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성으로 가는 길에서 죄의 양의성 그 한쪽에는 육체와 연결된 탐욕의 이질성이 항상 내재해 있다.

내면의 탐욕이 밖으로 투사되어 판단하는 의식이 될 때 종교가 지닌 성스러움의 특징은 도덕과 응보의 논리로 전환된다.

아브젝시옹의 신비적 특성은 무한한 희열의 원천이 된다. 그런데 이 희열은 신비가 말해짐으로써 가능하다. 꿈과 같은 그리스도교적인 신비주의 속에서, 주체는 절대 타자인 신과 타자들과의 의사소통으로 이루어지는 담론 속에서 이 희열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긋지긋한 종교 재판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예술은 죄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함과 동시에 내면으로부터 삶의 기회를 부여해왔다고 그는 말한다. 환희의 표적으로서 예술의 넘쳐남이 그림·음악·말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는 유대 사회가 금한 부정한 것과 연관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음식물에 대한 터부를 범한다든가, 이교도와 같이 식사를 한다거나, 아니면 문둥병 환자에게 말을 붙이거나 몸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공격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적은 한편으로 차이를 새롭게 배치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의미의 체계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는 아브젝시옹이 더 이상 외부가 아님을 드러낸다. 위협적인 아브젝시옹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 속에서 재배치된다. 예수는 유대 사회에서 거부된 아브젝시옹을 내부로 내면화한다.

바리새인들에게 위협적인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비난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율법주의와 외식하는 행동을 질책했다. 그들이 만약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유대 사회의 전통적인 율법을 따른다면, 위협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지 않는 마음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부정한 것은 이제 마음속에 있는 까닭이다.

유대 사회에서 이교도적인 다산의 어머니는 그리스도교가 새로이 도달하고자 하는 상징 관계를 여는 조건이다. 한마디로, 차이를 새롭게 배치하고 새로운 의미를 도정시키는 체계의 시작이 어머니와 음식물에 대한 개방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크리스테바가 제시하는 암시적인 근거는 마가복음의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친 사건이다. 음식물을 매개로, 딸과 그 어머니를 화해시킨 후에 그리스도가 행한 행적은 귀먹고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친 것이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마가복음 7:33~35)

마음속의 더러움 곧, 내면화된 아브젝시옹은 정신분석 과정 중에 있는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데가 있다. 그 핵심은 분열과 투사이다. 이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설명을 다시 살펴보면, 생의 초기부터 유아는 대상들을 지각하고 그것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좋은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그렇게 되기를 시도하는 것이고, ‘나쁜 것’은 자신의 세계에서 제거하고 자신 바깥에 위치시키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방출 행위는 내면화된 대상들을 내쫓는 동시에 그것들을 외부 세계에 투사한다. 따라서 외부 곧, 바깥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아브젝트로서 추방된 주체가 아브젝시옹을 내재화시켜 말하는 주체로 서게 되는 메커니즘을 성서에서 찾아 풀어 말하면, 부정한 음식에 대한 두려움의 기원에는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최초 대상(나쁜 젖가슴)에 의한 공포가 있다. 그 최초 대상의 결핍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은 그 대상을 삼키고 없애버리려는 구강기 충동과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좋은 젖가슴에 의한 만족은 자아의 파괴적 본능을 잠재울 수 있다. 원초적 환상의 차원에서 보면, 좋은 젖가슴이라는 구강적인 만족이 죽음 충동을 극복하게 하는데, 사회적으로는 음식물 대신 기호가 결핍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를 상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브젝트의 정신화, 내재화와 연결된다. 종국에는 자아 속의 욕구 불만과 타자를 향한 살해 본능은 그리스도의 몸(성체)을 먹음으로써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행위(성찬식) 기호 속에 녹아든다. 찢기고 삼켜지는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나의 육신도 소멸하면서 아브젝시옹도 사라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王莽은 漢나라의 承平(太平)한 基業과 府庫·百官의 풍부함을 인습하여여러 오랑캐들이 복종하고 천하가 편안하였다. 이 하루아침에 이를 소유하니, 그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하여 漢나라의 제도를 협소하게 여기고는다시 크게 넓히고자 하여 마침내 말하기를 "옛날에 한 지아비가 백 묘를 경작하고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었으나 나라가 넉넉하고 백성들이 부유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일어났는데, 秦나라가 聖人의 제도를 파괴하여 井田法을폐지하니, 이 때문에 한 사람이 田地를 兼하는 폐단이 일어나며 탐욕스럽고 비루한 자들이 생겨나서, 강한 자는 전답을 소유한 것이 千으로 헤아리고약한 자는 일찍이 송곳을 꽂을 자리조차 없게 되었다. 漢나라는 농지의 조세를 경감하여 3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었으나 항상 그 밖에 다시 걷는 세금이 있어서 늙고 병든 자들이 모두 나오고, 豪族들이 침해하고 능멸해서 가난한 자들은 부자의 전답을 부쳐 먹고 부자는 도지세를 받아가니, 명목상으로는 3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둔다고 하나 실제는 10분의 5를 세금으로 거두었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는 개와 말에게 곡식과 콩을 먹이고도 남아서 교만 - P181

