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불안한 시기에는 늘 그렇듯 대립과 음모의 흔적이 없는 주말은 없었다. 전형적인 여름 날씨와는 대조적인 기사, 그러니까 "(미)군 전투부대는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승선항으로 얼마나 빨리 이동할 수 있는지검증하기 위해 대기 상태에 있었으며 그 검증은 7월 1일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기사가 묻혀 있는 것을 주의 깊은 독자만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과 일본에 있는 미군 전투부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검증을 위해)경계 태세에 있었다. 이것은 우연일 가능성이 컸지만, 중국이 타이완을 침략할 수 있다는 예측과 관련된 것이었다. 6월에 세계에 배치된 미군 병력은59만1000명이었다. 거기에는 미국 국내의 10개 전투 사단 36만 명과 가장큰 규모의 해외 파견부대인 주일미군 10만8500명이 포함됐다(독일에는 8만명이 파병됐다. 일본에는 4개 사단-제7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 제1기갑사단이 주둔했다. - P243

6월 25일 이른 아침 전쟁이 서부에서 동부로 확산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첫 번째 모자이크, 다시 말해 잠들어 있고 준비를 갖추지 못한남한을 38도선 전역에 걸쳐 갑자기 전면적 침공을 개시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조지프 대리고는 전투가 시작됐을 때 38도선에 있었던 유일한 미군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포성에 잠을 깼다. 초기 전투에 관한 그 밖의정보는 모두 한국군 정보원에서 나왔으며, 1949년 여름에 얻은 증거가 보여주듯, 그것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증거조차도 전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몇 시간에 걸쳐 번져나갔으며, 한국군 제6사단은 적어도하루 정도 먼저 경고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문산·춘천이나 동해안 - P296

에서 그리 좋은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남한 부대들이 저항으로 보기 어려운 반격을 하거나 싸움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군은 개성과 의정부를 돌파할 수 있었다. 북한이 투입한 병력도 군사전략 측면에서 보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존미어샤이머는 치밀한 논리를 전개한 저작에서 전격전술을 사용할 때 "전략적 돌파"를 성공시키려면 공격 측의 병력이 3대 1 정도 우세해야 한다고 서술했다.18 6월 25일 이후의 전투 과정은 고전적 전격작전과 비슷하다. 하지만 전투 데이터의 순서를 따라가보고 증거들에 살펴보더라도 이는 비슷한규모이거나 더 큰 규모의 적을 상대로 진행된 전격전이었다. - P297

국내와 국외에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던 이승만과 장제스는 봉쇄를 먼저 실시한 뒤 반격을 추진하기를 바란 반면, 애치슨은 한국과 타이완을 모두 방어하기로 결심하고 장제스를 축출하려고 했으며 봉쇄 지역 주변에서공산 세력이 먼저 공격하기를 바랐다. 당시의 모든 상황은 이처럼 긴장되고흥미로웠다. 1950년 여름 헨리 월리스는 딘 애치슨에게 분노가 담긴 서한을보내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애치슨은 격렬히 반대하는 답장을 보냈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무의식적 실언가운데 하나가 담겨 있었다. "진지하고 성실한 학자라면 거기에 아무 의문을품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 공산군은 도발을 받기는 했지만 경고도 정당한이유도 없이 대한민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증거도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한이 먼저 공격했음 - P319

을 여전히 입증하지 못한다.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면 다음 두 사항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첫째,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그런 도발을 이용해 남한을침략할 태세를 갖췄다는 명백한 증거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북한의침공을 정당화해주는 한국적 맥락일 뿐이다. 둘째, 정말 남한이 38도선을넘어 공격했다면, 1년 전 한국군 2개 대대가 월북한 것을 감안할 때 도발은북한에 동조하는 내부의 적이 일으킨 자작극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그렇다면 침공은 북한이 일으킨 것이 된다. - P320

