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말과 당 사이 시기에 조상과 관련한 가족의 관계에 있어서 두가지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가족묘지를 만들게 된 일 그리고 한가계에 속하였으나 흩어져 사는 구성원들이 한식이라고도 알려진청명절淸明에 정기적으로 모이게 된 일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변화는 보다 많은 사람을 혈연으로 묶어주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 P332

스스로를 의식하는 친족 집단이 점차로 확대된 현상은 가훈과 족보15)라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구두로 남기거나 혹은 짧게 글로 적어 남긴 유훈은 이전 시기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고, 한대의 문헌 일부는 가계를 언급하고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면 자신의 가문을 차별화하며 가문의 번영에 요체가 되는 행동방식을 명기하고 후손에게 주지시키는 장편의 글 중 현존하는 최초의사례가 등장한다. - P342

위진남북조에서 대규모 친족 집단이 발전하면서 유력 가문들은 점차 국가라는 구조에 얽매이게 되었는데, 이들 가문은 자신의 존재를규정하는 의례도 새롭게 등장하는 종교 교단에 맡긴다. 특히 새로운사후관념과 더불어 사람이 죽은 후에 보다 나은 존재로 환생할 수 있도록 돕는 데 필요한 의례를 갖춘불교는 점차로 한 가문과 그 선조 간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며 나아가 가문 그 자체의 구조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종교가 되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도교, 특히통합적 성격의 영보파전통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 - P355

도교와 불교는 사상과 행위의 새로운 형태로서, 그 이전 중국을 특징짓던 지적·사회적·정치적 구조를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바꾸어놓았다. 도시의 준공공 공간으로서 불교사찰이 등장하고, 낙원을 표현한 - P379

공간으로 원림이 발달하며, 공통의 불교신앙으로 연결된 범아시아 세계가 형성되고, 도교와 불교가 가족에게 영향을 미친 일 등은 그변화상의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불교는 후한대에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상인들이 중국에 전해준 외래신앙이었다. 이 새로운 종교는 지배층 일부에서 관심을 얻었고, 중국인의 삶 모든 부분에 스며들 때까지 점점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갔다. 불교와 비교해볼 때 도교의 역사는 훨씬 멀리, 적어도 전국 시대 이래로 존재해왔던 신앙과 종교적 관념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교가 조직화된 운동을 형성하게 된 때는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시기와 대체로 비슷한 시기였다. 그러나 나중에 불교가 모델을 제시할 때까지 사원, 성직자의 위계조직, 경전 등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 P380

불교가 흥기하고 도교와 상호작용하면서 중국의 종교세계는 여러모로 변화하였다. 첫째로 한대인들의 모호한 사후세계는 천국과지옥 - P412

의 각 층위가 겹겹이 쌓여 생생한 모습의 지리적 관념을 갖춘 사후세계로 대체되었다. 또한 아귀를 비롯해 새로운 귀신의 존재를 도입하면서 불교는 중국의 사후세계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둘째로 불교는영혼의 세계를 윤리적인 성격의 세계로 바꾸어놓았다. 한대인들이 저승에서의 보상과 처벌을 믿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가장 보편적 원리는 올바르게 매장되면 죽은사람은 저승에서도 이승의 지위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생전의 행위가 아니라 매장 의례가사후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와 그 이후 중국의사후세계 관념을 지배하게 된 것은 생전의 행위에 따라 보다 좋거나나쁜 존재로의 환생, 혹은 천당이나 지옥으로의 전생이 결정된다는식의 단순화된 업의 교리였다. 세 번째 변화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중국의 상장 의례와 망자를 구원하기 위한 명절에서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불교 의례는 조상을 지옥에서 구원하여 불교의 낙원인 정토에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부처와 승려의 영적인 힘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 P413

위진남북조 시대의 글쓰기와 문학은 같은 시대의 중국 문화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자율적 영역의 개창을 그 특징으로 한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시를 짓고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장소가 생겨나고, 아울러 교단 종교, 도시 내 사원과 원림, 산지에 자리한 별장과 은자의 동굴 등이 등장한 것과 더불어 문인들은 고전, 철학, 역사가 제시하는 윤리적 틀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는, 보다 자율적인 미적 영역을 만들어내었다." 글쓰기와 문학적 관념의 이러한 새로운 영역은 ‘현학玄學’의등장으로 지적인 토대를 얻게 되었다. - P427

4세기에 걸친 분열기를 지나 수가 589년에 중국을 재통일하고 뒤이어당(618~906)이 들어서면서, 한의 멸망 이래 변모해왔던 중국 사회에 다시 단일한 황제 지배가 행해졌다. 한 제국의 계승 혹은 부활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사실 수당왕조는 5~6세기에 북중국을 지배했던 이전의 ‘오랑캐‘ 왕조 북위, 북주, 북제에서 발전한 많은 제도와 관행을 흡수하였다.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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