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 말에 각지에 다양한 반역단이 잇따라 나타났으나 수왕조가무너진 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당(唐)이라는 새로운 왕조였다.
당나라의 이씨(李氏)는 수나라의 양씨(楊氏)와 마찬가지로 북주(北)팔주국의 하나다. 선비색이 짙다는 점에서도 아주 꼭 닮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수는 38년도 존속하지 못했는데, 당나라는 290년이나 이어졌다.
태생은 꼭 닮았으나 수와 당은 등장하는 방법이 달랐다. 수나라는 북주(北周)라는 기성(成) 왕조를 찬탈하고 남조(南朝)를 공격해서 천하를통일했다. 수의 등장에는 천하에 반역단이 횡행한 배경이 없다. 하지만당나라는 반역단이 천하에 가득한 시대를 무대로 탄생의 울음소리를 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정권 안에 반역단의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은 후한이나 위·진(魏晉)의 경우와 비슷하다. 굳이 말한다면 당나라 창업 공신 - P64

에 이적(李勣, 옛 이름은 서세적(徐世勣))과 울지경덕(尉遲敬德) 같은 반역단의성격을 띤 인물이 있다는 정도다. 이것 말고는 수나라와 다른 점이라고크게 꼽을 만한 것은 없다. - P65

황태자(건성)께서 만일 징(徵, 위징)의 말을 따랐다면, 반드시 오늘의 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징의 말‘이란 다름 아닌 세민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답이니 패자로서 대담무쌍한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위징은 이 말을 입에 담은 이상 분명 죽음까지 각오했을 것이다. 하지만태종은 위징을 용서하고, 첨사주부(詹事主簿, 동궁의 도장을 관장하고 공문서의 타당성을 검열하는 종7품 관리)에 임명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인물, 그런 사람은흔하지 않다. 태종은 여기에서 그런 인물을 발견했다. - P140

태평공주의 죽음으로 여성의 시대는 일단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여권은 크게 신장하여 당대(唐代)의 여성은 다른 시대의 여성에 비해 당당해보인다. 한대(漢代)의 미인은 조비연(飛燕)처럼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가볍고 가냘픈 것이 이상이었다. 반면 당대의 미인 조건은 좋은체격이었다. 이 시대의 그림이나 당삼채(唐三彩)에 등장하는 여성을 보면대개 통통하게 살이 쪘다. 양귀비도 체격이 좋았다. 무측천도 태평공주도 아마 체격이 좋았을 것이다. 이 시대의 여성은 다리를 벌리고 말을 탔다. 그전까지는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안장에 옆으로 걸터앉았다.
이것도 이 시대 여성의 기질을 말해 주는 풍속일 것이다. - P229

이백의 죽음으로 성당(盛唐)의 시는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당시의 배경이 된 시대는 지나가고 뒤에는 상처투성이의 산하만이 남았다.
왕유는 미처 달아나지 못했지만, 두보는 도망가던 도중에 안록산군에게 붙잡혀 장안에 연금되었다. 머지않아 그는 그곳에서 다시 탈출해 황제의 행궁이 있는 봉상(鳳翔)에 도달한다. - P279

두보는 이백과 나란히 성당의 2대 시인으로 불린다. 이백은 확실히 성당의 시인이었을지 모르지만, 두보의 뛰어난 시는 대부분 안사의 난이후의 것이라 역시 성당의 사람은 아니다.
두보는 오히려 다음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의 국운이 계속 기울고 있었다. 이후에 중흥이라고 부르는 시대도있기는 했으나, 무측천시대부터 개원(開元)에 이르는 그때의 전성기로 다시 돌아간 적은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산하를 직시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두보 이후의 시에서는 일종의 사회(社會派) 같은 요소가 느껴진다.
그런 느낌이 가장 농후했던 사람이 백거이(白居易)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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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08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그동안 위지경덕으로
알고 있었는데, ‘울지‘가 맞는
표현이고 하네요.

건성의 참모 위징은 춘추시대
공자 규를 모시던 관중 같은
존재였나 보네요.

