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 분열기의 중국 하버드 중국사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조성우 옮김 / 너머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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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중국의 이 시기의 역사와 관련한 책을 읽으면서 정리가 안되고 어째 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약 4~5세기 동안 너무나 많은 왕조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인데 그런 만큼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릴 적 삼국지를 읽으며 ';왜 이리 복잡해!' 했는데 '이건 약과였구나' 싶다. 동시에 중국인들은 과연 이 때의 역사를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슬며시 일었다.

후한 말 중국은 혼란기에 접어든다. 황건적의 반란을 시작으로 위, 촉, 오 삼국이 분열했다가 서진으로 통합되었으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은 오호십육국 시기가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1세기 가까이 이어진다. 남쪽은 두 세기 동안 유송, 제, 양, 진의 남조가 이어졌다.

하버드 중국사 2권은 흔히 우리가 '위진남북조'라고 부르는 시기를 '남북조'로 통칭한다. 중국인 역사학자들은 왕조별로 시대를 구분하는 전통에 따라 이 시대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라고 부르는 반면 서구 학자들은 ‘분열의 시대(the Age of Disunion)‘ 혹은 ‘초기 중세(the Early Medieval period)‘라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분열의 시대'는 어디 갖다 써도 분열의 시기에 통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고 '위진남북조'라고 하기에는 중국이 어느 한 왕조로 통일되었다는 관점을 강요하는 것이라 불편하다. 그래서 저자는 중국 정치세계가 황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과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양분되어 있었음을 반영하여 '남북조'라고 통칭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남북조'라고만 하기에도 충분한 설명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전한대에는 황하 상류 황토 고원과 황하 하류 범람원 사이의 지리적 구분이 아주 중요하였다. 한대 역사 전체가 이 두 지역 사이 균형의 변화라는 시각에서 서술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 세기에 걸쳐 자발적으로 혹은 불가피하게 점차 많은 중국인이 남쪽으로 이동하였고, 이에 따라 황하 유역 내 구분보다 다른 구분, 즉 황하 유역과 양자강 유역 사이의 구분이 중요해졌다. - P29

이전까지만 해도 양자강 이남 지역은 중국에서 주변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민족의 침략과 잦은 홍수로 후한 시대를 시작으로 4세기 초까지 북중국에 있던 많은 인구가 남방으로 이주한다. 이들(한족)은 강남 지방을 농업에 적합한 자연 환경으로 만들고 토착민들은 살던 곳에서 쫓겨 나거나 한족에 흡수되었다.

한반도의 역사에도 시기 별로 지배층의 명칭이 다른데 중국의 이 시기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귀족의 시대'라는 명칭으로 정리되는데 저자는 '귀족'을 쓰지 않고 '유력 가문'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것이 특이하다. 내 생각에 너무 일반적인 용어를 쓴 것 같기는 하지만(유력 가문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단어인 것 같아서) 일부 가문의 영향력을 강조하기 위해 쓴 듯하다.

귀족의 시대라는 표현이 전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시기 동안 황제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덕분에 일부 가문이 조정과 지방에서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 중 어떤 가문도 몇 세대 이상 조정을 지배할 수는 없었지만, 일부 가문은 수세기 동안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였고 사회 지배층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운명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가문이 중국에서의 높은 지위에 대한 개념을 바꾸었고, 그리하여 사회 지배층과 조정 간의 관계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 P69

이 시기 유력 가문은 여러 문화 및 문학 활동을 추구(시 짓기, 서예, 글쓰기, 사상)하며 이전의 지배층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활동이 새로운 관료 선발 방법에 녹아들며 국가의 중앙 집단을 재구성했다. 또 가족 묘지를 만들고 한식(청명절)에 가계의 구성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게 되었으며 족보를 작성하면서 가문을 친족 집단으로 규정 짓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의식하는 친족 집단이 점차로 확대된 현상은 가훈과 족보라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구두로 남기거나 혹은 짧게 글로 적어 남긴 유훈은 이전 시기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고, 한대의 문헌 일부는 가계를 언급하고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면 자신의 가문을 차별화하며 가문의 번영에 요체가 되는 행동 방식을 명기하고 후손에게 주지시키는 장편의 글 중 현존하는 최초의 사례가 등장한다. - P342

