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중국사 당 - 열린 세계 제국 하버드 중국사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김한신 옮김 / 너머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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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중국인은 당唐 왕조를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화 제국의 절정기로 인식하고 있다. (...) 중국인이 전통적으로 찬양하는 군사적 정복과 뛰어난 시문의 등장은 당 왕조의 전반기에 이루어졌다. 당 조정은 8세기 중반에 격변을 불러온 반란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하였고, 수십 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중국의 정치가와 문인들은 지나가 버린 왕조의 전성기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은 그 지나간 영광의 그늘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와 예술에서의 초기 업적에 대한 찬양은 후대 왕조들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당 왕실이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 5세기와 6세기에 중국 북부를 지배하고 있었던 모든 변방의 '오랑캐'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었다. - P17~18

당은 중국 역사 사상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찬란한 시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는 현종 초기, 안녹산의 난이 발생하기 전 시기로 국한지어야 한다. 그 이후에는 당 초기만큼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당 후기 이후 북부 지역에는 돌궐을 비롯하여 티베트 등 강한 이민족의 힘이 당을 억눌렀는데 이는 당 후기까지 내부의 반란 세력과 결합하면서 당을 괴롭혔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당의 전기와 후기가 어떻게 달랐는가.

당대 초기 중국 북부 지역에서는 균전제가 행해졌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국가가 소유한 토지를 경작 가능한 가구들에게 주기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토지를 지급받는 모든 가구에 대하여 동일하게 부가되는 세금 체계가 소유한 토지에 따라 연결되었다. 군사 체계로는 전방에 이민족 유목민 부대를, 변경에는 직업군인들을 배치하고 수도에는 정예군을 배치하는 구조였다. 수도와 다른 주요 도시들은 벽으로 구분하여 거주 구역을 두고 교역은 특정 시장에서만 열도록 제한을 두었다. 사회는 소수의 최상위 대가문들이 독점하였다. 문학적으로는 장식적이고 인위적인 스타일의 작문이 강조되었다.
이것이 당 후기가 되면 국가는 부병제를 포기하고 직업군인(모병제)로 전환된다. 도시 내 교역에서는 공간적 제약이 사라지고 도시 생활은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의 구분이 사라졌다. 또 정부가 황하 유역 대부분의 지역을 지킬 수 없게 되면서 양자강 유역이 경제 중심지이자 국가 재정 수입상 가장 중요한 지역이 된다. 남부의 항구를 통해 해상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기존의 한국, 일본 같은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을 넘어서서 동남아시아, 인도, 페르시아 해협의 해안 지역들과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문학적으로는 개인의 사생활이나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룬 장르의 운문들이 등장하고 남녀 사이의 관계나 내면을 탐구하는 소설도 나타난다.

당 왕조가 멸망할 즈음에는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하였다. (...) 전통적으로 중심지였던 북서부 지역은 장기간의 경제적 · 생태적 쇠퇴가 시작되어 오늘날과 같은 빈곤하고 반 사막인 후배지後背地로 전락하게 된다. 중원 평야는 인구학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뿐 아니라 중국 문화의 전형으로서의 광채를 상실하였다. 북동부(오늘날의 하북성과 산동성)는 거의 이민족화되어 경계 지역이 되었고, 그중 몇몇은 이후 몇 세기 동안 중화 지역과 다시 결합하지 못하였다. (...) 양자강 하류 지역과 그 남부 지역은 풍부한 강수량과 풍요로운 식생 그리고 편리한 수상 운송으로 인하여 중국의 인구학적 그리고 경제적 중심지로서 점차 황하 유역을 대체하고 있었다. - P29~30

인상적이었거나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위주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겠다.

