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성으로 가는 길에서 죄의 양의성 그 한쪽에는 육체와 연결된 탐욕의 이질성이 항상 내재해 있다.

내면의 탐욕이 밖으로 투사되어 판단하는 의식이 될 때 종교가 지닌 성스러움의 특징은 도덕과 응보의 논리로 전환된다.

아브젝시옹의 신비적 특성은 무한한 희열의 원천이 된다. 그런데 이 희열은 신비가 말해짐으로써 가능하다. 꿈과 같은 그리스도교적인 신비주의 속에서, 주체는 절대 타자인 신과 타자들과의 의사소통으로 이루어지는 담론 속에서 이 희열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긋지긋한 종교 재판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예술은 죄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함과 동시에 내면으로부터 삶의 기회를 부여해왔다고 그는 말한다. 환희의 표적으로서 예술의 넘쳐남이 그림·음악·말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는 유대 사회가 금한 부정한 것과 연관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음식물에 대한 터부를 범한다든가, 이교도와 같이 식사를 한다거나, 아니면 문둥병 환자에게 말을 붙이거나 몸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공격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적은 한편으로 차이를 새롭게 배치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의미의 체계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는 아브젝시옹이 더 이상 외부가 아님을 드러낸다. 위협적인 아브젝시옹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 속에서 재배치된다. 예수는 유대 사회에서 거부된 아브젝시옹을 내부로 내면화한다.

바리새인들에게 위협적인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비난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율법주의와 외식하는 행동을 질책했다. 그들이 만약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유대 사회의 전통적인 율법을 따른다면, 위협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지 않는 마음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부정한 것은 이제 마음속에 있는 까닭이다.

유대 사회에서 이교도적인 다산의 어머니는 그리스도교가 새로이 도달하고자 하는 상징 관계를 여는 조건이다. 한마디로, 차이를 새롭게 배치하고 새로운 의미를 도정시키는 체계의 시작이 어머니와 음식물에 대한 개방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크리스테바가 제시하는 암시적인 근거는 마가복음의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친 사건이다. 음식물을 매개로, 딸과 그 어머니를 화해시킨 후에 그리스도가 행한 행적은 귀먹고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친 것이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마가복음 7:33~35)

마음속의 더러움 곧, 내면화된 아브젝시옹은 정신분석 과정 중에 있는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데가 있다. 그 핵심은 분열과 투사이다. 이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설명을 다시 살펴보면, 생의 초기부터 유아는 대상들을 지각하고 그것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좋은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그렇게 되기를 시도하는 것이고, ‘나쁜 것’은 자신의 세계에서 제거하고 자신 바깥에 위치시키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방출 행위는 내면화된 대상들을 내쫓는 동시에 그것들을 외부 세계에 투사한다. 따라서 외부 곧, 바깥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아브젝트로서 추방된 주체가 아브젝시옹을 내재화시켜 말하는 주체로 서게 되는 메커니즘을 성서에서 찾아 풀어 말하면, 부정한 음식에 대한 두려움의 기원에는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최초 대상(나쁜 젖가슴)에 의한 공포가 있다. 그 최초 대상의 결핍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은 그 대상을 삼키고 없애버리려는 구강기 충동과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좋은 젖가슴에 의한 만족은 자아의 파괴적 본능을 잠재울 수 있다. 원초적 환상의 차원에서 보면, 좋은 젖가슴이라는 구강적인 만족이 죽음 충동을 극복하게 하는데, 사회적으로는 음식물 대신 기호가 결핍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를 상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브젝트의 정신화, 내재화와 연결된다. 종국에는 자아 속의 욕구 불만과 타자를 향한 살해 본능은 그리스도의 몸(성체)을 먹음으로써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행위(성찬식) 기호 속에 녹아든다. 찢기고 삼켜지는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나의 육신도 소멸하면서 아브젝시옹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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