한나라는 징병제를 폐지한 이후 비한족 기병과 죄수, 지원자로 군대를 꾸려 나갔다. 후한 말에는 소작인, 유목 군대, 투항한 반란 세력들로 군사를 충원했다. 이후에는 소작인과 비한족 기병으로 그 대상을 충당하였기 때문에 지주와 친족 집단의 군사 역량은 위축되었다(소작인들이 차출되니). 5세기 이후에는 군사력의 중심이 지배층 중심에서 다시 조정 기반으로 되면서 황제의 권력도 강화된다.

중국에 중앙아시아 및 인도와 정기적으로 교류하면서 불교가 전래되었다(불교는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전파된다). 도교는 기존의 전통 신앙과 맞물리면서 이미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터였다. 불교가 흥기하고 도교가 상호작용하면서 중국의 종교세계는 여러모로 변화하였다.

첫째로 한대인들의 모호한 사후 세계는 천국과 지옥의 각 층위가 겹겹이 쌓여 생생한 모습의 지리적 관념을 갖춘 사후세계로 대체되었다. 또한 아귀를 비롯해 새로운 귀신의 존재를 도입하면서 불교는 중국의 사후 세계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둘째로 불교는 영혼의 세계를 윤리적인 성격의 세계로 바꾸어 놓았다. 한대인들이 저승에서의 보상과 처벌을 믿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가장 보편적 원리는 올바르게 매장되면 죽은 사람은 저승에서도 이승의 지위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생전의 행위가 아니라 매장 의례가 사후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와 그 이후 중국의 사후세계 관념을 지배하게 된 것은 생전의 행위에 따라 보다 좋거나 나쁜 존재로의 환생, 혹은 천당이나 지옥으로의 전생이 결정된다는 식의 단순화된 업의 교리였다. 세 번째 변화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중국의 상장 의례와 망자를 구원하기 위한 명절에서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불교 의례는 조상을 지옥에서 구원하여 불교의 낙원인 정토에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부처와 승려의 영적인 힘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 P412~413

위진남북조 시대의 글쓰기와 문학은 같은 시대의 중국 문화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자율적 영역의 개창을 그 특징으로 한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시를 짓고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장소가 생겨나고, 아울러 교단 종교, 도시 내 사원과 원림, 산지에 자리한 별장과 은자의 동굴 등이 등장한 것과 더불어 문인들은 고전, 철학, 역사가 제시하는 윤리적 틀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는, 보다 자율적인 미적 영역을 만들어내었다." 글쓰기와 문학적 관념의 이러한 새로운 영역은 ‘현학玄學’의 등장으로 지적인 토대를 얻게 되었다. - P427

이 시기 북방 유목민들이 중국에 세운 왕조는 이후 수, 당 시기에 많은 유산을 남긴다. 그리고 이 지역은 한반도의 고대 국가와도 깊은 관련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고구려는 중국의 북방 지역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어서 더욱 그렇다. 중국의 북방이 분열되었던 이 시기는 그래서 고구려에게 기회의 시기이기도 했다.

4세기에 걸친 분열기를 지나 수가 589년에 중국을 재통일하고 뒤이어 당(618~906)이 들어서면서, 한의 멸망 이래 변모해왔던 중국 사회에 다시 단일한 황제 지배가 행해졌다. 한 제국의 계승 혹은 부활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사실 수당 왕조는 5~6세기에 북중국을 지배했던 이전의 ‘오랑캐‘ 왕조 북위, 북주, 북제에서 발전한 많은 제도와 관행을 흡수하였다. - P481

하버드 중국사의 특징은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리, 제도, 가족(및 친족) 구조, 종교, 문화와 예술 등 주제 별로 사안을 다룬다. 시간 순의 역사를 먼저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읽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이 책으로 이 시기를 특징 지은 후에 세부적인 흐름의 역사를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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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06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사에 관심이 많아 이 시리즈
를 한동안 사서 모으긴 했는데...