지역 간 거래의 성장과 더불어 제국 전체를 포괄하는 금융거래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당 말과 송대 사이의 시기는 지폐, 약속어음 그리고 다른 형태의 종이로 된 신용거래에서 혁명적 변화가 발생하였고, 이는 현금이라고 알려진 많은 양의 무거운 동전 꾸러미들을 대체하였다(P239). 교역이 늘어 기존의 동전들을 가지고 다니기 어려워지면서 화폐와 어음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화폐 시스템의 기본이 되는 지폐가 이 때 등장했다는 게 놀랍다. 군부대의 병사들이 고향에서 곡식으로 구입한 영수증으로 부대에서 음식을 살 수 있었다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구내 식당의 '식권' 같은 개념이다. 상인들이 도성에서 정부로부터 권리를 구입하면 이것을 지방 금고에 가져가서 동일한 액수의 현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날아가는 현금'). 이는 비단 오늘날의 은행과 다를 바가 없다. 다양한 종류의 종이로 된 신용 증권도 이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종이돈이 장례식에 사용되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중국인의 문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차 마시는 문화가 아닐까. 차가 제국 전체에서 보편화된 음료로 발전한 것이 당대에 와서라고 한다. 차 마시는 행위는 다양한 문화적 활동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다. 북부 지역에서 차 음료의 확산은 많은 이유로 불교 사찰에서의 차의 사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는데 승려들이 오후에 고체로 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어 액체의 음료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란다. 이후 차 음료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대접의 수단으로 확산되었고 조정에서는 의식에 사용되는 등 다양한 부분에 전파되었다.

안녹산의 난 발발과 티베트에 의한 북서부 지역의 점령은 아랍 세력이 중앙아시아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침공의 성공은 18세기에 만주족이 점령할 때까지 중국 왕조들이 돈황을 경계로 그 서쪽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건은 불교 세계의 한 부분이자 중화 문명의 영향이 미치는 부분으로서의 중앙아시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P319). 당 초기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당나라는 안녹산의 반란으로 내부의 위기, 서북쪽의 티베트의 공격으로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상실한다. 이후 중앙아시아는 아랍 세력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대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국내에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다. 기본적으로 사채업, 그 이외에도 주점은 소그디아 인 또는 토카라 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운영하였고, 주민들에게 제공되는 예능과 매춘에서는 비중국적 취향이 매우 보편적이었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여성이 시중을 들거나 예능인인 외국인 소유의 주점과 선술집은 당대 시나 예술의 일반적인 주제였다. 중앙아시아 음악은 도시 전체에서 큰 유행이었고 수도에서부터 모든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8세기가 되자 중국의 대중음악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들의 음악과 거의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P337~338). 당이 참으로 국제적인 도시였음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때 중앙아시아의 음악이 중국 내 유행을 했고 거의 주류 음악처럼 되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심지어 현종과 양귀비의 애창곡도 중앙아시아 노래의 번안곡이었다고 한다.

당대의 여성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시기라는 이미지가 있다. 아무래도 무측천, 그녀의 딸인 태평공주와 위황후가 반 세기 이상의 기간을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멸망 이후 중국 북부 지역을 차지한 유목민들이 중국에 가져온 것으로 유목 사회는 기본적으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흥미롭다(물론 당에 비해서 남녀평등하다는 것이었을 것이지만). 6세기 인물인 안지추는 당시 여성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북부 지역의 여성들을 법률적 사안을 직접 처리하고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남자 친족을 위해서 정부 청사에 들어가 탄원과 고소를 할 수 있었다. 7세기 중반 이후 당대 황후들의 권력은 여성들이 다양한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북방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강력한 황후들의 존재 뿐 아니라 당대는 공주들의 정치 참여가 두드러졌다(P357~358). 