하여 간사한 짓을 하고, 가난한 자는 술지게미와 겨도 배불리 먹지 못해서곤궁하여 간악한 짓을 하여, 모두 죄에 빠져서 형벌이 이 때문에 폐지되지못하였다. 지금 천하의 田地를 명칭을 바꾸어 王田이라 하고 노비를 私屬이라 하여 모두 매매하지 못하게 하고, 남자의 숫자가 여덟 명 미만이면서 田地가 1井(9百畝)을 넘는 자는 남는 토지를 나누어 주어 九族과 隣里와 鄕黨에 주게 하며, 감히 聖人의 제도인 井田法을 비난하여 법을 무시하고 대중을미혹시키는 자가 있으면 四(사방 먼 곳)로 귀양 보내어 魁魅(도깨비)를 막게 하라."하였다. - ≪漢書 王莽傳≫ - P1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장

‘터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성스러운 희생물이 혐오스러운 것으로 변형될 때 저 깊은 곳으로부터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죽이고 싶은 욕망을 잠재운다는 것이다. 이때 종교는 더 이상 희생제의의 종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희생제의의 성스러움을 혐오의 체계가 대신하기 때문이다.

차이와 분리를 유지시키는 혐오체계는 유일신을 유지시키는 방편이 된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신성시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유일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도 성스러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들과 나머지는 모두 가증스럽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성서 속에 나타나는 더러움의 전통은 어머니나 여성의 재생산하는 모성적인 기능이 종교사적으로 주체의 동일화 과정 속에 뿌리 내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타자인 여성과 여성의 수태 능력이 위협적인 힘으로 감지되면서 그 힘을 부정에 집중시켜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성서는 여성이 가진 자연적인 힘을 사회질서의 상징체계 속에 강제적으로 복속시켰다.

신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삶과 죽음, 식물과 동물, 육체와 피, 건강과 질병, 이질성과 근친상간 같은 내용을 모두 포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러한 대립이 지닌 의미론적 가치에 입각해서 대략 세 가지 혐오스러운 것의 범주를 도출할 수 있다. 1) 음식물에 대한 터부, 2) 육체의 노쇠와 그것의 절정인 죽음, 3) 여성의 육체와 근친상간이다.

