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겉으로 보기에 중앙이 강력했지만 지방과의 고리는 허약했다. 양반 지주는 국가를 이용해 자신을 존속시키고 농민을 지배했다. 그러나 지배는 완전하지 않았다. 관계는 끊어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농민 반란은 거듭됐다. 19세기 끝 무렵에 접어들자 이 나라는 일본이든 서구 열강이든 새로 일어난 산업 세력의 침탈에 전혀 대항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너무 익숙한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대신 강조해야 할사실은 양반 지주가 국가를 이용해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큰 성공을 - P53
거둔 결과 외부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조선의 능력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는 측면이다. - P54
식민지 통치 기구는 한국 사회를 권위적이고 강제적으로 통제하면서 군림했다. 그들은 한국의 비주류 지배층과 갑자기 부유해진 부류-양반·지주·관료-와만 접촉했는데, 그 관계는 매우 허약했고 이들을 주요 국무에참여시킨 것이 아니라 포섭해 저항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로 형성된 것이었다. 대체로 일본은 한국에서 권력 균형을 이동시키고 전례 없는 규모로 자원을 동원·수탈하려는 목적에서 중앙 권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주변부와 불안정한 유대로 이어진 허약한 관료 제도가 아니라 샅샅이 침투한 강제적 명령 체계가 만들어졌다. - P55
철도는 지속과 통합ㅡ산업(일본의 산업은 아니라도)이 지속되고 국경이 점차 의미를 잃는 일본 제국의 통합을 상징했다. 그러나 한국과 만주의 철도 발전은 무엇보다 농업의 상업화를 촉진하고 두 지역을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 시장 관계 안으로 편입시켰다. 일본은 철도를 이용해 전통적인 한국의 고립을 깨뜨리고 세계 경제와 통합했다. - P57
1945년까지 일본은 가장 명망 있는 한국인들에게 제반 통치와 전쟁을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지지하도록 강요했다. 그 결과 일제는 1920~1937 년 식민 치하에서 활동하려고 노력한 온건한 민족주의자의 위상을 무너뜨렸다. 어쨌든 이들의 민족주의적 색채나 그것의 상실은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대신 "지주 기업가"라는용어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한 형태의 부와 활동에서 다른 형태로 이행하던 첫 한국인 세대인 그들의 모습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1945년 일제강점기가 갑자기 끝나면서 한국의 발전은 중단됐고, 그 흔적은 모든 한국 - P67
인 계급에 남겨졌다. 호남 출신 및 그들과 비슷한 부류는 불안한 처지에 놓였으며, 상업이나 산업 활동에 종사하는 만큼이나 자신의 토지 소유와 거기서 파생된 특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처럼 민족자본가에게는 "민족적" 모습과 그렇지 않은 모습이 섞여 있었다. - P68
일제가 추진한 정책의 궁극적 결과는 한국인을 서로 대립시킨 것이 아니라 한국인 지배층에게서 합법성을 박탈한 것이었다. 소작인을 지배한 지주든, 노동자를 동원한 경찰이든, 세금을 걷는 관료든, 대동아공영권의 미덕을 강연한 지식인이든 그런 경험은 그 뒤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계속 물어뜯었다. 식민 지배가 끝나지 않았거나 덜 급작스럽게 끝났다면1930~1940년대의 한국인 지배층은 오늘날 일본과 그리 밀착되지 않은 한 - P77
국에서 좀더 자신감을 지닌 지도자들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앞면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동전을 공중에 던졌다. 그러나 1945년에 나온 것은뒷면이었다. - P78
1930년 후반까지 일본은 지식인이 통치에 노골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한 상당한 자유를 허락했다. 그로 인해 야기된 한국인 내부의 대립은 해방 뒤까지 이어졌다. 1940년대 후반에나타난 좌우 갈등의 기원은 20년 전에 형성된 것이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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