수나라 때 전래된 불교는 당나라 때 와서 중국식화된다. 그 전까지 불교는 외래 종교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는 생사관과 의례 체계의 기저를 이루는 불교 사상의 많은 체제들이 중국의 종교(민간신앙) 속으로 융합되었다. 서구에서 연옥이 있듯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망한 친족을 구제할 수 있었던 완전히 새로운 도구가 등장한다. 이 새로운 연옥은 시왕경에서 가장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사망한 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10곳의 연속된 법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각의 법정은 당대의 재판장을 모델로 묘사된 것으로서 각 법정을 지배하는 왕들(십왕)은 개인의 인생의 기록들을 조사하는 재판관의 역할을 하였고, 만일 필요하다면 죄의 완전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 고문을 할 수도 있었다. 법정을 떠난 이후에, 그 사망한 자들은 다음 생에서 환생할 상태가 결정되는데, 선행을 베푼 자들은 보다 나은 상태로 환생하고 악행을 행한 자들은 더 나쁜 상태로 환생한다(P381).

시를 새로운 무대와 사회계급으로 옮기고 복고의 정치-윤리적 담론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당대에 시인들은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개척할 수 있었다. 시를 짓는 것은 사교적 세련미의 차원에서 극히 중요한 문제로 격상되었다. 시인은 유럽의 낭만주의에서 찬양하였던 기인과 '천재'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인물이 되었다. 시는 지식인들의 소명이 되었고 시인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특정 작가들은 시를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직업'으로 묘사하였고 시인에게는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소유권'이 보장되었다(P514). 그러니까 당나라 때 오면 시인이 지식인을 넘어 직업인으로서 대우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당시(唐詩)가 하나의 장르가 된 것처럼 시는 당대는 물론이고 이후 지식인들이 갖춰야 할 덕목 같은 것이 되었다. 게다가 시가 개인적 소회를 푸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두보나 백거이 등은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시들을 많이 발표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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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7-25 0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나라는 시인이 일이었다니... 그러니 두보나 백거이 시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겠습니다 그 뒤에도 시인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겠습니다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런 게 죽 이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네요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에는 여성과 남성을 비슷하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5 08:58   좋아요 1 | URL
그 전까지는 시인이라는 직업이 생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위진남북조 시기 도연명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가 본격적인 장르가 되고 시인들이 여럿 탄생하면서(그만큼 시상이 떠오를 일이 많았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흘러왔던 것 같습니다.
당나라 여성의 삶이 서술된 것만으로도 힘이 제법 있었구나 싶더군요. 송나라, 명나라 오면서 문치주의로 인해 그 힘이 약화된 것이 아쉬워요.
 
콜드브루 파우치 브라질 산토스 NY2 디카페인 - 40ml*5ea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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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브루를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브라질 원두를 좋아해서 확인차 샀는데 역시 고소해서 좋았다. 파우치 형태라 들고 다니면서 먹기에도 편하고 콜드브루니까 아주 더운 날 아이스로 마시면 좋다. 먹어보니 역시 우유랑 찰떡궁합인데 저지방우유 말고 생우유 적힌 양보다 적게 해서 마시면 더욱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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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23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지방/무지방우유 넣은 라떼는 라떼가 아니다!! 그 밍밍함 용서못해....

거리의화가 2023-07-24 08:50   좋아요 2 | URL
보통 디카페인은 오후 늦게나 저녁에 먹으니까 저지방 우유를 넣어봤는데 역시 그냥 우유만 못하죠. 역시 라떼는 고소해야!^^

scott 2023-07-24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디카페 좋습니다
자칭 커피 중독자인 저
쌀자루보다 원두 자루를 더 소중히 여기는
제가 인정 ^^

거리의화가 2023-07-24 13:11   좋아요 1 | URL
디카페인 보통은 원두로 시켰었거든요. 제가 아이스를 잘 안 먹다보니까 콜드브루는 좋아하지 않는데(그 특유의 향 때문에) 우유랑 먹으니까 좋네요. 저도 커피 중독자라 줄어드는 원두량이 어마어마합니다!
 

