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브루 파우치 브라질 산토스 NY2 디카페인 - 40ml*5ea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8월
평점 :
품절


콜드브루를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브라질 원두를 좋아해서 확인차 샀는데 역시 고소해서 좋았다. 파우치 형태라 들고 다니면서 먹기에도 편하고 콜드브루니까 아주 더운 날 아이스로 마시면 좋다. 먹어보니 역시 우유랑 찰떡궁합인데 저지방우유 말고 생우유 적힌 양보다 적게 해서 마시면 더욱 굿!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오 2023-07-23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지방/무지방우유 넣은 라떼는 라떼가 아니다!! 그 밍밍함 용서못해....

거리의화가 2023-07-24 08:50   좋아요 2 | URL
보통 디카페인은 오후 늦게나 저녁에 먹으니까 저지방 우유를 넣어봤는데 역시 그냥 우유만 못하죠. 역시 라떼는 고소해야!^^

scott 2023-07-24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디카페 좋습니다
자칭 커피 중독자인 저
쌀자루보다 원두 자루를 더 소중히 여기는
제가 인정 ^^

거리의화가 2023-07-24 13:11   좋아요 1 | URL
디카페인 보통은 원두로 시켰었거든요. 제가 아이스를 잘 안 먹다보니까 콜드브루는 좋아하지 않는데(그 특유의 향 때문에) 우유랑 먹으니까 좋네요. 저도 커피 중독자라 줄어드는 원두량이 어마어마합니다!
 

북동부 지역의 군사화는 4세기 진 조정의 남천 이후 수많은 비한족의 정착과 관련이 있었다. - P41

안녹산의 반란 이후에 독립적인 절도사節度使들의 성장은 북동부 지역을 당 조정에 대한 저항의 영구적인중심지로 만들었다. - P42

당 조정에게 중원 평원은 경제적·정치적으로 부차적인 지역이었다. 반면에, 그 지역은 당대에 대단한 문화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 P43

사천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중국 남서부 지역으로서당대에 동남쪽의 양자강 하구 유역만큼의 경제적인 중요성은 없었지만, 티베트(토번)와 남조南沼가 7세기 후반기부터 이 지역에서 발흥하기 시작하면서 중요한 군사적 중심지로 대두하였다. - P44

당대에 남부 지역은 양자강과 그것의 네 갈래 주요 지류의 하천 유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늘날 호북, 호남, 강서, 산서의 진령산맥 남쪽과 안휘 남부, 강소남부, 절강북부가 이에 해당된다. 비록 그 지역은 구릉지였지만,
강수량은 일정량을 유지하였고 호수, 강, 하천들이 풍부하였다. 남부지역은 한랭한 북부 지역에 비해서 곡물 성장 시기가 길어서 보다 긴시간 동안 다모작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우월한 자연 조건으로 인하 - P49

일반적으로 중부 지역에서는 느리게 흐르는강물을 댐으로 막아서 저수지를 만들고 그 물을 수문을 통해서 저수지로부터 작은 수로로 흘려보내서 그 후에 중력의 작용을 통해서 경작지로 흘러가도록 하였다. 양자강 유역에서는 반대로 과잉의 물을 인공적으로 조성된 웅덩이나 저수지 속으로 배수시켜서 나중에 필요할 때 빼서 쓸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주로 썼다. - P52

조정의 남동부의 곡식에 대한의존도 증가는 그 지역의 생산성 증가의 또 다른 징조였는데, 이때 남부 지역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곡물을 북부로 보내면서도 남부 지역의 인구들 또한 먹여 살릴 수 있을만큼 생산성이 증가하였다. - P53

북부 지역에서는 강수량이 충분하지 못했기에,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물이 농업용 관개수로로 흘러들어갔다. 따 - P55

라서 많은 물자를 적재한 운반선들을 실어 나를 강에는 훨씬 적은 운하용수만이 공급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부 지역에서 수상 운송은 당대 전반기 내내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제한적인 상황이 초래한 한 가지 결과는 대규모 군사의 이동을 위축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제한적인 수상운송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각각의 도시와 지역이 그 지역의 자체적인 농업 생산에만 의지해야 했다는 점이고, 이는 경제적 전문화(분화)를 제한시켰다. - P56

