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제기되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북한이 지도부의 파벌 다툼 때문에침공했다는 것이다. 박헌영과 그 세력은 남한에 있는 자신들의 기반을 잃을까 우려했고 전면 공격을 일으키면 대중이 호응해 봉기해 공산주의의 승리를 신속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런 가설은 CIA, 김일성 지도부, 일본에서 작성된 한국 관련 자료 그리고 미국의 중요한 일부 학자가 동의한 특이한 사례다. 그 가설의 장점은 6월이라는 시점에 공격이 시작된 까닭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한에있던 유격대가 1950년 봄에 정말 소멸되고 거기에 토지문제가 더해졌다고가정하면, 그 가설은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될 수 있다. - P116
또 다른 학설은 북한은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하기 전에 통일을 추구하려고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지금 독자들은 이것을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묘한 시점이라는 요소가 있다. 몇 년 동안 북한은 이승만이 "북침해 한반도를 강제로 통일시키려고 한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은1945~1946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요구와 1948년 5월 총선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분단주의가 아니라 북침의 기반을 놓으려는 행동으로 언제나 해석했다. 내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1950년 5월에 처음으로 북한 문서는 이승만이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쟁 이후 상투적 표현으로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이것은 전쟁 이전 북한의 표현에서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앞의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어떻게 남한이 한반도의 항구적 분단을 바라는 동시에 북한을 공격하려고 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 P120
시카고트리뷴의 특파원 월터 시먼스는 1949년 11월 남한은 "놀라울 정도로 일본화된 상태로 남아있었다고 썼다. 학생들은 일본식 검은 제복을 입었고, 신문은 도쿄의 기사를 베낀 것 같았으며, 거리에서는 늘 일본어를 들을 수 있었다. "한국 지식인들은 이제 일본과의 경제협력이 대외무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며, 몇 달 만에 미국인 기술자는 텅스텐 생산량을 두배로 늘렸지만 대부분 일본으로 보내졌고, 1949년 말 한국 쌀 10만 톤이 일본으로 수출됐다고 시먼스는 지적했다.11950년 1월 미국 대사관은 "일본과 관계 회복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나타났다면서, "일본에 부역했다는 평판" 때문에 공직에서 멀리 배제됐던 신흥우가 이승만의 대리인으로 일본에 갔다고 지적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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