북동부 지역의 군사화는 4세기 진 조정의 남천 이후 수많은 비한족의 정착과 관련이 있었다. - P41

안녹산의 반란 이후에 독립적인 절도사節度使들의 성장은 북동부 지역을 당 조정에 대한 저항의 영구적인중심지로 만들었다. - P42

당 조정에게 중원 평원은 경제적·정치적으로 부차적인 지역이었다. 반면에, 그 지역은 당대에 대단한 문화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 P43

사천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중국 남서부 지역으로서당대에 동남쪽의 양자강 하구 유역만큼의 경제적인 중요성은 없었지만, 티베트(토번)와 남조南沼가 7세기 후반기부터 이 지역에서 발흥하기 시작하면서 중요한 군사적 중심지로 대두하였다. - P44

당대에 남부 지역은 양자강과 그것의 네 갈래 주요 지류의 하천 유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늘날 호북, 호남, 강서, 산서의 진령산맥 남쪽과 안휘 남부, 강소남부, 절강북부가 이에 해당된다. 비록 그 지역은 구릉지였지만,
강수량은 일정량을 유지하였고 호수, 강, 하천들이 풍부하였다. 남부지역은 한랭한 북부 지역에 비해서 곡물 성장 시기가 길어서 보다 긴시간 동안 다모작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우월한 자연 조건으로 인하 - P49

일반적으로 중부 지역에서는 느리게 흐르는강물을 댐으로 막아서 저수지를 만들고 그 물을 수문을 통해서 저수지로부터 작은 수로로 흘려보내서 그 후에 중력의 작용을 통해서 경작지로 흘러가도록 하였다. 양자강 유역에서는 반대로 과잉의 물을 인공적으로 조성된 웅덩이나 저수지 속으로 배수시켜서 나중에 필요할 때 빼서 쓸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주로 썼다. - P52

조정의 남동부의 곡식에 대한의존도 증가는 그 지역의 생산성 증가의 또 다른 징조였는데, 이때 남부 지역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곡물을 북부로 보내면서도 남부 지역의 인구들 또한 먹여 살릴 수 있을만큼 생산성이 증가하였다. - P53

북부 지역에서는 강수량이 충분하지 못했기에,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물이 농업용 관개수로로 흘러들어갔다. 따 - P55

라서 많은 물자를 적재한 운반선들을 실어 나를 강에는 훨씬 적은 운하용수만이 공급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부 지역에서 수상 운송은 당대 전반기 내내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제한적인 상황이 초래한 한 가지 결과는 대규모 군사의 이동을 위축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제한적인 수상운송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각각의 도시와 지역이 그 지역의 자체적인 농업 생산에만 의지해야 했다는 점이고, 이는 경제적 전문화(분화)를 제한시켰다. - P56

중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내지는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의 저작으로 추정되는 상서書』「하서夏書」중우공편에서 묘사된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두개의 강 유역 사이에 위치하는 지역을 생산품의 차이에 따라 다시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눈다. ‘구주九州‘라고 하는 이 명칭은 결국 중국 전체를 나타낸다. - P63

한 제국에 의해서 건설된 ‘종속국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기미주들은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역들이었다. 당의 변경 내에거주하는 이들 부족민들은 당에서 직위와 인장을 수여받은 부족장들의 지배를 받았다.
기미주들은 대체로 당과 완전히 이질적인 ‘오랑캐들 사이의 완충국이었다.
기미주들은 특히 정주적인 농경 지역에서 초원 유목 지역으로 넘어가는 생태적인변화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변경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다. - P68

건국 초기 당 조정은 제국 전체에 안정을 회복하는 것과 더불어, 국가의 재정적 지불 능력을 복구할 필요가 있었다.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면서, 정부는 세수의 꾸준한 확보를 위해서 국가에서 토지를 분배해 주는 제도인 균전제를 재도입하였다. 이 균전제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지역 행정력이 필요하였고, 당 왕조는 주현제州縣制를 확립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621년에 정부는 통화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은 수대에 화폐의 가치 저하와 위조화폐로 인하여 붕괴되었던 것이었다. - P78