결국 완독한 책은 없네요.

기록을 찾아 보니 모두 3권을 샀
네요. 남북조는 무려 6년 전에 샀
다는 :>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책은 <원명>
이구요. 한 번 살펴 보려고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6-07 10:11   좋아요 1 | URL
중국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이 시리즈 관심가지실 만합니다^^ 물론 서구 학자들의 관점이 중심이라 한반도나 주변 국가에 대한 서술은 아쉽지만 주제별로 다루어 시기를 정리하기 좋더군요^^
 

후한 말과 당 사이 시기에 조상과 관련한 가족의 관계에 있어서 두가지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가족묘지를 만들게 된 일 그리고 한가계에 속하였으나 흩어져 사는 구성원들이 한식이라고도 알려진청명절淸明에 정기적으로 모이게 된 일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변화는 보다 많은 사람을 혈연으로 묶어주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 P332

스스로를 의식하는 친족 집단이 점차로 확대된 현상은 가훈과 족보15)라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구두로 남기거나 혹은 짧게 글로 적어 남긴 유훈은 이전 시기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고, 한대의 문헌 일부는 가계를 언급하고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면 자신의 가문을 차별화하며 가문의 번영에 요체가 되는 행동방식을 명기하고 후손에게 주지시키는 장편의 글 중 현존하는 최초의사례가 등장한다. - P342

위진남북조에서 대규모 친족 집단이 발전하면서 유력 가문들은 점차 국가라는 구조에 얽매이게 되었는데, 이들 가문은 자신의 존재를규정하는 의례도 새롭게 등장하는 종교 교단에 맡긴다. 특히 새로운사후관념과 더불어 사람이 죽은 후에 보다 나은 존재로 환생할 수 있도록 돕는 데 필요한 의례를 갖춘불교는 점차로 한 가문과 그 선조 간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며 나아가 가문 그 자체의 구조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종교가 되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도교, 특히통합적 성격의 영보파전통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 - P355

도교와 불교는 사상과 행위의 새로운 형태로서, 그 이전 중국을 특징짓던 지적·사회적·정치적 구조를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바꾸어놓았다. 도시의 준공공 공간으로서 불교사찰이 등장하고, 낙원을 표현한 - P379

공간으로 원림이 발달하며, 공통의 불교신앙으로 연결된 범아시아 세계가 형성되고, 도교와 불교가 가족에게 영향을 미친 일 등은 그변화상의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불교는 후한대에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상인들이 중국에 전해준 외래신앙이었다. 이 새로운 종교는 지배층 일부에서 관심을 얻었고, 중국인의 삶 모든 부분에 스며들 때까지 점점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갔다. 불교와 비교해볼 때 도교의 역사는 훨씬 멀리, 적어도 전국 시대 이래로 존재해왔던 신앙과 종교적 관념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교가 조직화된 운동을 형성하게 된 때는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시기와 대체로 비슷한 시기였다. 그러나 나중에 불교가 모델을 제시할 때까지 사원, 성직자의 위계조직, 경전 등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 P380