‘터부’는 폴리네시아어인데, 이 말은 라틴어 ‘사케르’sacer, 고대 그리스어 ‘아고스’agos 히브리어 ‘카데쉬’Kadesh로 번역 가능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터부’의 의미는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을 지향한다. 한편으로는 ‘신성한’heilig, ‘성별(聖別)된’geweiht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분 나쁜’unheimlich, ‘위험한’gefahrlich, ‘금지된’verboten, ‘부정한’unrein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터부를 공평하게 설명하기 위해, 『브리태니커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을 인용한다. "엄밀하게 보자면 터부에 포함되는 것은 (a) 사람 혹은 사물의 신령한(혹은 부정한) 성격, (b) 이 성격으로부터 발생한 일종의 금제, (c) 그 금제를 범할 경우에 발생하는 신성(혹은 부정)뿐이다.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반대말은 ‘노아’인데, 이 말은 ‘일반적인’ 혹은 ‘평범한’의 의미를 지닌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터부는 정/부정을 구별하고 그 대립의 여러 형태와 차이들을 만든다.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나누는 터부를 통해 인간은 성스러운 법칙에 참여하고, 또 그 법칙을 유지시킨다. 일반적으로 터부는 인접하거나 유사한 속성을 차용해 전체를 표현하는 환유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방과 마루의 경계인 문지방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서 밟으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때 문지방에 대한 터부는 경계라는 속성이 환유적으로 차용된 것이다. 터부의 환유적인 질서가 교란되었을 때 그로 인해 부정해진 것을 정화하는 것이 희생제의이다. 여기서 희생제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이질적인 의미 사이에서 작용하면서 서로를 결합시킨다. 이러한 희생제의는 은유적 방식으로 작용한다. 은유는 부재를 표현하는 비유법인데 가령, ‘내 마음은 호수’라고 할 때 내 마음은 호수가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 없는 호수를 통해 마음 상태를 표현한다. 희생 제물이 되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을 대신해서 희생되기 때문에 부재를 이용한 은유적 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살생하지 말지니라’라는 인간과 신 사이의 최초 계약에 뒤이어 나타난 근본적인 대립(식물/동물, 살/피)이 이후에 논리적 대립체계 전체가 되었다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이러한 대립체계는 대홍수 후에 노아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해서 번제로 드리는 것과는 구분되는 혐오체계를 형성한다. 처음에 의미론적으로 삶/죽음의 이분법으로 지배되던 체계는 마침내 차이의 약호code 체계로 바뀐다.

음식물에 대한 혐오는 풍요한 여성의 육체나 출산능력에 뒤따르는 혐오와 유사하다. 음식물에 대한 금지는 분리의 과정에서 가장 근본적인 차폐막을 제공한다. 따라서 장소-피lieu-sang라는 장치와 차이들의 말-논리parole-logique라는 장치가 ‘말하는 존재’를 신과 분리되게 할 수 있는 근원은 이 풍요의 어머니일 것이다. 이런 경우 분리란 어머니의 환상적인 힘으로부터의 분리와 같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힘으로부터 분리되어, 말하는 주체로 서는 것이다. 이 시원적인 대모신(代母神)은 종교사에서 실제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다신교와 싸우는 한 민족의 상상 속에 나타난다. 그리고 각자의 개인사 속에서 환상적인 어머니에게 속하는 이 심연은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의미화할 수 있는 독립된 장소lieu와 다른 대상objet을 구축해야 한다. 풀어 말해, ‘말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의 비분리 상태로부터 벗어나 어머니를 대체할 다른 대상을 찾아야 한다.

크리스테바가 보기에, 문둥병에 대한 혐오는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것 즉, 혼합된 것, 동일성을 교란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과 같은 논리를 취한다. 나아가 출산과 월경을 경험하는 모성적 육체의 오염과 연결된다. 출산의 경험과 관련해서, 육체 내에서 생명을 배태해서 밖으로 내보내는 행위는 마치 피부에 물질적인 흔적이 계속되는 것과 같이 불결하다. 기한이 차서 몸 밖으로 강제적으로 내보내는 출산 행위에서 태아는 문둥병의 현실과 만난다.