중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내지는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의 저작으로 추정되는 상서書』「하서夏書」중우공편에서 묘사된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두개의 강 유역 사이에 위치하는 지역을 생산품의 차이에 따라 다시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눈다. ‘구주九州‘라고 하는 이 명칭은 결국 중국 전체를 나타낸다. - P63

한 제국에 의해서 건설된 ‘종속국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기미주들은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역들이었다. 당의 변경 내에거주하는 이들 부족민들은 당에서 직위와 인장을 수여받은 부족장들의 지배를 받았다.
기미주들은 대체로 당과 완전히 이질적인 ‘오랑캐들 사이의 완충국이었다.
기미주들은 특히 정주적인 농경 지역에서 초원 유목 지역으로 넘어가는 생태적인변화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변경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다. - P68

건국 초기 당 조정은 제국 전체에 안정을 회복하는 것과 더불어, 국가의 재정적 지불 능력을 복구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면서, 정부는 세수의 꾸준한 확보를 위해서 국가에서 토지를 분배해 주는 제도인 균전제를 재도입하였다. 이 균전제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지역 행정력이 필요하였고, 당 왕조는 주현제州縣制를 확립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621년에 정부는 통화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은 수대에 화폐의 가치 저하와 위조화폐로 인하여 붕괴되었던 것이었다. - P78

당초반에는 왕조의 군대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닌 세습군호나 외국인 동맹군 또는 외인 용병으로 이루어졌다. - P102

절도사의 직책은 8세기에 다양한 수비 부대와 군대를 한 지역 내에서 편제하고 지휘할 필요에 대비하게 되면서 즉흥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수십 년이 지나자몇몇 절도사는 막대한 경제력을 갖추고 조사위원관이라는 관직을 겸직하였다. 이 직책은 그들에게 그 지역의 민정 행정에 대한 상당한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8세기 중반이 되자 이러한 절도사들은 변경 지역에서 실질적인 지방장관이 되었고 중앙정부의 권위를 위협하는 지역세력의 집중화를 가져왔다. - P106

안녹산이전에 동북 지역의 모든 절도사는 적어도 한 번은 수도 장안에서 대신의 직책을 수행하였고 일반적으로 4년이 넘지 않는 상대적으로 짧은기간만 절도사로 재임하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휘하 장교나사병과 강력한 사적인 유대관계를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서부 변경 지역인 중앙아시아와 티베트 국경의 사령부에서 일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747년 이임보는 모든 절도사직은 이민족 직업군인 출신으로만 채워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 P107

당 왕조는 공식적으로는 귀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특정가문에 대해서 조정에서 가장 높은 관직을 보장해 주고 그들에게 특별한 법적 특권을 부여해 줌으로써 엘리트의 존재를 실제적으로는 인정해 주었다. - P110

당대 법전의 세 가지 특징은 한대의 선례와 구분시켜 주었는데, 귀적인 지위와 비천한 지위 모두를 포함하는 (사회적 지위 그룹에 대한법적 인정, 가족 내 혹은 관료제 내에서의 상대적 지위고하에 근거한처벌의 엄격한 단계적 차이, 직제에 관한 세밀한 법적인 관심이 그것이었다. - P117

당 왕조 초기, 특히 중국 북부 지역에서, 토지 소유, 조세 그리고 부역은 통합된 집합체로서 성인 남자 가장에 중점을 두고 있다. - P120

8세기에 정부는 가구세와 토지세와 같이 두 차례에 걸쳐 약간의 추가적인 조세들을 도입하였는데 이것들은 어느 정도 가구의 부에 따라 징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은 부분적인 영향만이 있었을 뿐이고, 그 제도의 핵심은 여전히 모든 성인 남자가 동일한 토지를 소유하고 그것을 통해서 동일한 세금을 납부한다는 이상에 근거하고 있었다. 고이러한 조세 징수 원칙에서 예외자들이 있었는데, 이 경우는 근거가 부의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특권 사회 계층 그룹에 속했는가의 여부였다. - P1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베트남 전쟁은 1955년부터 시작되어 1975년까지 장장 20 년간 이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한국은 전쟁 기간 중 1964년 한국군 파병을 시작하여 1973년 철수할 때까지 총 4차례에 걸쳐 32만 5천여명을 파병했고 이 가운데 5천여명이 전사했다. 

