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를 겪으면서 한국의 수많은 농민은 고향을 떠났다. 그들은 대부분 젊고 가난하고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세계대전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젊고 가난하고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 P118
완전히 소작농도 노동자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존재였다. 그들은 노동자 · 광부·군인으로 일했지만 좀더 중요한 사실은 고향이 아닌 곳에서 세계에 노출됐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가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주하기 전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1945년이 됐을 때 그들의 시야는 그렇게 좁지 않았다. 전쟁의 종식은 농민-노동자에게 새로운 출발이었다. 급진적 조직 운동가에게 그것은 새로운 원료를 풍부하게 가져다주었다. - P119
식민지 시대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기초적 사실은 일본이 가져온커다란 변화의 정도가 아니다. 핵심적 측면은 변화가 자연스러운 경로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농민은 토지에서 유리되고 계급으로서 붕괴되었다고 해서 산업에 종사하게 되지는 않았다(이를테면 영국에서 인클로저 운동과함께 공업 생산이 등장한 것과는 달리). 그 대신 그들은 공장에서 잠시 일한다음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지주는 상업·산업적 기업가로 변모하지 않고 기업가 정신과 전통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여러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한국인관료는 근대적 또는 합리적 관료 제도에서 근무하지 않았고, 이민족이 지배한 체제 안에서 일본인 상관은 물론 같은 민족인 한국인에게도 적대시되면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항일세력 중에서도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사이에 균열이 생겼으며, 이는 식민 지배가 끝난 뒤까지도 좁혀지지 않았다. - P119
시대가 시작됐다. 해방은 그저 하루가 아니라 한국사에서 이전에도 없었고그 후로도 없을 대중 참여의 거대한 변화가 진행된 시대를 불러왔다. 일본의패망으로 한국인은 자신의 유산-역사·문화·언어·인권을 재발견했다. 이런 권리를 자각하는 데서 한국인은 프랑스인 그리스인.베트남인과 전혀다를 바 없었다. 1945년 한국인의 축제와 자기 권리 주장은 수십 년간의 억눌림 끝에 들이마신 신선한 공기였다. 그러나 해방을 열광적으로 기뻐한 한국인의 모습에서 순간적이고 목표없는 추구만을 본다면 오산이다. 떠들썩하게 잔치를 즐긴 사람들은 이튿날 맑은 정신으로 깨어났다. 새 제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적극적 관심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새로운 질서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도 있었다. 갈등이 내재한 위기의 정치는 이런 환경에서 나타났다. 변혁을 요구하면서 남한과 북한의 "인민공화국" 아래 결집한 강력한 세력은 자신들보다 약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있으며 변화를 반대하는 세력과 충돌했다. - P124
전체적으로 말해서 인공 지도자들은 오래 유지되는 조직을 건설하는 데미숙했고 지방에 깊이 뿌리내린 정치운동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은도시 지역,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다른 정파나 정당과 제휴하려고 시도했다. 기이한 역설은 그들이 서울의 피로한 정치에 빠진 결과, 지방에서 발생한 운동을 스스로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근대적 정치가 지방 대중을 동원해 전국적 정치 세력으로 발전시키고 중앙과 지방을 강력히 연결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들은 근대적 정치를 희생시켜 전통적 정치를 되살렸다고 말할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지적하더라도 남한의 어떤 세력보다 인공 지도자들이 조직과 동원을 주도하고 민족적 목표를 설계해 주권을 확립하는 기초 작업을 뛰어나게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 치안대는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3주 동안평화를 유지했다. 건준은 주요 식량 창고를 유지·보호하고 풍작을 도왔다. 노동운동 지도자와 노동자는 수많은 공장과 시설을 유지했다. 지방의 조직가들은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을 발전시켜 깊이와 의미 면에서 한국사에 유례없는 지방 대중의 정치 참여가 전개된 한 해를 이끌었다. 모든 것은 일본과 그 뒤 미국 그리고 중앙 권력의 억압을 이겨내고 진행됐다. 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인공과 그것이 후원한 조직은 몇 달 안에 한반도 전체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 P148
1945년 시점에서 한민당은 지지 기반을 만들고 유권자를 포섭하는 과정에 무지한 사회적 저명인사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지방 조직을 도외시한채 서울에 노력을 집중했다. 그들이 지방으로 관심을 돌린 것은 지방 관리·군수·지방 경찰을 입당시키려는 의도였지 지방에 대중적 기반을 만들려는의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중을 두려워했다. 그들 개개인이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정치는 조선 후기와 연결됐다. 1940년대의 연로한 정치 세력은 1890년대 기법을 모방했다.139 에릭 J. 홉스봄은 영국 지배층이새병에옛 상표를 붙이는 것을 선호한다면서 "내용은 완전히 바뀌었는데도옛 제도의 형태를 계속 유지한다"고 썼다.140 한국의 연로한 정치 세력의 특징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내용을 그대로 두고 구조만 변화시켜 국가 관료 조직을 이용한 옛 조선의 제도를 따라 계급적 특권을 보호하면서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1940년대의 차이는 일본이 옛 조선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를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 P158
루스벨트의 국제협력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의 문제였다. 그의 목표는전후 세계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단은 차이를 만들었고 루스벨트가 사망하면서 힘의 균형은 무력의 사용과 점령, 소련과의 정면대결 그리고 국경선의 명확한 확정과 같은 고전적 일국독점주의 방식을선호한 인물들에게 기울었다. 신탁통치를 비롯한 그 밖의 국제협력주의적방법은 점차 고립된 일군의 대외 정책 입안자들이 선호한 방법으로 남았다. 한국의 경우 다국적 방법으로 소련과 반식민적 민족주의를 억제하려던 이런 정책은 포츠담회담 이후 분주한 시간 동안 폐기되었고 사실상 소련에게양보했던 한반도로 군대를 급파하는 일방적 정책으로 전환됐다. 그 결과는한 나라의 분단과 전후 최초의 봉쇄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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