이백과 두보의 시가 그 결이
다르다고 배웠는데, 저는 개인
적으로 후자가 더 마음에 드
는 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7-10 09:22   좋아요 1 | URL
저는 위징은 생각할수록 놀라워요. 건성을 왕으로 모시려고 주장했었는데 후에 태종이 그를 참모로 쓰는 걸 보면. 위징도 놀랍고 태종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

이백은 참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더라구요. 그래서 시의 양도 많지만 다양한 시를 남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백거이 시가 좋더라구요!ㅎㅎ
 
돌궐 유목제국사 - 아사나 권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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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관계는 상대적이다. 외교는 자국의 입장에서 정도의 차이에 따라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에서부터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는 치열한 수싸움의 세계이다. 외교에서 중요한 관계는 아마도 주변국이 될 것이다. 자국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외교는 안보와도 연결되어 인식되므로 그렇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꺼냈을까?

세계사적으로 유목 민족이 힘을 키운 적이 몇 차례 있었다. 돌궐, 위구르, 몽골, 오스만 등이다. 돌궐은 유목 제국의 황금기를 연 첫 주자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었다.
예를 들어, 한반도는 고대부터 근대에 오기까지 중국의 영향 하에 있지 않았던 적이 없다(좋든 싫든). 현재 남아 있는 문헌들이 대부분 중국의 것들이고(물론 일본도) 당연히 자신들의 입장에서 쓰여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변국들의 입장은 축소되거나 왜곡되어 기술된 경우가 많다. 자국의 역사가 있다면 중국이 써 놓은 기록과 비교해볼 수 있겠으나 고대로 갈수록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거나 있다 해도 부족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의 역사를 다각도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돌궐은 6세기부터 8세기까지 중앙아시아 초원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며 호령한 제국이다. 그 이전에 흉노가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범위를 차지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유목 국가로서는 최초의 타이틀을 가질 만하다.
돌궐은 552년 건국되어 급격하게 성장했다가(제1제국 시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서로 분열되고, 다시 일시적으로 힘을 되찾았으나 630년 당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그 후 한동안 당의 기미지배를 받다 그 세력권에서 벗어나 687년 국가를 재건하였으나(제2제국 시기) 이후 침체 및 부침의 과정을 거쳐 745년 멸망하게 되는데 이처럼 2세기 동안 다양한 양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국가가 성장에서 소멸의 시기를 겪지만 이처럼 제국으로 성장했다가 숨고르기를 하고 다시 일어나 제국을 형성하다니 놀라웠다.

이 책은 돌궐의 주도 집단인 아사나 세력에 주목하여 이들이 권력을 형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정리하였다. 아사나 집단의 역사는 곧 돌궐국의 형성과 소멸의 과정이다. 아사나는 5세기 바르콜 분지(톈산 산맥 북방)에서 발원해 6세기 초 유연과 고차가 대결하는 과정에서 알타이 산지로 이주하였다. 그때까지 아사나는 유연의 지배 하에 있던 대장장이에 불과한 집단으로 그나마도 건국 이전의 기록은 없고 건국 이후 중국 기록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그 기원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아사나 집단은 자신들이 국가의 주도 집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들은 과거 흉노, 오손 이래 북아시아의 정통성 계승을 상징해주던 이리 신화를 받아들여 하늘의 권위가 자신들에게 이어졌음을 강조했다(P97) .

돌궐은 건국 이후 몽골 초원과 중가리아를 넘어 서방으로 진출해 카자흐 초원을 거쳐 아랄 해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의 초원과 그 주변의 오아시스 지역 대부분을 통합하고 단일한 국가 체제를 만들어냈다. 돌궐은 과거 유목민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여 강력한 군주권을 확립하고 주변의 오아시스 상인 출신의 관료들을 채용하였다. 이를 통해 동서 교역로인 초원길을 바탕으로 거대한 교역 시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돌궐이 위치한 곳은 주변의 정주 세력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정주 세력의 힘이 강해지면 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반대로 약해지면 돌궐은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구조가 되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남북조 시기 이전 돌궐은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끝나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돌궐의 교역로가 해체되자 물자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게다가 수, 당은 돌궐을 끊임없이 견제하였다. 돌궐은 680년 재기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당나라의 지속적인 무력 대응으로 수나라 통일 이전의 제국 범위 만큼은 돌아오지 못한다. 결국 720년 이후가 되면 돌궐은 당조를 중심으로 한 질서를 받아들인다.