이 책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고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는 기간을 주요 시기로 다룬다. 이를 통해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게 된 배경과 국내외 전개 상황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이유는 무엇이었나? 주한미군의 규모를 유지함으로써 북한에 대응하는 안보력 약화를 막기 위한 것, 한∙미 동맹에 대한 고려, 미국의 주한미군 및 한국군 감축 정책에 대한 대응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 도덕적 측면을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세계적 차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공헌한다는 것이다(P28).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국내는 반대 시위로 시끄러웠다. 주한 미 대사관은 이 시위로 한국 정부의 전복 가능성을 생각할 정도였고 중국이 핵 실험에 성공하면서 한층 더 위기는 고조되었다. 북한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과 삼각 동맹을 형성하고 여기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다면 자신들을 심히 위협할 거라 예측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수장이 바뀌며(케네디->존슨) 한국 정부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냉전과 안보 위기, 한미동맹에 대한 정치, 군사적 이익이 아니었다면 파병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렇게 총 9년에 걸쳐 이루어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베트남 파병 시기 동안 한국 경제는 국민총생산 연 평균 8퍼센트 이상의 가파른 성장을 기록했다. 전쟁 특수와 이를 통한 경제성장과 산업화는 박정희 정부가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 무렵 징병제가 강화되었고, 주민등록법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이는 국가주의가 통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군 감축을 위한 한국군의 현대화(무기 생산)가 이루어지면서 중공업 육성이 가능해져 한국의 산업 구조는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베트남을 통해 서구의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유입되어 장발이 유행했으며, 미니스커트가 등장했다. 트로트의 인기를 밀어 제치고 통기타 음악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미국과 일본의 전자제품이 유입되었다. 중산층이 생겼으며, 한강 이남의 개발로 부동산 투기가 시작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 질서를 무너지게 했다. 전쟁비 지출이 급증하면서 달러는 더 이상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전쟁 반대 분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고 수정주의가 판을 치며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흐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반전과 수정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미국에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강한 아메리카를 외치게 되었고 일본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들어선 후 극우적인 역사 인식을 내비치면서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이루어졌다. 


미국은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전술로 싸운 전쟁으로 기억한다.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이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경제 발전을 이룬 것처럼 한국도 베트남전쟁을 통해 이룬 경제적 발전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는 동원했던 군인들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고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감행한 일에 대해서 정부는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낼 수 있었던 동력은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참전 군인들의 문제였다. 참전 군인들의 존재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의 어떠한 연구 성과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에서조차 위령비와 증오비를 제외하고는 한국군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다(P339). 둘째로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꿈으로써 한국은 다르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사회는 범죄 행위를 미화하고 숨기는 일본의 극우 세력들과는 다르다. 한국은 지나간 역사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성찰하는 시민사회를 갖고 있다(P340). 


오늘날에도 한국은 견고한 한미동맹을 내세우며 자유주의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의 안보 강화는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참전의 역사를 보면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이 많다고 느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07-22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3 0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07-23 0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반대하고 파병을 반대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힘 있는 나라 눈치를 봐야 한다니... 그 뒤에도 그런 일은 있었네요 베트남 전쟁에 나간 사람 많았네요 한국 정부는 거기 갔다 돌아온 사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을 것 같네요 전쟁이라는 걸 겪으면 힘들 텐데... 그런 걸 생각한 건 얼마 되지 않은 듯도 합니다 한국군이 한 민간인 학살...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3 07:18   좋아요 1 | URL
그 때는 한미동맹이라는 명분도 그렇지만 안팎으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파병을 억지로 강행했다가 맞을 겁니다. 한국군 파병 숫자가 외국군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알고 있어요. 거기서 죽을 고생을 하고 와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고엽제 등의 후유증으로 말도 못할 고통을 겪었을텐데 한국은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가 반드시 있어야겠죠.
 

인간성은 더 이상 단순한 동물적 존재와 자연에 대한 완전한 통제 사이의 과도기적 단계에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진화시킨 동물계 the animal kingdom 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우리 자신의 진화의 방향으로 실제로 주요한 진화상의 도약을 하는 것에 더 가까이 있다. 그러므로 테크놀로지를 촉진하는 관점에서, 혁명적 생태학적 운동은 페미니스트 운동과 같은 목표를 가질 것이다. 그 목표는 인도적인 목적을 위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제하는 것이고, 파괴된 ‘자연적‘ 균형을 대치하기 위하여 인간과 인간이 창조하는 인공적인 환경 사이에 새로운 평형을 확립하는 것이다. - P280

