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터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성스러운 희생물이 혐오스러운 것으로 변형될 때 저 깊은 곳으로부터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죽이고 싶은 욕망을 잠재운다는 것이다. 이때 종교는 더 이상 희생제의의 종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희생제의의 성스러움을 혐오의 체계가 대신하기 때문이다.

차이와 분리를 유지시키는 혐오체계는 유일신을 유지시키는 방편이 된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신성시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유일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도 성스러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들과 나머지는 모두 가증스럽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성서 속에 나타나는 더러움의 전통은 어머니나 여성의 재생산하는 모성적인 기능이 종교사적으로 주체의 동일화 과정 속에 뿌리 내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타자인 여성과 여성의 수태 능력이 위협적인 힘으로 감지되면서 그 힘을 부정에 집중시켜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성서는 여성이 가진 자연적인 힘을 사회질서의 상징체계 속에 강제적으로 복속시켰다.

신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삶과 죽음, 식물과 동물, 육체와 피, 건강과 질병, 이질성과 근친상간 같은 내용을 모두 포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러한 대립이 지닌 의미론적 가치에 입각해서 대략 세 가지 혐오스러운 것의 범주를 도출할 수 있다. 1) 음식물에 대한 터부, 2) 육체의 노쇠와 그것의 절정인 죽음, 3) 여성의 육체와 근친상간이다.

‘터부’는 폴리네시아어인데, 이 말은 라틴어 ‘사케르’sacer, 고대 그리스어 ‘아고스’agos 히브리어 ‘카데쉬’Kadesh로 번역 가능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터부’의 의미는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을 지향한다. 한편으로는 ‘신성한’heilig, ‘성별(聖別)된’geweiht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분 나쁜’unheimlich, ‘위험한’gefahrlich, ‘금지된’verboten, ‘부정한’unrein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터부를 공평하게 설명하기 위해, 『브리태니커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을 인용한다. "엄밀하게 보자면 터부에 포함되는 것은 (a) 사람 혹은 사물의 신령한(혹은 부정한) 성격, (b) 이 성격으로부터 발생한 일종의 금제, (c) 그 금제를 범할 경우에 발생하는 신성(혹은 부정)뿐이다.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반대말은 ‘노아’인데, 이 말은 ‘일반적인’ 혹은 ‘평범한’의 의미를 지닌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터부는 정/부정을 구별하고 그 대립의 여러 형태와 차이들을 만든다.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나누는 터부를 통해 인간은 성스러운 법칙에 참여하고, 또 그 법칙을 유지시킨다. 일반적으로 터부는 인접하거나 유사한 속성을 차용해 전체를 표현하는 환유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방과 마루의 경계인 문지방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서 밟으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때 문지방에 대한 터부는 경계라는 속성이 환유적으로 차용된 것이다. 터부의 환유적인 질서가 교란되었을 때 그로 인해 부정해진 것을 정화하는 것이 희생제의이다. 여기서 희생제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이질적인 의미 사이에서 작용하면서 서로를 결합시킨다. 이러한 희생제의는 은유적 방식으로 작용한다. 은유는 부재를 표현하는 비유법인데 가령, ‘내 마음은 호수’라고 할 때 내 마음은 호수가 아니지만 내 마음속에 없는 호수를 통해 마음 상태를 표현한다. 희생 제물이 되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을 대신해서 희생되기 때문에 부재를 이용한 은유적 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살생하지 말지니라’라는 인간과 신 사이의 최초 계약에 뒤이어 나타난 근본적인 대립(식물/동물, 살/피)이 이후에 논리적 대립체계 전체가 되었다고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이러한 대립체계는 대홍수 후에 노아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해서 번제로 드리는 것과는 구분되는 혐오체계를 형성한다. 처음에 의미론적으로 삶/죽음의 이분법으로 지배되던 체계는 마침내 차이의 약호code 체계로 바뀐다.

음식물에 대한 혐오는 풍요한 여성의 육체나 출산능력에 뒤따르는 혐오와 유사하다. 음식물에 대한 금지는 분리의 과정에서 가장 근본적인 차폐막을 제공한다. 따라서 장소-피lieu-sang라는 장치와 차이들의 말-논리parole-logique라는 장치가 ‘말하는 존재’를 신과 분리되게 할 수 있는 근원은 이 풍요의 어머니일 것이다. 이런 경우 분리란 어머니의 환상적인 힘으로부터의 분리와 같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힘으로부터 분리되어, 말하는 주체로 서는 것이다. 이 시원적인 대모신(代母神)은 종교사에서 실제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다신교와 싸우는 한 민족의 상상 속에 나타난다. 그리고 각자의 개인사 속에서 환상적인 어머니에게 속하는 이 심연은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의미화할 수 있는 독립된 장소lieu와 다른 대상objet을 구축해야 한다. 풀어 말해, ‘말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의 비분리 상태로부터 벗어나 어머니를 대체할 다른 대상을 찾아야 한다.

크리스테바가 보기에, 문둥병에 대한 혐오는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것 즉, 혼합된 것, 동일성을 교란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과 같은 논리를 취한다. 나아가 출산과 월경을 경험하는 모성적 육체의 오염과 연결된다. 출산의 경험과 관련해서, 육체 내에서 생명을 배태해서 밖으로 내보내는 행위는 마치 피부에 물질적인 흔적이 계속되는 것과 같이 불결하다. 기한이 차서 몸 밖으로 강제적으로 내보내는 출산 행위에서 태아는 문둥병의 현실과 만난다.

최초 인류가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후에 아담은 자기 아내에게 ‘하와’(Eve)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이름의 뜻은 ‘생명(living)’으로, "그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창세기 3:20)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타락 전 낙원에서의 영원한 삶에는 이름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저주를 받고 추방되면서 하와는 생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부정한 것은 말씀 자체로부터 나온다. 즉, 고유한 자기 동일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면인 부정은 말씀을 거역하는 마음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예언서에 나타나는 혐오는, ‘말하는 존재’l’etre parlant의 악마적인 내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언서에서 볼 수 있는 아브젝시옹은 음식물과 배설물 등의 오물에서 여호와의 말씀 속으로 옮겨간 듯하다. 그러나 레위기서부터 줄곧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는 아브젝트들의 핵심에는 분리되지 않은 모성적 육체에 대한 혐오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학자들은 더러움을 대하는 두 가지 관점이 성서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더러움에 대한 성서의 첫 번째 관점은 부정(不淨)을 신의 뜻에 위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1) 두 번째 관점은 부정이 성스러움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을 나타낸다는 것이다.2) 이 해석에 따르면, 부정함은 성스러움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써 사탄적인 힘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성서에는 번제(燔祭) 동안 희생제의와 혐오스러운 것 사이를 벌려 놓기도 하고, 서로 결합시키기도 하는 두 기류가 존재한다. 여기서 혐오스러움과 성스러움, 살생과 희생제의가 함께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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