비록 한계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돌궐이 보여주었던 권위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한 교역 국가로의 지향, 즉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동서로 영역을 확대해 초원과 오아시스를 결합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기초로 장악한 동서 교역로를 바탕으로 중국으로부터 구득한 물자를 유통시키려고 한 방식은 이후 큰 영향을 미쳤다. 돌궐 이후 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위구르는 그의 권위를 철저히 부정했음에도 이와 같은 교역 국가로서의 지향은 강력하게 보여주었다. 이를 위해 위구르는 당조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카라발가순 같은 거대한 교역 도시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국가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또한 10세기 초의 거란(요) 역시 동부 몽골 지역으로부터 초원을 가로지르는 교통로를 장악, 유지하면서 화북과 만주 등지에서 확보한 재화를 동서로 유통시키려는 노력을 적극 보여주었다. 나아가 13세기 초에 등장한 몽골은 돌궐처럼 서방 진출에 성공해 중앙아시아의 교역로만이 아니라 주변의 정주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과거 초원을 최초로 통일했던 돌궐을 능가해 정주 지역마저 통제하는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발돋움했다(P595).
아사나가 유목 세계의 투르크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던 노력은 그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된 뒤에도 아시아 내륙에 펼쳐진 거대한 중앙 아시아 지역에 큰 유산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사나는 초원의 중요한 유목민 세력이었던 투르크들을 통합하기 위해 과거 투르크(고차)의 상징으로 북아시아의 중요한 신화소였던 '이리'까지 차용해 그들을 하나로 묶어내려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발전했던 200여 년의 돌궐사 전개 과정을 통해 '투르크'라는 강한 자의식이 초원 유목 세계 내에 형성될 수 있었다. 그 후 누구든 초원의 패자가 되려면 이것을 극복하든가, 아니면 이것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P596).

이 책의 장단점은 뚜렷하다. 장점은 사료로 비단 중국의 한문 문헌만 참고하지 않고 고대 투르크(오르콘룬) 문자로 쓰인 비문 자료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투르크 비문은 19세기 말 유럽 탐험대가 확인한 이후 연구자들의 오랜 연구 끝에 투르크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된 이후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돌궐은 이전 유목민들과 달리 6세기 후반 소그드인의 문자를 차용하고 680년 이후에는 고유의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였다. 사용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 일방적인 한문 자료로의 해석에서 탈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돌궐의 문자는 이후 위구르, 키르기스 등에서도 10세기까지 사용되었고 이후 거란, 서하, 여진, 몽골, 만주 등도 독자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선례를 만들었다. 단점은 (아사나 집단의 세력에 주목하였기 때문에) 내용의 구성과 책의 분량, 시간상의 제약으로 몽골 중심으로 전개된 부분만 다루어져 서돌궐의 범위까지는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책을 펴 준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고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정주 세력인 중국의 자료로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래서 유목 세력의 역사들을 함께 고찰해야 일방적인 해석을 벗어나 빈 공간의 역사를 메우고 왜곡된 역사를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수, 당이 고구려에 몇 차례나 공격에 막히고 고구려 이후 대조영이 세력화하기까지 돌궐과 생각보다 많은 관련이 있어 흥미로웠다. 아주 유익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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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08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 역사를 보면 정주민인 한족과
유목민족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습니다.

청조 멸망 이래 한족의 중원지배가
불과 한 세기 정도 밖에 안된다는 걸
볼 때, 다시 유목민족이 발흥하게 될
지도 모르겠네요.

거리의화가 2023-07-10 09:15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도 중국은 주변 민족들을 중화라는 명분 아래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죠. 세력이 끊임없이 교체한 역사를 확인해볼 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희선 2023-07-09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궐이 큰 나라였네요 돌궐이라는 말은 알아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큰 나라라고 해서 그게 오래 이어지지 않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거 생각하면 지금 한국은 언제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한국 사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오니... 역사에는 남겠지만... 돌궐 역사를 보면 고구려나 발해도 조금 알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10 09:19   좋아요 0 | URL
네. 돌궐이 굉장히 넓은 땅을 소유했더라구요. 이전의 흉노족이 있기는 했지만 땅의 범위가 더 컸다고 하는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2세기 정도 이어진 걸 보면 결코 짧은 시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수나라는 단 38년을 유지했으니까요^^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며 후대에 유목 민족의 하나의 루틴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흥미로웟습니다.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단일 민족임을 강조하지만 사실 우리 피에는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죠. 기원설도 여러 개가 있고요. 그리고 이만큼 오래 지났는데 설마 하나이기는 하겠습니까! 고구려, 발해, 수, 당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었답니다^^
 