최초 인류가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후에 아담은 자기 아내에게 ‘하와’(Eve)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이름의 뜻은 ‘생명(living)’으로, "그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창세기 3:20)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타락 전 낙원에서의 영원한 삶에는 이름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저주를 받고 추방되면서 하와는 생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부정한 것은 말씀 자체로부터 나온다. 즉, 고유한 자기 동일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면인 부정은 말씀을 거역하는 마음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예언서에 나타나는 혐오는, ‘말하는 존재’l’etre parlant의 악마적인 내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언서에서 볼 수 있는 아브젝시옹은 음식물과 배설물 등의 오물에서 여호와의 말씀 속으로 옮겨간 듯하다. 그러나 레위기서부터 줄곧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는 아브젝트들의 핵심에는 분리되지 않은 모성적 육체에 대한 혐오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학자들은 더러움을 대하는 두 가지 관점이 성서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더러움에 대한 성서의 첫 번째 관점은 부정(不淨)을 신의 뜻에 위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1) 두 번째 관점은 부정이 성스러움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을 나타낸다는 것이다.2) 이 해석에 따르면, 부정함은 성스러움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써 사탄적인 힘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성서에는 번제(燔祭) 동안 희생제의와 혐오스러운 것 사이를 벌려 놓기도 하고, 서로 결합시키기도 하는 두 기류가 존재한다. 여기서 혐오스러움과 성스러움, 살생과 희생제의가 함께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장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不淨)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흐름으로나누어진다. 첫번째는 로버트슨 스미스(《셈족 종교에 관한 강의》, 1889)의 해석으로서, 부정이란 신의 뜻에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성서》의 부정을 운명적인 의지에 복종하는 유대 유일 신앙에 나타나는 내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바루크 A. 레빈‘에 따른 또 하나의 해석은 부정은 성스러움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의 지표이다. 그에게 부정함은 성스러움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악의 정신의 자율적인 힘과 같은 것이다. - P143

인류학자 더글러스는 관찰 대상이 되는 사회를 연구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사회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 반면 종교사가 노이스너는,히브리 유일 신앙의 기념비적인 혁명으로 만들어진 율법으로 정/부정의 대립을 제시하고, 이 율법은 자체로도 충분히 고립된 것으로 축복받은 질서인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가-기호학자가 제기하는 질문은 의식적인 부정을 어느 선까지 분석할 수 있을까 아는 데 있다. 이때 종교사가(노이스너)는 재빨리 멈추어 선다. 반면 인류학자(더글러스)는, 자연의
‘혐오스러움‘ 에 바탕을 둔 것은 문화적으로 부정하다는 사실 앞에 그 둘을 연계시킴으로써 전진한다. 그 자체로 ‘혐오스럽다는 것은, 주어진 상징 체계라는 고유한 계급화의 질서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해서 제기된다. 왜 상징 체계에는 계급 체계가 있는데 다른 것에는 없는가? - P145

정/부정의 배치는 유대교가 스스로를 정립하기 위해 이교도와 그들의 모성 숭배적인제사 의식에 대항하여 치러야 했던 치열한 싸움의 증언이다. 정/부정의 배치는 또한 각 개인의 생활 속에서도 주체가 스스로 분리하는 투쟁을 종결한다. 말하자면 말하는 주체나 법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따라 내내 벌여야 하는 투쟁을종결짓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를 구획짓는 정/부정의 대립이라는 ‘물질적인‘ 의미소는 원초의 물질적인 관습을 다시 취하는 신성한 금지의 은유뿐만 아니라, 동일성이라는 상징적법칙의 탄생에 대한 주체의 경제(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한 것이다. - P148

