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나는 비록 부흥 과정에서 아사덕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약화되었던 자신의 권위를 부활시켜 자신을 중심으로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다. 특히 카프간 카간은 대외 확장 정책의 성공을 통해 체제를 안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확보된 백성을 토대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체제를 구축했다. (배움 돌궐 사자와 만나게 했다. 이렇돌궐은 이제 몽골 초원에서 고비를 넘어 남부 초원까지 나아가 이곳의유목민들을 되찾고 흑사성 주변에 오르두(아장)를 설치해 무주를 위협할 만큼 성장한 것이었다. 이 무렵 돌궐의 이런 발전은 과거 동돌궐이630년 붕괴되기 전 일릭 카간이 당조를 상대로 위세를 떨칠 때와 비슷하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발전이 서방의 오아시스를 비롯한 서돌궐 지역에까지 진출해 과거와 같은 거대한 유목제국의 재건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프간 카간이 다시금 몽골 초원을 차지하고 유목 세계의 질서를 이끌게 된 점은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존적-存당조 중심의 기미지배 체제가 해체되면서 돌궐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낼 주체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P439

당시 돌궐에 복속되었던 초원의 유목 부락들은 "서쪽으로 튀르기쉬 - P471

의) 사칼을 멸망시키고 결국 거란과 해마저 정복하는 데 그 부하들을 가혹하게 부려 먹었다. 이미 늙어 점차 정신이 흐려져 포학하게 대하자 부락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배반했다"라고 한 것처럼 원정에 계속 동원하자지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계속된 원정 참여에도 불구하고 카프간카간이 합당한 급부를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유목 부락들의 원정 참여는 그만큼의 이익이 생겨야 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패배로 인한 타격이 더욱 심각했기 때문TOE이다. 따라서 이후 서부에서 패배해 시작된 내부의 균열은 카프간 카간을중심으로 한 돌궐 지배 체제의 약화로 이어졌다. - P472

반면 빌게 카간은 카프간 카간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된 당조의 포위 전술과 북벌, 부락민들의 이탈 등으로 인한 위기를 벗어나 비로소 다시 초원의 유목 부락들을 포섭하고, 나아가 남쪽으로 도망갔던 부락들도 불러들일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부로 진출해 다른 한편으로 오르도스에 있던 소그드 상인들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외교적 교섭을 통해 당조와의 관계도 개선했다. 이는 빌게 카간이 대내외적 위기를 벗어나 초원의지배자로서 재기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이로써 몽골 초원 내부를 안정시키고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권위를 강화하려고 했던 빌게 카간의 노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 P498

당시 빌게 카간은 당조의 강력한 대외 정책으로 카프간 카간 시기에 비해 많은 백성을 잃고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서 떨어져나간 - P534

주변 세력들로부터 강력한 도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동생은 동분서주하며 이를 막아내 몽골 초원의 패자로서 자리매김하려고 했다. 그런데이제까지 그를 돕던 킹메이커이자 장인인 빌게 톤유쿠크와 자신을 추대해 카간으로 만들어준 퀼 테긴마저 죽으면서 그는 자신에게 닥쳐올 위협에 대응해야만 했다. 특히 당조가 주변 세력들과 연합해 자신을 포위하고북벌할 가능성을 봉쇄하려면 많은 노력이 절실했다. 따라서 가능하면 전쟁을 벌이지 않기 위해 현종에게 협조적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야 했는데, 제사 시설의 건축은 그 좋은 매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내적으로도 동생의 죽음과 관련해 그동안 별다른 교섭을 하지못하던 당조로부터 엄청난 사절단과 제사 시설을 만들 뛰어난 장인들이파견되었다는 사실 역시 중요했다. 실제로 제사 시설이 중국적이냐 돌궐식이냐의 형식 문제보다 빌게 카간에게는 당조가 파견한 기술자들이자신들을 위해 일했다는 점과 그 결과물로 이제까지 초원에서 볼 수 없었던 ‘랜드마크‘가 건설되어 백성들의 주목을 끌 수 있다는 점이 더욱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실제로 확인시켜주는 상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535

이제까지 돌궐이 당조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벌인 노력은 주변 세력을 개별적으로 상대하고 지원함으로써 세력 균형을 이루려고 했던 현종의 입장과 배치되었다. 현종은 당조를 도발하지 않겠다며 경제적 교류를강하게 원했던 빌게 카간의 요구를 절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실제로 퀼 테긴의 사망으로 다시 기회가 왔음에도 734년에 가서야 비로소 혼인을 받아주었다. 이것만 아니라 여전히 고비 남부에 군사를 배치하고 주변 세력들과 연합해 돌궐에 계속 압박을 가했다. 이를 통해 현종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고, 이것은 이른바 ‘개원의고 평가받는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현종이 결국 빌게 카간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은 당시 거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현종이 거란에 원정을 떠났던 돌궐을 어떤식으로든 무마하기 위해 화친을 받아주려고 하자 양국 관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하지만 돌궐에서 빌게 카간이 부의룩 초르(Buyiruq chor로 추정, 매록철梅錄)에게 독살되는 돌발 변수가 발생함에 따라 다시 상황이 급변했다. - P541

이상과 같이 돌궐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마지막 저항 세력이었던 바얀카간(Bayan qaghan으로 추정. 백미가한白眉可汗)을 위구르의 바얀 초르가 죽인다음 그의 수급을 정월에 당조로 보냈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아사나종실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몰락과 함께 쿠틀룩 야브구와의 대결에서 패배해 본거지로 밀려났던 빌게 카간의 카툰 바벡 역시 745년 8월 당조에 투항했다. 즉 인척 씨족인 아사덕마저 초원에서 완전히 밀려났던 것이다. - P562

740년대 중반 붕괴 이후 당조에 내려와 투항하고 돌궐 출신 번장으로서안녹산에게 봉사하던 아사나종례가 일으켰던 부흥 운동이 실패함에 따라돌궐의 지배 집단인 아사나를 중심으로 한 움직임은 더 이상 역사의 전면 - P575

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내지의 다른 아사나 일족 역시 안녹산과 사명, 그리고 복고회은 등의 연이은 봉기를 거치며 이후에 더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또한 10여 년에 걸친 혼란 속에서 돌궐 외에 당조 내에서 활약하던 투르크계 유목 부락들 대부분이 약화되었으며, 일부는 위구르에 통합되기도 했다. 따라서 유목 세계를포함한 동아시아는 세력 재편 과정을 거치면서 당조의 공식적 인정을 받은 위구르가 몽골 초원의 유일한 새로운 패자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쪽에서 당조를 압박하던 토번 역시 국제 질서의 중요한 축의하나로 등장하면서 경쟁을 벌였다. - P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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