아사나는 비록 부흥 과정에서 아사덕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약화되었던 자신의 권위를 부활시켜 자신을 중심으로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다. 특히 카프간 카간은 대외 확장 정책의 성공을 통해 체제를 안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확보된 백성을 토대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체제를 구축했다. (배움 돌궐 사자와 만나게 했다. 이렇돌궐은 이제 몽골 초원에서 고비를 넘어 남부 초원까지 나아가 이곳의유목민들을 되찾고 흑사성 주변에 오르두(아장)를 설치해 무주를 위협할 만큼 성장한 것이었다. 이 무렵 돌궐의 이런 발전은 과거 동돌궐이630년 붕괴되기 전 일릭 카간이 당조를 상대로 위세를 떨칠 때와 비슷하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발전이 서방의 오아시스를 비롯한 서돌궐 지역에까지 진출해 과거와 같은 거대한 유목제국의 재건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프간 카간이 다시금 몽골 초원을 차지하고 유목 세계의 질서를 이끌게 된 점은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존적-存당조 중심의 기미지배 체제가 해체되면서 돌궐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낼 주체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P439

당시 돌궐에 복속되었던 초원의 유목 부락들은 "서쪽으로 튀르기쉬 - P471

의) 사칼을 멸망시키고 결국 거란과 해마저 정복하는 데 그 부하들을 가혹하게 부려 먹었다. 이미 늙어 점차 정신이 흐려져 포학하게 대하자 부락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배반했다"라고 한 것처럼 원정에 계속 동원하자지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계속된 원정 참여에도 불구하고 카프간카간이 합당한 급부를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유목 부락들의 원정 참여는 그만큼의 이익이 생겨야 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패배로 인한 타격이 더욱 심각했기 때문TOE이다. 따라서 이후 서부에서 패배해 시작된 내부의 균열은 카프간 카간을중심으로 한 돌궐 지배 체제의 약화로 이어졌다. - P472

반면 빌게 카간은 카프간 카간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된 당조의 포위 전술과 북벌, 부락민들의 이탈 등으로 인한 위기를 벗어나 비로소 다시 초원의 유목 부락들을 포섭하고, 나아가 남쪽으로 도망갔던 부락들도 불러들일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부로 진출해 다른 한편으로 오르도스에 있던 소그드 상인들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외교적 교섭을 통해 당조와의 관계도 개선했다. 이는 빌게 카간이 대내외적 위기를 벗어나 초원의지배자로서 재기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이로써 몽골 초원 내부를 안정시키고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권위를 강화하려고 했던 빌게 카간의 노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 P498

당시 빌게 카간은 당조의 강력한 대외 정책으로 카프간 카간 시기에 비해 많은 백성을 잃고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서 떨어져나간 - P534

주변 세력들로부터 강력한 도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동생은 동분서주하며 이를 막아내 몽골 초원의 패자로서 자리매김하려고 했다. 그런데이제까지 그를 돕던 킹메이커이자 장인인 빌게 톤유쿠크와 자신을 추대해 카간으로 만들어준 퀼 테긴마저 죽으면서 그는 자신에게 닥쳐올 위협에 대응해야만 했다. 특히 당조가 주변 세력들과 연합해 자신을 포위하고북벌할 가능성을 봉쇄하려면 많은 노력이 절실했다. 따라서 가능하면 전쟁을 벌이지 않기 위해 현종에게 협조적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야 했는데, 제사 시설의 건축은 그 좋은 매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내적으로도 동생의 죽음과 관련해 그동안 별다른 교섭을 하지못하던 당조로부터 엄청난 사절단과 제사 시설을 만들 뛰어난 장인들이파견되었다는 사실 역시 중요했다. 실제로 제사 시설이 중국적이냐 돌궐식이냐의 형식 문제보다 빌게 카간에게는 당조가 파견한 기술자들이자신들을 위해 일했다는 점과 그 결과물로 이제까지 초원에서 볼 수 없었던 ‘랜드마크‘가 건설되어 백성들의 주목을 끌 수 있다는 점이 더욱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실제로 확인시켜주는 상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535

이제까지 돌궐이 당조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벌인 노력은 주변 세력을 개별적으로 상대하고 지원함으로써 세력 균형을 이루려고 했던 현종의 입장과 배치되었다. 현종은 당조를 도발하지 않겠다며 경제적 교류를강하게 원했던 빌게 카간의 요구를 절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실제로 퀼 테긴의 사망으로 다시 기회가 왔음에도 734년에 가서야 비로소 혼인을 받아주었다. 이것만 아니라 여전히 고비 남부에 군사를 배치하고 주변 세력들과 연합해 돌궐에 계속 압박을 가했다. 이를 통해 현종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고, 이것은 이른바 ‘개원의고 평가받는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현종이 결국 빌게 카간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은 당시 거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현종이 거란에 원정을 떠났던 돌궐을 어떤식으로든 무마하기 위해 화친을 받아주려고 하자 양국 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하지만 돌궐에서 빌게 카간이 부의룩 초르(Buyiruq chor로 추정, 매록철梅錄)에게 독살되는 돌발 변수가 발생함에 따라 다시 상황이 급변했다. - P541