북한이 명분 없는 공격을 시작했다는 판단은 한반도가 놓인 환경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바로 2년 전 38도선을 "국제적 경계선으로 만드는 데 유엔이 이용됐다(이승만을 포함한 어떤 한국인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5년 전 미국은고대부터 이어진 통일국가를 분열시키기 시작했고 소련의 큰 도움을 받아)때 이른 "냉전"을 심화했으며, 반동·친일 세력을 후원해 한국인들의 열망은말할 것도 없고 당시 국무부의 정책에도 역행하면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이런 일이 모두 이뤄지면서 한국인들이 한국을 침공하는 최악의 역설이 가능하게 됐다. 진실은 남한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북한에는도발이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 P341

. 『타임』지는 소련이 "미국의 시간"을 잘못 계산했음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가 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그들은 36시간 동안 ‘침묵‘했던 것이었다. "미국의 행동을 예측했다면 소련은 말리크를 유엔으로 보내 미국이 주도한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최근 소련이 저지른 최악의 실패였다. 78달리 말하면 스탈린은 은밀히 침공을 계획했고, 물질적으로 소련을 능가하는 초강대국과 세계 전쟁을 벌일 위험을 각오했으며, 전략과 전술 모두 차례로 큰 실패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는 소련의 전략에서 남한이 지닌 가치와 전쟁이 일본과 서방의 재무장에 줄 영향 그리고 미국의 참전 의지를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는 시간조차 잘못 계산했다. 애치슨은 편안히 앉아 스 - P381

남한에 유격대가 만연한 것은 미국이 적과 민간인을 구별할 수 없는 새로운종류의 전쟁에 직면했다는 뜻이었다. 인민군은 군복을 벗고 전형적인 농민 - P432

의 흰 옷을 입은 뒤 그들 안으로 섞여 들어갔다. 할머니나 10살짜리 아이가보따리에서 총을 꺼내 당신을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아주 더러운 전쟁이었다.

적들은 아이에게 탄약을 운반시키기도 하고, 보병의 습격을 감추기 위해 울고 있는 피란민을 미군대열로 들여보내기도 했다. 미군 병사는 미국 사회에서 대부분 피지배자이면서 차별받는 유색인종 출신이었다.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법무 공무원인맥그래스 법무장관은 공산주의자를 "쥐떼"라고 불렀다. 그래서 병사들도 오래지 않아 한국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고 그렇게 행동했다. - P433

조·중 연합군이 반격을 좌절시킨 결과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의 - P507

검토 절차는 종료됐고, 이 위기에 따라 의회는 결국 예산을 통과시켰다. 북한의 침공이나 인천 상륙 때문에 의회는 예산을 승인한 것이 아니었으며, 선거가 치러지는 해라는 원인도 중요하게 작용했다.127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으므로 서둘러 아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국가안보회의의 보고를 받은 뒤트루먼은 12월 15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방동원국을 신설해 제너럴 모터스의 회장 찰스 윌슨(초당파적 조정자로 아이젠하워 행정부 때 국방장관을 지냈다)을 수장으로 임명하고 "포괄적 권한"을 줬으며, 180억 달러에서490억 달러로 늘어난 국방비를 승인했는데, 이는 1950년 6월의 4배 수준이었다. - P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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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장

6월 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남북 정치 지도자들의 회담을 촉구하는 발표를 하면서 6월 19일 38도선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으며, 8월 초 한반도 전체에서 선거를 실시해 평화통일을 이루고 해방 5주년 기념일에 새로운 통일 국회를 소집하자고 요구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남한의 무소속 의원들에게 특별성명을 발표해 호소하면서 여운형을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조선 민족의 애국자"라고 불렀고, 김구가 암살된 것을애도했으며 김규식의 통일 노력을 칭송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의 복구를 요구했다. 무초는 북한이 이런 요구와 관련된 선전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았다고 말하면서, 그 주장은 "겉으로 보기에 합리적이며 "아직도 38도선의 철폐를 갈망하는 남한 여론 대부분과 국회의 "혼란스러운 자유주의 세력"에게 - P159

는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지방의회가 구성될 가능성은 없겠지만, 한국 전역에서 그로 인해 초래될 결과는 "전면적 내전의 전초단계"가 될 수도 있다고 무초는 지적했다. - P160