적어도 선택권의 발달은 모성에 관한 고대의 가치를 정직하게 재검토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현재는 여성이 원칙적으로 모성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위험하다. 모성을 반대하는 여성은 자신이 신경질적이고, 비정상적이며, 아이를 혐오하고, 그러므로 ‘부적합하다‘는 것을 덧붙여야만 처벌을 모면할 수있다.("어쩌면 나중에 내가 더 준비가 잘 되었을 때.") 이것은 자유로이 탐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적어도 금기가 해제될 때까지, 자녀를 가지지 않겠다는 결정이나 자녀를 인공적인수단으로 가지겠다는 결정이 전통적인 자녀 출산만큼 정당한 것이 될 때까지, 여성은 여성의 역할을 강요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전통적인 가치체계 속으로 흡수하기 어렵다고 여기는또 다른 과학적 발전은 사이버네틱스 [인공두뇌학cybernetics]*라는새로운 과학의 등장이다. 기계가 창의적인 사고와 문제해결에 있어서 인간과 곧 동등해지거나 인간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 P289

과학의 오용은과학 자체의 가치와 종종 모호해진다. 이런 경우, 그 반응이 그렇게 병적이거나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우리는 그것의 혁명적 중요성을 인식하기보다는 여전히 종종 상상력 없이 기계 자체의 폐단에만 온통 집중한다.

인구조절과 사이버네틱스라는 두 문제는 똑같이 신경과민적이고 피상적인 반응을 낳는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 전례가 없다는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생산과 생식 둘다 인간의 기본적 관계에서 질적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 P290

인구폭발에 관한 관심, 생식에서 :임으로 그 강조점이 전환된 것, 그리고 인공생식의 완전한 발달에 대한 요구는 생물학적 가족의 억압에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사이버네이션은 인간과 일 및 임금과의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노동‘ 활동에서 ‘놀이‘ (그 자체를 위해서 하는) 활동으로 변형시킴으로써, 경제적 능력을 갖춘 가족 단위를 포함하여경제에 대한 전면적인 재정의를 가능하게 할 여지를 줄 것이다.
남자는 땀 흘려 일하고 여자는 고통과 산고를 참아야 하는 이중저주는 처음으로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해소될 것이다. 페미니스트 운동은 20세기의 인류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새로운 생태학적 균형을 받아들이는 문화를 창조한다는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 P292

최근의 피임법들이 개발되기 전에 계속되는 출산은 여성들에게 끊임없는 ‘부인병‘, 조로, 죽음을 가져왔다. 여성은 나머지 절반을 세상에서 종종 지겨운 면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분명히 창조적인 면도 있는ㅡ일을 하도록 자유롭게 해주기 위하여 종족을유지해주는 노예계급이었다.
이러한 자연적인 노동분업은 커다란 문화적 희생을 치러야만계속되었다. 즉, 남성과 여성은 각각 나머지 절반만 발달시켰다. - P293

계급 없는 사회를 성취하려 했던러시아 혁명의 실패는 가족과 성적 억압을 제거하려는 미온적인 시도의 실패라고 추적할 수 있다. 이 실패는 결국 경제적 계급에만 기초한 남성 편향의 혁명적 분석에 대한 한계에서 기인했다. - P301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주의 혁명은 똑같은이유로 실패해왔거나 앞으로도 실패할것이다. 현재의 사회주의하에서는 어떤 최초의 해방이라도 항상 억압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그 이유는 가족 구조가 심리적·경제적·정치적 억압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 P302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서, 개인들에게 통제에 대한환상을 주고 안전성, 쉴 곳, 혹은 따뜻함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제도들은 ‘사적‘인 제도들이다. 종교, 결혼-가족,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정신분석 치료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 P317

독신의 삶은 선택한 직업의 요구사항을 중심으로 조직되는데,
특별한 직업적 구조를 통하여 개인의 사회적·감정적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많은 개인들에게, 특히 과도기에 매력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 P322

‘함께 살기‘는 성이 무엇이든지간에 둘 또는 그 이상의 상대가 내적 역학관계에 따라 다양하게비법적인 성-동반자 합의 기간에 돌입하는 느슨한 사회적 형태이다. 계약은 당사자들 사이에서만 맺어진다. 사회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하다. 그 이유는 생식도 생산-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 의존하는 것도 개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연한 비형식적인 삶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애 대부분을 살아가는 표준단위가 되도록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 P323

‘가구‘는 명시되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람들이 커다란 군집을 이루어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명시된 일련의 대인관계interpersonal relation가 없다. - P3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란 그것을 통해서 정신이 현실의 제약성과 우연성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는 두 양식 간의 역학이고 두 양식의 총합이다.