이상과 같이 돌궐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마지막 저항 세력이었던 바얀카간(Bayan qaghan으로 추정. 백미가한白眉可汗)을 위구르의 바얀 초르가 죽인다음 그의 수급을 정월에 당조로 보냈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아사나종실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몰락과 함께 쿠틀룩 야브구와의 대결에서 패배해 본거지로 밀려났던 빌게 카간의 카툰 바벡 역시 745년 8월 당조에 투항했다. 즉 인척 씨족인 아사덕마저 초원에서 완전히 밀려났던 것이다. - P562

740년대 중반 붕괴 이후 당조에 내려와 투항하고 돌궐 출신 번장으로서안녹산에게 봉사하던 아사나종례가 일으켰던 부흥 운동이 실패함에 따라돌궐의 지배 집단인 아사나를 중심으로 한 움직임은 더 이상 역사의 전면 - P575

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내지의 다른 아사나 일족 역시 안녹산과 사명, 그리고 복고회은 등의 연이은 봉기를 거치며 이후에 더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또한 10여 년에 걸친 혼란 속에서 돌궐 외에 당조 내에서 활약하던 투르크계 유목 부락들 대부분이 약화되었으며, 일부는 위구르에 통합되기도 했다. 따라서 유목 세계를포함한 동아시아는 세력 재편 과정을 거치면서 당조의 공식적 인정을 받은 위구르가 몽골 초원의 유일한 새로운 패자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쪽에서 당조를 압박하던 토번 역시 국제 질서의 중요한 축의하나로 등장하면서 경쟁을 벌였다. - P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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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미국의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에 대한 설명들이 유독 아리송한 것들이 많다.

여성들이 남성과 산다는 사실, 어떤 면에서는 최악으로 불리한 사실—-여성들의 상호 고립은 과거 여성해방운동의 부재나 약세에 책임이 있다—-이 다른 의미에서는 이점이 되는 것이다. 모든 침실에서의 혁명가는 현재의 상태를 뒤흔들지 않을 리가 없다. 만일 저항하는 사람이 아내라면 그저 교외로 떠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그것의 목적을 진정으로 성취할 때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를 뚫고 들어갈 것이다.
->
여성이 남성과 산다는 것이 성 역할 이데올로기 면에서 불리한 것은 맞겠으나 이게 어째서 이점이 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권력심리의 깊은 뿌리인 성적 계급과 가족구조에서 태어난 사람이 권력심리를 없애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다. 많은 여성들이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해본 적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여성이 남성과 동일시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복종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배적인 본성까지 근절시켜야 하는 특이한 처지에 처해있다.
-> 여성이 남성과 동일시하면서 살 수 있나? 근본적으로 불가능해보이는데 말이지. 같은 여성이라도 맥락과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게 아닐까. 남성이 다수인 환경 속에서도 여성이 자신을 스스로 위치시키는 것과 별개로 그 사회의 세계에서, 다수인 남성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를 수가 있다. 복종적인 본성과 지배적인 본성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것도 상황별로 다를 것 같다. 결국 권력자와 피권력자의 위치성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복종과 지배 관계인데 둘 다 근절이 어떻게 가능한가. 누구 하나는 반드시 권력자의 위치에 서게 되고 그 반대는 피권력자의 위치에 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여러 번을 읽어도 앞 뒤 문장이 맥락이 뚝뚝 끊겨서 이해가 안 간다.

