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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여행자를 위한 도슨트 북 - 모든 걸작에는 다 계획이 있다
카미유 주노 지음, 이세진 옮김 / 윌북아트 / 2025년 10월
평점 :
최근 서경식 선생님의 대표작인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으면서 미술사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막상 구매를 했으나 예약 판매로 뜨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받아보는데 시간이 좀 걸렸는데 이러다 구매가 취소될까봐 좀 걱정이 되었다는. 무사히 받아서 읽을 수 있었다.
요즘은 대부분의 미술관에서 도슨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 같다. 도슨트 프로그램을 들으면 아무래도 혼자 미술을 감상하면서 놓치기 쉬운 부분을 알 수 있어 좋다. 다만 나는 평소 혼자 전시를 보는 것을 좋아해서 도슨트 프로그램을 매번 이용하지는 않는다. 물론 박물관 가이드는 거의 이용한다. 가이드는 휴대폰에서 앱이나 웹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개인 이어폰으로 들을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 도슨트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경우는 좀 더 깊은 이해를 원할 때 듣게 되는 것 같다.
우선 이 책은 미술관의 구조, 미술을 볼 때 유용한 개념들(이젤, 선, 구상, 제단화, 템페라 등)을 앞부분에 실어서 미술과 미술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그리고 뒷부분은 조토부터 뱅크시까지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들에 대한 본문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각 페이지에는 화가별 삶과 이력, 작품에 대한 특징, 평판, 대표작에 대한 설명, 화파에 대한 특징을 싣고 있다. 르네상스처럼 시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라던가 비례, 원근법 같은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은 따로 페이지를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어 좋았다. 비슷한 화풍을 지녔거나 카라바조와 젠틸레스키처럼 서로 비교할 만한 화가는 둘의 대표작을 싣고 그림의 특징을 설명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카라바조와 젠틸레스키는 같은 유디트의 그림을 그렸지만 다른 관점을 갖고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그림을 감상하면서 한 화가의 화풍을 알아가는 것보다 비슷한 화풍의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는 일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미술사를 언급할 때 화가가 살던 시기의 역사적 장소와 배경을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다른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준다는 것이다.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의 당시 화풍과 대표 화가,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점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들라크루아와 루벤스가 활동하던 같은 19세기 일본에는 에도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호쿠사이라는 대표 화가가 있었다. 그는 우키요에 예술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서 주목을 받았고 후지산 연작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일본의 우키요에는 유럽의 인상파 화가인 마네, 모네, 고흐, 고갱 등에게 실제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여성 화가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도 좋았다. 최근 들어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화가들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이들이 실제 미술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작품을 갖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평소 관심이 있었던 화가를 만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아예 이름을 몰랐던 화가들과 작품을 만나는 것도 흥미로웠다.
라파엘로의 부제는 신과 같은 예술가라고 되어 있다. 그는 독실한 신자였던 만큼 인간의 이상이 무엇인지 고민하여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그가 이상을 삼았던 시기는 고대였는데(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가 14세기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16세기까지 이어졌으니 그는 그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교황 레오 10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고대 로마 재건 프로젝트를 건의하기도 했단다. 그의 그림에는 신과 같은 모습을 한 인간을 그려서 비례라던지 균형이 완벽하다. 그래서 관념적이지만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어서 추종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실제로 후대에 신라파엘파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의 두 번째 삶, 즉 명성의 삶은 시간도 죽음도 거칠 것이 없으니 그의 작품들과 그 작품들을 찬양하는 학자들로 인해 영원무궁하리라." 16세기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신학자 조반니 피코델라 미란돌라가 라파엘로에 대하여 한 말이다(P46).
그는 당시 교황,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내가 라파엘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방문하고 나서였다. 그 전에는 이름만 알고 있었지 그가 누구고 화풍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던 상태였다. 그러다 실제로 보고 나서 아름다운 그림에 매료되어 전시를 보고 나오자마자 영어로 된 가이드북 등 관련 상품을 잔뜩 사왔었다. 지금도 가끔 펼쳐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그 때의 감각으로 돌아가곤 한다.
이를 비롯해서 다양한 분야에 뛰어났던 미켈란젤로, 자신의 초상화를 유독 많이 그린 렘브란트, 영국의 위대한 화가이자 풍경화의 대가였던 윌리엄 터너, 대담한 시도로 근대의 문을 연 귀스타브 쿠르베, 점묘화를 그린 조르주 쇠라, 20세기 회화의 문을 연 폴 세잔, 색채의 마술 샤갈, 추상의 대가 피에르 몬드리안, 호박 그림으로 유명해진 쿠사마 야요이 등 수많은 화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몇몇 여성 화가들을 소개해본다.
네덜란드 황금 시대를 대표하는 라헬 라위스는 암스테르담 최고의 정물 화가로 당시 유럽 귀족들에게 그림이 불티나게 팔릴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책에는 '과일과 곤충이 있는 정물' 그림이 실려있는데 화사한 붓놀림에 채광을 잘 이용한 덕분인지 놀랄 만큼 사실적이어서 중앙 하단의 과일은 꺼내 먹고 싶을 정도로 싱싱해보인다. 반면 상단과 모서리로 갈수록 어둡게 채색하여 한층 과일을 돋보이게 했다. 곤충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평범성을
아프 클린트란 사람이 있다. 그는 말레비나 칸딘스키보다 먼저 추상화를 그렸는데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유언에 따라 사후 20년 간 작품이 비공개 상태여서 1960년대에야 비로소 작품이 공개되었고 그로부터도 20년 후에나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그는 스웨덴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재능이 특출났는데 작품은 자연과학이 바탕이 되면서도 신비 사상을 담은 영성에 기반을 한다는 것이 독특하다. 책에는 대표작인 백조 연작 중 그룹 9번 그림이 실려 있다.
마리기유민 브누아라고 처음 알게 된 화가인데 역사화를 그렸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는 나폴레옹 1세 시대에 초상화가로 활약했다는데 스승이 다름 아닌 다비드였다고. 그렇지만 여성 화가로서 평론가들의 악평에 마음 고생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남편이 더는 예술 활동을 하지 않게 하여 더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니 참 아쉬울 따름이다. 책에는 '마들렌의 초상'이라고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작품이 실려 있는데 원래 작품 제목은 '니그로 여성의 초상'이었다가 이후 '흑인 여성의 초상'으로 변경되고 2019년 이후로 이 이름으로 변경된 모양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상이 변하는 만큼 사람들의 생각도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상파 화가 중 베르트 모리조도 있었다. 그는 최초의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했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화가였다. 그는 카미유 코로에게 그림을 배웠고 특히 여성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요람'이라는 작품은 어딘가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여성이 요람에 누워 있는 아기를 지켜보고 있는 그림이다. 주인공인 여성은 자신의 언니인데 언니도 화가였지만 결혼 후 그림을 그만둔 반면 모리조는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면서 그림을 쉬지 않고 그렸다. 결혼이란 제도가 여성들을 가정에 가두고 꿈과 이상의 세계와 멀어지게 한 것 같아서 씁쓸했다.
단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무게다. 추천사에 '이 책 없이 미술관에 가지 말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양장본으로 책 무게가 상당하여 갖고 다니기에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미술관 나들이 전후 또는 미술 작품에 대한 기초 자료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