불교가 흥기하고 도교와 상호작용하면서 중국의 종교세계는 여러모로 변화하였다. 첫째로 한대인들의 모호한 사후세계는 천국과지옥 - P412

의 각 층위가 겹겹이 쌓여 생생한 모습의 지리적 관념을 갖춘 사후세계로 대체되었다. 또한 아귀를 비롯해 새로운 귀신의 존재를 도입하면서 불교는 중국의 사후세계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둘째로 불교는영혼의 세계를 윤리적인 성격의 세계로 바꾸어놓았다. 한대인들이 저승에서의 보상과 처벌을 믿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가장 보편적 원리는 올바르게 매장되면 죽은사람은 저승에서도 이승의 지위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생전의 행위가 아니라 매장 의례가사후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와 그 이후 중국의사후세계 관념을 지배하게 된 것은 생전의 행위에 따라 보다 좋거나나쁜 존재로의 환생, 혹은 천당이나 지옥으로의 전생이 결정된다는식의 단순화된 업의 교리였다. 세 번째 변화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중국의 상장 의례와 망자를 구원하기 위한 명절에서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불교 의례는 조상을 지옥에서 구원하여 불교의 낙원인 정토에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부처와 승려의 영적인 힘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 P413

위진남북조 시대의 글쓰기와 문학은 같은 시대의 중국 문화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자율적 영역의 개창을 그 특징으로 한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시를 짓고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장소가 생겨나고, 아울러 교단 종교, 도시 내 사원과 원림, 산지에 자리한 별장과 은자의 동굴 등이 등장한 것과 더불어 문인들은 고전, 철학, 역사가 제시하는 윤리적 틀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는, 보다 자율적인 미적 영역을 만들어내었다." 글쓰기와 문학적 관념의 이러한 새로운 영역은 ‘현학玄學’의등장으로 지적인 토대를 얻게 되었다. - P427

4세기에 걸친 분열기를 지나 수가 589년에 중국을 재통일하고 뒤이어당(618~906)이 들어서면서, 한의 멸망 이래 변모해왔던 중국 사회에 다시 단일한 황제 지배가 행해졌다. 한 제국의 계승 혹은 부활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사실 수당왕조는 5~6세기에 북중국을 지배했던 이전의 ‘오랑캐‘ 왕조 북위, 북주, 북제에서 발전한 많은 제도와 관행을 흡수하였다.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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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식민지를 겪으면서 한국의 수많은 농민은 고향을 떠났다. 그들은 대부분 젊고 가난하고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세계대전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젊고 가난하고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 P118

완전히 소작농도 노동자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존재였다. 그들은 노동자 · 광부·군인으로 일했지만 좀더 중요한 사실은 고향이 아닌 곳에서 세계에 노출됐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가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주하기 전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1945년이 됐을 때 그들의 시야는 그렇게 좁지 않았다. 전쟁의 종식은 농민-노동자에게 새로운 출발이었다. 급진적 조직 운동가에게 그것은 새로운 원료를 풍부하게 가져다주었다. - P119

식민지 시대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기초적 사실은 일본이 가져온커다란 변화의 정도가 아니다. 핵심적 측면은 변화가 자연스러운 경로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농민은 토지에서 유리되고 계급으로서 붕괴되었다고 해서 산업에 종사하게 되지는 않았다(이를테면 영국에서 인클로저 운동과함께 공업 생산이 등장한 것과는 달리). 그 대신 그들은 공장에서 잠시 일한다음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지주는 상업·산업적 기업가로 변모하지 않고 기업가 정신과 전통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여러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한국인관료는 근대적 또는 합리적 관료 제도에서 근무하지 않았고, 이민족이 지배한 체제 안에서 일본인 상관은 물론 같은 민족인 한국인에게도 적대시되면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항일세력 중에서도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사이에 균열이 생겼으며, 이는 식민 지배가 끝난 뒤까지도 좁혀지지 않았다. - P119