그들 시대의 이러한 ‘개혁가들‘, 즉 여성 ‘급진주의자들‘은 기껏해야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진정한 페미니스트도 진정한 급진주의자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여성의 대의 그 자체를 정당한 급진적 문제들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권운동을 다른 것, 즉 더 중요한 정치운동과 접선하는것으로만 파악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 자신을 결함 있는남성defective men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여성과 관련된 문제들은 ‘특수하고‘ ‘당파적인‘인 반면, 남성과 관련된 문제들은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보였다. 남성들이 지배한 운동 안에서정치적으로 성장하면서 그 운동을 벗어나 자신들의 운동을 하기보다는 그 운동 안에서 입지를 개조하는 데 몰두하였다. - P36

투표권이승인될 당시 페미니스트들이 에너지를ㅡ정치권력에로의 첫걸음으로만 보였던 선거권이라는 제한된 목표에 오랫동안 쏟은 것은 여권운동을 철저하게 고갈시키는 것이었다. 투표라는 괴물은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 P41

우리가 신봉해온 역사적 해석으로볼 때, 페미니즘은 여성을 성적-생식적 역할의 압제the tyranny of theirsexualreproductive roles-기본적인 생물학적 조건 자체, 이 생물학적 조건 위에 구축되고 강화된 성적 계급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기술의 발전에 대한 여성의 필연적인 반응인 것이다. - P54

‘전국여성기구‘는 성차별주의의 보다 피상적인 증상들법적 불평등, 고용차별 등에 집중한다.
그러므로 정치성에 있어서 그것은 세기가 바뀌는 무렵의 선거권운동 단체였던 캐리 채프먼 캣의 ‘전국미국여성선거권협회‘와가장 유사하다. 성 역할로부터의 해방이나 가족의 가치에 대한급진적 질문 보다는 주어진 체제 내에서의 법적·경제적인 남성과의 평등을 강조한 것이다. ‘전국미국여성선거권협회‘처럼 ‘전국여성기구‘는 정치적 원칙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단일 문제에 관한 정치적 승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 P56

좌파의 모든 주요 당파, 심지어 이제는 일부 노동조합까지도 상당한 저항 후에 조직 내의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반대 운동을하고 여성들의 더 큰 의사결정권을 논하는 여성해방 간부회의를가진다. 이 간부회의의 정치운동가들은 좌파 정치운동의 제한된영역 내에서 자신들의 상황을 향상시키는 것이 주목적이라는 의미에서 개혁주의자이다. 다른 여성들은 기껏해야 그들의 주요한 ‘지지자들‘일 뿐이며 여성문제 그 자체는 ‘더 큰 투쟁‘ 속에 여성을 끌어들여 ‘급진화시키는 유용한 도구 이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른 여성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조직가적 접근, 즉 가르치려 하거나 전도하려는 경향이 있다.-> 좌파의 여성 보조부대 - P57

자신들의 뚜렷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적합하든 그렇지 않는, 전통적인 (남성) 좌파의 분석.수사 · 술책 · 전략을 명백하게 모방하는 것은 어디에선가 억압받는 자매들에 대한 지나친 감상으로 보상받는다. 신심이 모호하기 때문에 정치운동도 그런 경향이 있다.
만약 직접적으로 여성을 착취하는 원인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아도, 그들은 남성이 착취와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것을 암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성들은 형제들이다. 여성들은자매들이다. 만일 적에 대해 어쨌든 말해야만 한다면, 왜 대놓고제도 The System라고 말하지 않는가? -> 중도적 정치운동가 - P59

그들 자신의 욕구를 우선시 못 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하여 남성의 승인을-이 경우에는 기존 질서에 반하는 남성의 승인-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필요한 때에 다른 운동으로부터 이탈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단지 좌파 개혁주의, 창의성 결핍,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치적 불모성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여성해방운동에 있어서 보다 투쟁적인 급진적 페미니즘과의 대조는 보수적 페미니스트뿐만 아니라 정치운동가들까지도 방어적으로 만들어 결국에는 급진주의를 증대시켰다. -> 페미니스트 정치운동가 - P61

급진적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 문제들을 여성들의 최우선적인 문제로 볼 뿐만 아니라 더 큰 혁명적 분석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본다. 급진적인 페미니즘은 현존하는 좌파의 분석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너무 급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현재의 좌파의 분석을 구식이고 피상적인 것으로본다. 왜냐하면 그 분석이 경제적 계급제도의 구조를 그것의 기원이며 모든 다른 착취제도들의 모델이기도 한 성적 계급제도와연결하지 않고, 따라서 진정한 혁명이라면 처음으로 제거되어야만 하는 기생충과 연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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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mal Farm and 1984 (Hardcover)
Orwell, George / Houghton Mifflin Harcourt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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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도 의심해야 하는 세상에서 항시 긴장하며 정신을 챙겨다니는 일이 가능할까. 온전한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그 반대의 상황은 상상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지. 이 세계는 정말 살아가고 살아남는 것이 치욕일 수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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