당초반에는 왕조의 군대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닌 세습군호나 외국인 동맹군 또는 외인 용병으로 이루어졌다. - P102

절도사의 직책은 8세기에 다양한 수비 부대와 군대를 한 지역 내에서 편제하고 지휘할 필요에 대비하게 되면서 즉흥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수십 년이 지나자몇몇 절도사는 막대한 경제력을 갖추고 조사위원관이라는 관직을 겸직하였다. 이 직책은 그들에게 그 지역의 민정 행정에 대한 상당한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8세기 중반이 되자 이러한 절도사들은 변경 지역에서 실질적인 지방장관이 되었고 중앙정부의 권위를 위협하는 지역세력의 집중화를 가져왔다. - P106

안녹산이전에 동북 지역의 모든 절도사는 적어도 한 번은 수도 장안에서 대신의 직책을 수행하였고 일반적으로 4년이 넘지 않는 상대적으로 짧은기간만 절도사로 재임하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휘하 장교나사병과 강력한 사적인 유대관계를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서부 변경 지역인 중앙아시아와 티베트 국경의 사령부에서 일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747년 이임보는 모든 절도사직은 이민족 직업군인 출신으로만 채워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 P107

당 왕조는 공식적으로는 귀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특정가문에 대해서 조정에서 가장 높은 관직을 보장해 주고 그들에게 특별한 법적 특권을 부여해 줌으로써 엘리트의 존재를 실제적으로는 인정해 주었다. - P110

당대 법전의 세 가지 특징은 한대의 선례와 구분시켜 주었는데, 귀적인 지위와 비천한 지위 모두를 포함하는 (사회적 지위 그룹에 대한법적 인정, 가족 내 혹은 관료제 내에서의 상대적 지위고하에 근거한처벌의 엄격한 단계적 차이, 직제에 관한 세밀한 법적인 관심이 그것이었다. - P117

당 왕조 초기, 특히 중국 북부 지역에서, 토지 소유, 조세 그리고 부역은 통합된 집합체로서 성인 남자 가장에 중점을 두고 있다. - P120

8세기에 정부는 가구세와 토지세와 같이 두 차례에 걸쳐 약간의 추가적인 조세들을 도입하였는데 이것들은 어느 정도 가구의 부에 따라 징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은 부분적인 영향만이 있었을 뿐이고, 그 제도의 핵심은 여전히 모든 성인 남자가 동일한 토지를 소유하고 그것을 통해서 동일한 세금을 납부한다는 이상에 근거하고 있었다. 고이러한 조세 징수 원칙에서 예외자들이 있었는데, 이 경우는 근거가 부의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특권 사회 계층 그룹에 속했는가의 여부였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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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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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1955년부터 시작되어 1975년까지 장장 20 년간 이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한국은 전쟁 기간 중 1964년 한국군 파병을 시작하여 1973년 철수할 때까지 총 4차례에 걸쳐 32만 5천여명을 파병했고 이 가운데 5천여명이 전사했다. 