시대가 시작됐다. 해방은 그저 하루가 아니라 한국사에서 이전에도 없었고그 후로도 없을 대중 참여의 거대한 변화가 진행된 시대를 불러왔다. 일본의패망으로 한국인은 자신의 유산-역사·문화·언어·인권을 재발견했다.
이런 권리를 자각하는 데서 한국인은 프랑스인 그리스인.베트남인과 전혀다를 바 없었다. 1945년 한국인의 축제와 자기 권리 주장은 수십 년간의 억눌림 끝에 들이마신 신선한 공기였다.
그러나 해방을 열광적으로 기뻐한 한국인의 모습에서 순간적이고 목표없는 추구만을 본다면 오산이다. 떠들썩하게 잔치를 즐긴 사람들은 이튿날 맑은 정신으로 깨어났다. 새 제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적극적 관심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새로운 질서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도 있었다. 갈등이 내재한 위기의 정치는 이런 환경에서 나타났다. 변혁을 요구하면서 남한과 북한의 "인민공화국" 아래 결집한 강력한 세력은 자신들보다 약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있으며 변화를 반대하는 세력과 충돌했다. - P124

전체적으로 말해서 인공 지도자들은 오래 유지되는 조직을 건설하는 데미숙했고 지방에 깊이 뿌리내린 정치운동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은도시 지역,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다른 정파나 정당과 제휴하려고 시도했다.
기이한 역설은 그들이 서울의 피로한 정치에 빠진 결과, 지방에서 발생한 운동을 스스로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근대적 정치가 지방 대중을 동원해 전국적 정치 세력으로 발전시키고 중앙과 지방을 강력히 연결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들은 근대적 정치를 희생시켜 전통적 정치를 되살렸다고 말할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지적하더라도 남한의 어떤 세력보다 인공 지도자들이 조직과 동원을 주도하고 민족적 목표를 설계해 주권을 확립하는 기초 작업을 뛰어나게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 치안대는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3주 동안평화를 유지했다. 건준은 주요 식량 창고를 유지·보호하고 풍작을 도왔다.
노동운동 지도자와 노동자는 수많은 공장과 시설을 유지했다. 지방의 조직가들은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을 발전시켜 깊이와 의미 면에서 한국사에 유례없는 지방 대중의 정치 참여가 전개된 한 해를 이끌었다. 모든 것은 일본과 그 뒤 미국 그리고 중앙 권력의 억압을 이겨내고 진행됐다. 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인공과 그것이 후원한 조직은 몇 달 안에 한반도 전체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 P148

1945년 시점에서 한민당은 지지 기반을 만들고 유권자를 포섭하는 과정에 무지한 사회적 저명인사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지방 조직을 도외시한채 서울에 노력을 집중했다. 그들이 지방으로 관심을 돌린 것은 지방 관리·군수·지방 경찰을 입당시키려는 의도였지 지방에 대중적 기반을 만들려는의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중을 두려워했다. 그들 개개인이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정치는 조선 후기와 연결됐다. 1940년대의 연로한 정치 세력은 1890년대 기법을 모방했다.139 에릭 J. 홉스봄은 영국 지배층이새병에옛 상표를 붙이는 것을 선호한다면서 "내용은 완전히 바뀌었는데도옛 제도의 형태를 계속 유지한다"고 썼다.140 한국의 연로한 정치 세력의 특징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내용을 그대로 두고 구조만 변화시켜 국가 관료 조직을 이용한 옛 조선의 제도를 따라 계급적 특권을 보호하면서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1940년대의 차이는 일본이 옛 조선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를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 P158

루스벨트의 국제협력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의 문제였다. 그의 목표는전후 세계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단은 차이를 만들었고 루스벨트가 사망하면서 힘의 균형은 무력의 사용과 점령, 소련과의 정면대결 그리고 국경선의 명확한 확정과 같은 고전적 일국독점주의 방식을선호한 인물들에게 기울었다. 신탁통치를 비롯한 그 밖의 국제협력주의적방법은 점차 고립된 일군의 대외 정책 입안자들이 선호한 방법으로 남았다.
한국의 경우 다국적 방법으로 소련과 반식민적 민족주의를 억제하려던 이런 정책은 포츠담회담 이후 분주한 시간 동안 폐기되었고 사실상 소련에게양보했던 한반도로 군대를 급파하는 일방적 정책으로 전환됐다. 그 결과는한 나라의 분단과 전후 최초의 봉쇄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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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1장 식민지 한국의 계급과 지배 기구