장제스가 직면한 난제는 타이완섬을 지키려는 국제협력주의자들과 총통을 옹호하는 반격론자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공군력은 나라를 구할수 있는 만능의 수단으로 생각됐기 때문에 국민당은 중국 본토의 연안 도시들을 폭격하고 남한에 공군기지를 확보해 만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장제스가 주력한 것은 미국 정치를 조종해 자신의 정권을 보호할 수 있는지원을 얻는 것이었다. 미 해군은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 P190

6월 17일과 23일 윌러비의 정보기관은 작은 배와 정크선, 예비병력 수송선이 모인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발견했지만, 그것이 임박한 침공을 예고하는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았다. 6월중순 영국 정보기관은 상하이에서도 전차 상륙함 10척, 중형 상륙함 9척으로 이루어진 "침공 함대"가 결집하고 있으며 2만 명이 상륙할 수 있는 상태라고 보고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도 침공을 위한 이런 함대 증강과 관련된 다른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공산당의 침공, 공군과 함대의 증강 등과 관련해 5~6월에 나타난 다양한 예측의 문제점은, 국민당의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내는 잡다한 정보들이 강력한 미국의 후원을 받는 국민당 자체가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위협이라는 사실을 덮고 있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보겠지만 공군력의 배치와 위협그리고 그 위협에 대한 대응은 1950년 후반 한국전쟁이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을 때 전쟁의 범위를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지만, 전쟁이일어나기 전에도 중요한 요소였다. 중국과 소련의 조처는 대부분 국민당의행동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 이면에는 워싱턴이나 도쿄에서국민당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 P219

"문서를 받자 애치슨은 당시 워싱턴을 떠나 있던 딘 러스크를 제외한 아시아 정책 고위 담당자를 모두 불러 회의를 소집했다."1맥아더는 타이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생각을 6월 3일 패트릭 브랜드 영국 해군 대장과 래드퍼드 미국 해군대장과의 회담에서 밝혔다. 맥아더는 "타이완이 연합국에 갖는 가치를 절감한다"고 밝히면서 장제스에게 군사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실책"이라고 말했다. 브린드는 맥아더의 발언에서 장제스에 대한 군사 지원은 현재워싱턴의 가장 큰 현안이고, 맥아더는 "정반대의 성명이 나오더라도 지원은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러므로 그가 덜레스와 러스크의 정책에 매우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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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살려고 버둥거려보았다. 그러나 주점을 걷을 수밖에 없었다. 옛날 같으면 외상이라도 좋으니 제발 좀 가져가라 하던양조장이었지만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식량이 통제되면서 양조업계에도 제동이 걸린 것이다. 생산량은 줄었는데 술 찾는사람은 많아졌고 알음알음을 통해 사가(私家)에서도 술을 청하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주점의 배당량이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술집은 모화보다는 사정이 나은 것처럼 보였는데 대강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뚝뚝한 자기 성격을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요 이미 성질 고약한 여자로 소문은나 있었다. 어쨌든 도가에서 나오는 술만으로는 장사를 할 수없었고 자연 밀주(密酒)를 사다가 도가 술과 함께 파는데 그것도 할 짓이 아니었다. 관서에 들키는 날이면 경찰서에서 오라가라, 유치장에서 자야 할 경우도 있었다. 그러고 나면 벌금을물고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밑지는 장사가 된다. 다른 술집, 특히 젊은 여자가 하는 술집도 밀주를 팔기론 매일반인데 모화같이 시끄러운 일이 좀체 없는 것 같았고 그들 나름의 수단과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 P138

