항 세력 내부에 쓰라리고지속적인 균열을 내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 P43

1950년 봄 남한 유격대의 패배는 뚜렷해졌고 그것은 지도층의 균열로 이어졌다. 남한 공산주의자들은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으며, 김일성 세력은 조선인민군이 남한을 해방시킬 시점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게 됐다-그때 남한 유격대는 무력해 한반도의 통일에 공헌하다고 주장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일부에서 주장하듯 유격대 활동의 침체가 박헌영이 전통적 방식의 공격을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북한에서 권력을 소유하지 못했고 군사적 경험도 없었다. 이것은 나중에김일성 세력이 전쟁 결과의 책임을 그에게 떠넘겨 처형하는 원인이 됐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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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이곳이 전쟁터가 될지도 모르고 하늘에서 폭탄이 쏟아지게 될지도 모르고………… 세계는 지금미쳐버렸어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걸 아셔야 합니다. 괴로웠던 일, 생각하고 싶지 않는 일 모두 다 털어버리고, 네, 홀가분하게 사십시오, 임선생." - P111

"아드님 불편한 몸도 사람이 불공평해서 그런가요?"
"공평하다는 병신이라도 다 살아가는 길이 어찌 없을 것이여? 손발 없는 배암도 묵고 살고 물속의 개기도 묵고 사는디,
일찍이 가고 더디게 가는 거사 천지조화, 사람이 하는 일은 아닌께로"
‘할머니 말씀이 옳아요. 가두는 자가 없으면 갇히는 자도 없을 것이며 들판의 곡식이며 열매며, 많이 갖는 자가 없으면 굶어 죽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이는 자 없으면 죽는 자도 없을 - P117

것이며 주인이 있으니 하인도 있는 것, 부리 하나, 작은 밥통하나 몸속에 달고서 수만 리 창공을 날아 먹이를 찾고 번식하는 새, 겨울 한 철 나무뿌리 갉아먹으며 연명하는 작은 짐승들,
그들은 자유롭다! 해방된 존재들이다! 오직 인간들만이 사로잡혀 있다.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말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말, 말,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구원의 연장[道]이기도했지만 피로 물든 흉기는 아니었던가?‘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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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살롱 사이에는 현실이끝나는 분리선이 놓여 있었다. 게르망트댁에서의 저녁 식사는 마치 오랫동안 욕망해 오던 여행을, 머릿속의 욕망을 내 눈앞에 지나가게 하여 꿈과 친해지는 여행을 시도하는 것과도같았다. 집주인들이 누군가를 초대하여 "오세요, ‘완전히‘ 우리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친구들이 자기들 사이에 섞인 그를 보며 느낄 두려움을 그 배척받은 자의 탓으로 돌리는 척하면서, 지금까지 그들의 내밀한 친구들에게만 부여해 오던 특권을 본의 아니게 비사교적이고 조금은 호감을 사 - P109

고 있는 그 따돌림 받는 자에게도 부여하여, 그를 남들이 부러워하는 특권적인 사람으로 변모시키려고 애쓰는 그런 저녁식사 중의 하나라고 나는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게르망트 부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때, 나는 마치 파브리스가 자신의 고모 집에 도착하면서 느꼈던 그 보랏빛 아름다움과, 모스카 백작에게 소개되었을 때의 그 기적 같은 일을 떠올리면서, 그녀가 가진 최상의 것을 내게 음미하게 하고 싶어한다고 느꼈다.
"금요일에 혹시 시간 되세요? 아주 작은 모임이에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파름 대공 부인께서 오실 텐데 아주 매력적인분이랍니다. 기분 좋은 분들과의 만남이 아니라면 당신을 초대하지도 않을 테지만요."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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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소련군은 철수했으며, 중국에서 싸웠던 수만 명의 한국인은 귀국했다. 스탈린은 세계대전 동안 가톨릭의 영향력이 전 세계로 확대됐다는 보고를 받고 교황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군대를 가지게 됐느냐고 물었다. 1945년 그는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사회제도를 강요한다"고발언했다. 이 냉철한 현실주의자에게 군사력의 배치는 모든 것을 보장했다.
소련군이 철수하고 북한군과 연결된 중국이 그것을 대체한 영향을 그가 잘못 파악할 리는 없었다. 극동에서 소련 군사력의 한계와 언제 터질지 모르는한국이라는 화약고로부터 소련을 멀리 두려는 욕망 때문에 그가 소련군을철수했다고 생각된다. 그때 이후 김일성은 자신의 지휘를 받는 가장 강력한군대를 보유했을 뿐 아니라 두 공산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교묘히 행동할 수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 P515

1949년 11월 게오르기 말렌코프Georgi Malenkov는 논란을 불러온 연설을 했는데, 이것을 소련이 좀더 공격적인 노선으로 나아갈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석한 사람들도 있었다-헨리 스팀슨의 표현을풍자해 말렌코프는 보란 듯이 원자폭탄 모형을 허리에 매달고 연설했다.
그 무렵 미국의 주요 관료들은 말렌코프의 연설이 소련의 정책 변화를 알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회고했다.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을 입안한 폴 니츠는 1950년 2월 모스크바는 "전체적으로 자신감이 넘치고 있는 것 같다"
고 파악하면서 인도차이나, 베를린, 오스트리아 그리고 한국은 소련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당시 조지 케넌은 말렌코프의 연설을 깊이 주시했는데, 이후 말렌코프는 "우리가 아는 한 언제나 "극동에서 좀더 적극적인정책을 지지했다"고 언급했다. 애치슨은 말렌코프가 "자신감 넘치고 공격적인 연설을 했다면서 소련이 곧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세 지역은 유고슬라비아·베를린 한국이라고 언급했다. - P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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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장

북한은 단순히 소련의 위성국이아니었다. 1945~1946년 널리 확산된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성립된 다소비중앙집권적인 통일전선정부에서 시작해 소련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행사한 1947~1948년을 거쳐 1949년(즉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기 전이며동유럽의 스탈린주의화가 시작된 시점이라고 브워지미에서 브루스가 정의한 시기이에는 중국과 긴밀히 결속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북한은 두 사회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40년대 후반 북한 체제는 한국.소련·중국의 경험이 융합된 것으로, 한국의 정치문화가 모델로서 깊은 영향을 줬다. 또한 북한은 특히 당 구조와 지도 체제에서 소련·중국과는 크게 달랐다. - P432

1947~1948년 소련과 북한의 전략적 이익은 분명히 일치했다. 김일성이보기에 소련에 의존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필요했다. 이 시기의 시작부터 중국 국민정부군은 만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됐다면 김일성은 앞문에는 호랑이가, 뒷문에는 늑대가 있는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의심할 필요 없이 장제스와 이승만은 거슬리는 뾰루지를 짜듯 북한을 압박하려고 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몇 년 또는 수십 년 더 산속에서 유격대 투쟁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48~1949년 중공군과 북한군이 국민정부군을 중국 동북 지역에서 몰아내면서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제 짜낼뾰루지처럼 보인 것은 남한이었다. 마오쩌둥의 승리는 북한의 상황을 극적으로 바꿨고, 소련에 대한 요구 수준 또한 높였다. 이제 동북아시아는 현지의 거대한 공산군에게 지배됐다. 스탈린은 그것을 대단히 복잡한 심정으로바라봤을 것인데, 현지 정권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것 외에는 어떤 시도도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 P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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