조선은 겉으로 보기에 중앙이 강력했지만 지방과의 고리는 허약했다. 양반 지주는 국가를 이용해 자신을 존속시키고 농민을 지배했다. 그러나 지배는 완전하지 않았다. 관계는 끊어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농민 반란은 거듭됐다. 19세기 끝 무렵에 접어들자 이 나라는 일본이든 서구 열강이든 새로 일어난 산업 세력의 침탈에 전혀 대항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너무 익숙한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대신 강조해야 할사실은 양반 지주가 국가를 이용해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큰 성공을 - P53

거둔 결과 외부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조선의 능력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는 측면이다. - P54

식민지 통치 기구는 한국 사회를 권위적이고 강제적으로 통제하면서 군림했다. 그들은 한국의 비주류 지배층과 갑자기 부유해진 부류-양반·지주·관료-와만 접촉했는데, 그 관계는 매우 허약했고 이들을 주요 국무에참여시킨 것이 아니라 포섭해 저항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로 형성된 것이었다. 대체로 일본은 한국에서 권력 균형을 이동시키고 전례 없는 규모로 자원을 동원·수탈하려는 목적에서 중앙 권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주변부와 불안정한 유대로 이어진 허약한 관료 제도가 아니라 샅샅이 침투한 강제적 명령 체계가 만들어졌다. - P55

철도는 지속과 통합ㅡ산업(일본의 산업은 아니라도)이 지속되고 국경이 점차 의미를 잃는 일본 제국의 통합을 상징했다. 그러나 한국과 만주의 철도 발전은 무엇보다 농업의 상업화를 촉진하고 두 지역을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 시장 관계 안으로 편입시켰다. 일본은 철도를 이용해 전통적인 한국의 고립을 깨뜨리고 세계 경제와 통합했다. - P57

1945년까지 일본은 가장 명망 있는 한국인들에게 제반 통치와 전쟁을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지지하도록 강요했다. 그 결과 일제는 1920~1937 년 식민 치하에서 활동하려고 노력한 온건한 민족주의자의 위상을 무너뜨렸다. 어쨌든 이들의 민족주의적 색채나 그것의 상실은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대신 "지주 기업가"라는용어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한 형태의 부와 활동에서 다른 형태로 이행하던 첫 한국인 세대인 그들의 모습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1945년 일제강점기가 갑자기 끝나면서 한국의 발전은 중단됐고, 그 흔적은 모든 한국 - P67

인 계급에 남겨졌다. 호남 출신 및 그들과 비슷한 부류는 불안한 처지에 놓였으며, 상업이나 산업 활동에 종사하는 만큼이나 자신의 토지 소유와 거기서 파생된 특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처럼 민족자본가에게는 "민족적"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이 섞여 있었다. - P68

일제가 추진한 정책의 궁극적 결과는 한국인을 서로 대립시킨 것이 아니라 한국인 지배층에게서 합법성을 박탈한 것이었다. 소작인을 지배한 지주든, 노동자를 동원한 경찰이든, 세금을 걷는 관료든, 대동아공영권의 미덕을 강연한 지식인이든 그런 경험은 그 뒤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계속 물어뜯었다. 식민 지배가 끝나지 않았거나 덜 급작스럽게 끝났다면1930~1940년대의 한국인 지배층은 오늘날 일본과 그리 밀착되지 않은 한 - P77

국에서 좀더 자신감을 지닌 지도자들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앞면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동전을 공중에 던졌다. 그러나 1945년에 나온 것은뒷면이었다. - P78