《성서》에서 말의 논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살생치 못하도록 금하는 것과 공외연적인 인간과 신의 차이에 관한 논리에 근거한다. J. 솔레르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성서》에서의 말의 논리는 <신명기> 제14장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이 육식 동물을 먹지 않도록 하는 논리의 장을 구축하는 것과 관련된다. 육식 생활은 하지만 육식 동물이나 맹금류와 동화되지 않고, 살생 행위도 예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한 가지의 판별 기준만이 남게 된다. 즉 새김질하는 초식 동물만을 먹는 것이다. - P153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아이를 낳으면, "제8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陽皮)를 벨 것이다."(<레위기> 제12장 3절)이 할례 의식은부정을 분리시키는 동시에,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불결함을분리하는 수단인 것이다. 할례는 희생 제의를 대신하는데, 그것은단순히 교체된다라고만은 할 수 없고 희생 제의와 동등한 것, 바꾸어 말하면 신과의 계약 증거가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할례는 음식물에 대한 터부와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은 분리를 각인하는 동시에, 그 속에 분리의 흔적이 나타나는 희생 제의를 절약한다. - P155

어머니의 육체나 출산을 상기시키는 것은, 어머니 내부의 물질들이 육체를 분리시키려는 난폭한 축출 행위로 인해 끌어내어진, 태어나는 육체에 다름 아닌 출생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그런데 피부에는이 물질들의 흔적이 계속되는 것 같다. 그 박해하고 위협하는 물질의 흔적들을 가로질러 더 이상 영양을 공급하지 않고 피해만을주며 조여 오는 태반 속에서 태어난 육체의 환상은, 문둥병의 현실과 만난다. 한 발자국 더, 우리는 그녀와 더불어 전(前)오이디푸스기의 동일화 과정이 참을 수 없는 것이 되는 어머니를 다시 한번 힘차게 밀어낸다. - P157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은, 상징체계라는 조건이나 계약에 대해서 분리될 수 없는 내재성이다. 따라서 이전의 텍스트에서의 음식물에 대한 혐오를 이후의 예언자들이 변화시켰다고 해도,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이 ‘사악한 권력의현실 형태‘21)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분리하는 요소를 지닌 신성한 성전과 말씀 자체가, 예언자들에게는 고유함이나 자기 동일성과 뗄래야 뗄 수 없이 병행하는 ㅡ 내버릴 수 없는 가치를 가진 부정인 것이다. - P164

상징적이거나 또는 사회적인 계약으로서의희생 제의에 대한 개념을 추월하라고 꼬드기는 것은, 바로 혐오의체계를 강조하는 《성서》 자체라는 점이다. "살생하지 말라"가 아니라 금지나 계율을 준수하지 않으면 어떠한 희생(犧牲)도 드릴 수없는 것이다. 〈레위기 > 제11장은 음식물에 관한 모든 터부의 규칙을 통해 이같은 견해를 보다 분명히 한다. 그 결과 성스러움과 정결의 법칙에 따라야만 희생 제의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법칙이란 무엇인가? 속인인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희생 제의를 제약하는 것이다. 법칙이란, 말하자면 죽이려는 욕망을 가장한 것, 하나의 분류 체계에 불과하다. - P1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홈 스위트 홈 - 2023년 제4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최진영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내 문학 수상작 작품집을 오랜만에 읽었다. 2021년 이효석 문학상 수상집에서 이서수라는 작가를 알게된 수확이 있었으나 이후 문학상 수상집은 더 읽지 않았다. 한국 소설은 거듭하여 읽으면 비슷한 서사에 상황들이 반복되어 쉬이 질리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이 책의 전반적인 수준이 괜찮다는 후기를 보고 찜해 두고 있었는데 해를 지나 읽게 되었다. 


역시 사람들의 눈은 다르지 않았는데 나도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괜찮았다. 