첫 번째 반응‘에서, 개인은 그 자신의 가능성을 정의하고 창조하기 위하여 현실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주어진현실의 한계를 부정한다. - P252

인위적인 수단에 의해 실현된이상에의 추구를 우리는 미학 양식 the Aesthetic Mode이라 부를 것이다.

문화적 반응에 대한 두 번째 종류에서, 현실의 우연성은 현실적 대안의 창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작용에 대한 지배력을 통해서 극복된다.

현실 자체로부터 추론된 정보의 응용을 통해 현실을 인간의 개념화된 이상에 따르도록 유 - P253

도하는 것을 우리는 테크놀로지 양식 the Technological Modeo이라 부를것이다.

즉 미학적 반응aesthetic response 은 ‘여성의 행동과 부합하는 것이다. 동일한 용어들이 한쪽에 적용될 수 있다. 즉, 주관적이고, 직관적이며, 내성적이고, 갈망하고, 공상적 혹은 환상적이며, 잠재의식(원본)과 관련되어, 감정적이며, 까다롭기까지 하다(신경증적이다). 이에 상응하여, 기술적 반응technological response 은남성의 반응이다. 그것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외향적이고, 현실적이고, 의식(자아)과 관련되어, 합리적이고, 기계적이며, 실용적이고, 실제적이고, 안정되어 있다.

두 문화적 반응들‘남성의‘ 테크놀로지 양식과 ‘여성의‘ 미학 양식-간의 상호작용은 성의 변증법을 또 다른 차원으로 재창조한다. - P254

성의 변증법적 측면에서문화사의 이 오랜 단계는 문명의 모권적 단계에 대응한다. 여전히어둡고, 신비스럽고, 제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자연에 대한경외심에 빠져있는 여성 원리는 The Female Principle* 인간 자신에 의해 격상되고 군림한다.

문화적 휴머니즘의 정점인 르네상스는학적(여성) 양식의 황금시대였다.
그리고 또한 미학 양식의 종말이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16세기에 이르러 문화는 성의 변증법the sex dialectic적인 면에서는 모권제에서 부권제로 옮겨가고, 계급적 변증법the class dialectic에서는 봉건주의의 쇠퇴에 상응하는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 P258

경험과학과 문화의 관계는 부권제로의 전환과 성의 변증법과의 관계, 그리고 부르주아 시대와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의 관계와 같다. 즉, 혁명에 선행하는 후기 단계이다. 더욱이 세 변증법은 횡적으로뿐만 아니라 종적으로도 서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 부르주아지로부터 성장한 경험과학(부르주아 시대는 그 자체가 부권제 시기의 단계이다)은 귀족제의 휴머니즘(여성원리, 모권제)을 계승하고, 실제적 지식을 축적하기 위한 경험적 방법의발달과 함께(자본축적을 위한 근대 산업의 발달) 결국 그 자체를위협한다. 과학적 발견의 본체(새로운 생산 양식)는 그것을 이용하는 경험적(자본주의적 양식을 끝내 벗어나야만 한다. - P262

또 다른 경험과학의 내적 모순은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이고
‘혼이 없는‘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경험주의의 본질적으로 숭고하고 자주 망각되는 궁극적 목적, 즉 이상의 현실적 실현이라기보다는 그 목적에 대한 수단의 결과이다. - P263

문화적으로 우리는 남성 역할과 여성 역할 간의 선택만을 할 수 있었다. 자의식, 내향성, 패배주의, 염세주의, 과민성, 현실 감각이 부족한 사회적 주변인으로 이끌거나 아니면 전문성을 갖춘‘ 분열된 인격, 감정적 무지, 전문가의 편협한 시각 사이에서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275

다음 문화적 혁명에서 우리가 가질 것은 남성(테크놀로지 양식)과 여성(미학 양식)의 재통합이다. 그것은 문화적 흐름의 최 - P276

고치이거나 혹은 그것들의 총합마저 능가하는 양성성의 문화를창조하기 위한 것으로 문화적 범주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결합 그 이상으로 문화 자체가 훅! 하고 끝나버리는 물질반물질 폭발a matterantimatter explosion의 상호 말소이다. - P2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