‘이제는 끝난 거다!‘ 어렵자손으로 하여금 그들 조부들 죄의 핏자국을 닦게 하기, 씻게 하기 위하여 모든 우연이 있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상가에 내걸린 등불, 영원히 떠나보낼 그 어둡고 음습하고, 운명을 지배했던 존재를, 뿌옇게 열리고 있는 하늘을 보며 영호는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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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널리 제기되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북한이 지도부의 파벌 다툼 때문에침공했다는 것이다. 박헌영과 그 세력은 남한에 있는 자신들의 기반을 잃을까 우려했고 전면 공격을 일으키면 대중이 호응해 봉기해 공산주의의 승리를 신속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런 가설은 CIA, 김일성 지도부, 일본에서 작성된 한국 관련 자료 그리고 미국의 중요한 일부 학자가 동의한 특이한 사례다. 그 가설의 장점은 6월이라는 시점에 공격이 시작된 까닭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한에있던 유격대가 1950년 봄에 정말 소멸되고 거기에 토지문제가 더해졌다고가정하면, 그 가설은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될 수 있다. - P116

또 다른 학설은 북한은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하기 전에 통일을 추구하려고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지금 독자들은 이것을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묘한 시점이라는 요소가 있다. 몇 년 동안 북한은 이승만이 "북침해 한반도를 강제로 통일시키려고 한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은1945~1946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요구와 1948년 5월 총선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분단주의가 아니라 북침의 기반을 놓으려는 행동으로 언제나 해석했다. 내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1950년 5월에 처음으로 북한 문서는 이승만이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쟁 이후 상투적 표현으로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이것은 전쟁 이전 북한의 표현에서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앞의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어떻게 남한이 한반도의 항구적 분단을 바라는 동시에 북한을 공격하려고 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 P120

시카고트리뷴의 특파원 월터 시먼스는 1949년 11월 남한은 "놀라울 정도로 일본화된 상태로 남아있었다고 썼다. 학생들은 일본식 검은 제복을 입었고, 신문은 도쿄의 기사를 베낀 것 같았으며, 거리에서는 늘 일본어를 들을 수 있었다. "한국 지식인들은 이제 일본과의 경제협력이 대외무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며, 몇 달 만에 미국인 기술자는 텅스텐 생산량을 두배로 늘렸지만 대부분 일본으로 보내졌고, 1949년 말 한국 쌀 10만 톤이 일본으로 수출됐다고 시먼스는 지적했다.11950년 1월 미국 대사관은 "일본과 관계 회복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나타났다면서, "일본에 부역했다는 평판" 때문에 공직에서 멀리 배제됐던 신흥우가 이승만의 대리인으로 일본에 갔다고 지적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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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6-23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루스 커밍스의 이책 아주 오래전에 읽었습니다. 충격이 컸죠! 진실을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에.

거리의화가 2023-06-23 10:38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역시 읽으셨군요^^ 얼마전에 펀딩을 진행해서 이참에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진실은 100% 알수 없지만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어요.
 

나는 이미 보편적 욕망이라는 큰길을 떠나 보다 개별적인 욕 - P122

망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다른 만남을 바랐다면, 아주 먼 곳으로부터 큰길로 되돌아가 거기서 다시 오솔길로 접어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불로뉴 숲의 섬에서 내가 저녁 식사에 초대한스테르마리아 부인을 소유하는 것이 매 순간 내가 상상하던쾌락의 모습이었다. 만일 내가 그 섬에서 스테르마리아 부인없이 홀로 식사를 해야 한다면, 당연히 그 쾌락은 파기될 테고,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더라도 그 장소가 불로뉴 숲이아니라면, 쾌락은 아마도 상당히 감소될 것이다. - P123

우리는 사물의 실재를 추구한다. 그러나 실재는 지속적으로 우리 곁을 빠져나가고, 온갖 시도도 헛되이 우리는 허무를 발견하고, 그러나 그 자리에 뭔가 - P126

단단한 것이 남아 있으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던 것임을알게 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고 인식하면서, 설령 인위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는 그것을 구하려고노력한다.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옷이 의도적인 환상이라는 수단에 의해 그 믿음을 대신한다. - P127

안개 낀 섬에서 봉건 시대의 처녀를 만나려는 내 몽상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랑으로 가는 길을 터 주었다. 이제 내 환멸과 분노, 방금 날 거부한 여인을 다시 붙잡으려는 절망적인 욕망은, 거기에 내 감수성까지 끌어들이면서 지금껏 상상만으로 홀로 힘없이 그려보던 가능한 사랑에 내 시선을 고정시켰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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