대상작 주인공인 최진영은 이름은 익숙한데 작품을 경험해본 적은 없었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였다는 것을 알았고 책에 실린 작가의 글 속에서도 기억의 패턴들이 나로 하여금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살아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죽음 자체로 두기 위해 오래 바라볼수록 두려움보다 슬픔이 커졌다. 두려움은 막연했으나 슬픔은 구체적이었다. 거기 나의 희망이 있었다. - P26


말기 암에 걸린 나는 보령에 폐가를 수리하여 이사를 하려고 한다. 엄마는 몸도 아픈데 왜 굳이 그런 곳에서 살려고 하는지 나의 마음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죽어가는 지금, 나는 불안한 미래를 직시하며 바라본다. 두려움과 슬픔은 다르다. 적어도 슬프다는 것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명징성을 갖고 있다. 거기에 희망을 느끼는 나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울컥했다.


시간은 발산한다.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는 여기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언가가 폭발하여 사방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한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뿐. 미래는 어딘가에 있다. 쉽사리 볼 수 없는 머나먼 곳에. 나는 종종 과거와 미래를 헷갈리는 것만 같다. 과거의 일이라고 기억하는 상황을 현재에 그대로 겪을 때가 있으며 미래의 일을 짐작하여 이야기하면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않았느냐는 대꾸를 듣는 경험들. 인류가 동시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을 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혼란에 빠질까? 누군가는, 아주 찰나일지라도, 평생 경험한 적 없는 엄청난 자유를 실감할지도 모른다. 출생과 죽음, 성장과 노화, 발생과 소멸을 시간이란 개념 바깥에서 이해하고 싶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듯 바뀌어 달라지는 것. 시간을 배제하고 변화를 말할 수 있을까. 죽음 다음이 있다면, 어쩌면, 시간에서 해방된 무엇 아닐까. - P15


그곳에 살았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과거의 사람이 남기고 간 물건은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과거와 비슷한 상황의 일을 겪으면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특히나 잊어버리고 싶었던 기억을 또 마주하는 순간 지금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 아득해진다. 그럴 때는 주저앉아 잠시 그런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미래에 또 그런 순간이 올까,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그 시간을 견디고 살아낸다.


우수상 작품들도 대부분 훌륭했는데 나는 그 중 특히 김기태의 <세상 모든 바다>, 이장욱의 <크로캅>이 좋았다.



<세상 모든 바다> 에서는 지금은 대세가 된 K-POP 그룹의 공연장을 찾은 팬인 자이니치 '하쿠'와 한국인 '백영록'의 교류(연대)를 보여준다. 하쿠의 부모는 자이니치 3세대이고 본인은 일본 국적을 취득했지만 유학생으로 서울에 왔다. '하쿠'는 '백'이라는 성을 일본식으로 음독한 성이라고 하니 백영록과의 만남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필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방탄소년단이 기점이었을 것 같은데 가수 뿐 아니라 아이돌 팬들이 세계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며 기부를 하기도 하는 등 긍정적인 활동들을 하는 것 말이다. 세모바(SMB)의 멤버들도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원전을 반대하며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발전해야 생존한다는 절박감으로 군청 앞에서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건네며 원전 반대 무효를 이야기한다. 하쿠는 이 두 가지 상황에 부딪쳤을 때 피하고 뒷걸음질쳤다. 나는 과연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며 행동할 수 있을까 묻게 되었다.


그 사정에서 나의 몫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큼지막한 파도 하나가 방파제에 부딪쳤다. 하얀 물보라가 세차게 튀어 올랐다.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각. 실제로 닿았을까. 느낌뿐이었을까. 분명한 건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는 것이다.



<크로캅>은 결말까지 멈출 수 없는 흡인력 있는 이야기였다. 아마 재미만으로 따지면 이 작품이 최고일 것이다. 격투기 링 위에 선 두 남자가 사투에 가까운 격투를 벌인다. 나는 수비자일까, 공격자일까. 입장의 차이에 따라 나는 수비자가 되기도 하고 공격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경기장 밖의 일상에서도 혼란을 겪고 있다. 