1930년 후반까지 일본은 지식인이 통치에 노골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한 상당한 자유를 허락했다. 그로 인해 야기된 한국인 내부의 대립은 해방 뒤까지 이어졌다. 1940년대 후반에나타난 좌우 갈등의 기원은 20년 전에 형성된 것이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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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사의 지평에서 민주주의를 다시 본다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아시아민중사연구회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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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인식 관심의 하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도적이고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주체 및 테마로 그 경계를 확장해야 할 때라는 인식이었다. (...)
다른 하나의 관점은 소수자 정치의 구체적 양상에 대한 인식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째, 에스닉적인 소수자 주체에 더 유의하였고, 둘째, 앞서 새로운 주체테마가 제도적 민주주의의 확장에 시선을 두었다면, 소수자 정치는 소수자의 자기결정권과 그것의 다수자와의 관계성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
마지막 인식 관심은 과거의 경험 재현과 관련된 민주주의 문제이다. 한국에서는 과거 자체가 확고한 진실로서 정립해 있지 않고, 그것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거나 기념하는 사업이 고도로 정치화되어 있다. - P5

한국에서 민중사가 처음 주목을 받았던 것은 1980 년대였다.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민중이 대두하면서 기득권에 입장에 쓰여진 역사를 넘어 민중(대중)의 역사로 나아갈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일단 작년에 역사문제연구 48호를 통해 '새로운 민중사'에 대한 제안을 통해 선행 학습한 것이 이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민중사는 간단하게 말해서, 마이너리티에 주목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한일 민중사 연구자들이 2017년 이후 2020년까지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지며 내놓은 결과물을 정리한 것으로 두 번째 결과물이다(첫 번째 결과물은 2015년 나왔다).
총 3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1부는 새로운 민중사의 '민주주의적 주체'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 것인가에 주목한 내용이다. 핵심 키워드는 여성의 몸(식민지 여성 신체에 대한 종속), 도쿄 고가네이 지역의 환경, 광주항쟁에서 빈민들에 대하여 다루었다.
2부는 민주주의와 소수자 정치로 말 그대로 '소수'에 주목한 내용이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단절되고 분리된 채 생활을 한 오키나와(민족 내 차별), 나리타 공항을 둘러싼 갈등(환경 vs 개발), 일본의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사회운동을 통한 재일조선인의 문제(민족 외 차별)를 다루고 있다.
3부는 민주주의의 역사와 기억에 대한 문제다. 광주미술인협회의 활동, 해방 이후 동학농민전쟁이 정치에 맞물리는 양상, 오키나와의 선거 운동과 민주주의에 대한 사항을 다루었다.

특히 재일 조선인 기독교 교회에 대한 사회 운동, 나리타 공항 문제의 역사, 광주자유미술인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미술운동은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이어서 새로 알아가는 즐거움이 컸던 챕터였다. 새로운 민중사가 나아갈 길과 관련한 주제만으로 따지면 1, 2부의 내용이 핵심을 파고든다는 생각을 했으나 3부는 특히 기억과 역사를 정치에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소수자 문제와 민중사가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결국 이것을 확장시켜 나아가면 민주주의가 다수에 기반한 대의 정치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소수자 문제를 건드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소수자 문제는 결국 불평등의 문제 아니겠는가. 젠더 불평등, 부의 불평등, 환경의 불평등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민중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역사를 공부할수록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의 역사를 찾아내고 발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국내 안에서만이 아니라 이런 국가 간 연구자들의 네트워크 교류를 통해서 다양한 연구 결과물이 꾸준히 나오는 것이 중요한 듯 하다. 물론 대중서도 꾸준히 나와주어야겠다. 이런 결과물들이 많아야 독자들의 선택지도 넓어질 것이다.

민중사의 전개로 보아 민주주의는 일국사적 경계 속 사건으로서의 운동이나 선거로 이룰 수 있는 목적지가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과 민중의 삶 속에서 계속 나타나고 경합한 가치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역사적으로 보는 작업에서 민중사 관점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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