마스크를 쓴 유령을 본 적이 있는가. 유령처럼 그자는 스르르 걸어다닌다. 표정도 없이 걸어다닌다. 계단으로 걸어 다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고 거리를 휘적휘적 돌아다닌다. 원한을 품은 자답게, 당신을 노리는 자답게, 당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자답게, 당신의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하이에나가 사체 주위를 배회하듯이, 독수리가 죽어 가는 동물의 머리 위를 선회하듯이. - P201


나는 상대방을 공격자이자 침입자로 규정하고 행동한다. '그는 나를 죽일지 몰라. 그럼 어쩌지?' 루쉰의 광인일기가 오버랩되기도 했다. 나는 창문에 창살을 설치하고 보안 장치를 달며 방비를 한다. 그런데 그런다고 완벽할까? 완벽한 시스템이라는 것은 없을텐데. 마음만 먹으면 이 혼란한 세상에서 내가 온전히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나를 공격하는 이는 윗집이자 과거 같은 회사에 다녔던 동료였던 사람이다. 그들은 왜 철천지 원수가 되었을까. 


윗집.

적의 집.

동료였으므로 더욱 가증스러운 자의 집.

당신을 적의와 증오와 분노의 나락으로 빠뜨린 자의 집.

(...)

혼자 정의로운 척, 혼자 외로운 척, 혼자 개폼을 잡고 술잔을 비운 뒤에, 그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 아.... 이 새끼가.... 저주받을 새끼가.... 왜 그렇게 생각이 없다.... - P221~222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박서련의 <나, 나, 마들렌>이다. 


목이 잘리는 꿈을 꾸고 일어나서 옆을 보니 내가 있었다? 어느 쪽이 원본일까? 나인가? 나를 쳐다보는 그 사람인가? 아무튼 그 때 마들렌은 옆에 없었다. 마들렌은 소설 창작 수업에서 처음 만난 친구다. "나 언니네 집에 가면 안 돼요?" 하더니 내 집에 눌러앉은 마들렌. 마들렌은 소설가에게 성추행을 당해 그를 고소했고 재판이 열렸다. 마들렌은 나에게 증언을 요청하는데...


가끔 내가 둘 이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많은 일을 하고 싶은데 몸은 하나라서 해낼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을 때다. 그런데 내 몸이 둘 이상이라면 나는 과연 같은 생각을 지닌 인간일까? 같은 인물이 다른 장소에서 각각의 일을 한다니... 


소설가의 성추행 이야기를 보면서는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가 생각났다. 거기서 수영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그녀는 IT 회사에서 일하며 회사 오너의 요구에 따라 성인 웹툰을 그리고 있다. 가면 갈수록 가학적인 말도 안되는 스토리와 그림을 그리라는 요구에 원형탈모증까지 겪어가며 꾸역꾸역 일을 해나간다. 작품에는 육체적인 접촉이 나오지는 않지만 왠지 그게 있을 것 같아서 불쾌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돈과 권력, 지위를 이용해 상대를 누르는 행위는 너무나 흔한 일이지만 이것이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되면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돈이냐, 예술이냐.


나는 나를 향해 결심에 찬 눈빛을 보냈다. 나 역시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결의를 표했다. 이것 말고는 역시 방법이 없는 걸까. (...) 나는 싱크대 하부 장을 열어 식칼을 꺼내와 나와 나 사이에 내려놓았다. 나와 나는 식칼을 가운데 두고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곧 또 하나의 내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 P16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4-01-18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 님의 문학 리뷰, 제가 왜 반갑고 좋은 걸까요? ㅎ
김기태의 <세상 모든 바다>가 급 궁금해지고요!

거리의화가 2024-01-18 11:34   좋아요 0 | URL
ㅎㅎ 오랜만에 문학 읽기를 시도해봤습니다. 그래도 한국 소설은 주변의 이야기라 공감이 더 가서 읽기에 편한 것 같아요. 외국 소설은 너무 어렵습니다ㅋㅋ
김기태의 작품 좋았어요. 심지어 등단한지 얼마 안되었던데(2022년 신춘문예) 놀라웠어요!^^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