이 책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고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는 기간을 주요 시기로 다룬다. 이를 통해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게 된 배경과 국내외 전개 상황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이유는 무엇이었나? 주한미군의 규모를 유지함으로써 북한에 대응하는 안보력 약화를 막기 위한 것, 한∙미 동맹에 대한 고려, 미국의 주한미군 및 한국군 감축 정책에 대한 대응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 도덕적 측면을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세계적 차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공헌한다는 것이다(P28).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국내는 반대 시위로 시끄러웠다. 주한 미 대사관은 이 시위로 한국 정부의 전복 가능성을 생각할 정도였고 중국이 핵 실험에 성공하면서 한층 더 위기는 고조되었다. 북한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과 삼각 동맹을 형성하고 여기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다면 자신들을 심히 위협할 거라 예측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수장이 바뀌며(케네디->존슨) 한국 정부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냉전과 안보 위기, 한미동맹에 대한 정치, 군사적 이익이 아니었다면 파병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렇게 총 9년에 걸쳐 이루어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베트남 파병 시기 동안 한국 경제는 국민총생산 연 평균 8퍼센트 이상의 가파른 성장을 기록했다. 전쟁 특수와 이를 통한 경제성장과 산업화는 박정희 정부가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 무렵 징병제가 강화되었고, 주민등록법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이는 국가주의가 통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군 감축을 위한 한국군의 현대화(무기 생산)가 이루어지면서 중공업 육성이 가능해져 한국의 산업 구조는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베트남을 통해 서구의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유입되어 장발이 유행했으며, 미니스커트가 등장했다. 트로트의 인기를 밀어 제치고 통기타 음악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미국과 일본의 전자제품이 유입되었다. 중산층이 생겼으며, 한강 이남의 개발로 부동산 투기가 시작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 질서를 무너지게 했다. 전쟁비 지출이 급증하면서 달러는 더 이상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전쟁 반대 분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고 수정주의가 판을 치며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흐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반전과 수정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미국에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강한 아메리카를 외치게 되었고 일본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들어선 후 극우적인 역사 인식을 내비치면서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이루어졌다. 


미국은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전술로 싸운 전쟁으로 기억한다.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이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경제 발전을 이룬 것처럼 한국도 베트남전쟁을 통해 이룬 경제적 발전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는 동원했던 군인들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고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감행한 일에 대해서 정부는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낼 수 있었던 동력은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참전 군인들의 문제였다. 참전 군인들의 존재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의 어떠한 연구 성과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에서조차 위령비와 증오비를 제외하고는 한국군에 대한 언급을 찾기 어렵다(P339). 둘째로 베트남전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꿈으로써 한국은 다르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사회는 범죄 행위를 미화하고 숨기는 일본의 극우 세력들과는 다르다. 한국은 지나간 역사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성찰하는 시민사회를 갖고 있다(P340). 


오늘날에도 한국은 견고한 한미동맹을 내세우며 자유주의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의 안보 강화는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참전의 역사를 보면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이 많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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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2 23: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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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3 07: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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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7-23 0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반대하고 파병을 반대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힘 있는 나라 눈치를 봐야 한다니... 그 뒤에도 그런 일은 있었네요 베트남 전쟁에 나간 사람 많았네요 한국 정부는 거기 갔다 돌아온 사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을 것 같네요 전쟁이라는 걸 겪으면 힘들 텐데... 그런 걸 생각한 건 얼마 되지 않은 듯도 합니다 한국군이 한 민간인 학살...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23 07:18   좋아요 1 | URL
그 때는 한미동맹이라는 명분도 그렇지만 안팎으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파병을 억지로 강행했다가 맞을 겁니다. 한국군 파병 숫자가 외국군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알고 있어요. 거기서 죽을 고생을 하고 와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고엽제 등의 후유증으로 말도 못할 고통을 겪었을텐데 한국은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가 반드시 있어야겠죠.
 

인간성은 더 이상 단순한 동물적 존재와 자연에 대한 완전한 통제 사이의 과도기적 단계에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진화시킨 동물계 the animal kingdom 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우리 자신의 진화의 방향으로 실제로 주요한 진화상의 도약을 하는 것에 더 가까이 있다. 그러므로 테크놀로지를 촉진하는 관점에서, 혁명적 생태학적 운동은 페미니스트 운동과 같은 목표를 가질 것이다. 그 목표는 인도적인 목적을 위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제하는 것이고, 파괴된 ‘자연적‘ 균형을 대치하기 위하여 인간과 인간이 창조하는 인공적인 환경 사이에 새로운 평형을 확립하는 것이다. - P280

적어도 선택권의 발달은 모성에 관한 고대의 가치를 정직하게 재검토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현재는 여성이 원칙적으로 모성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위험하다. 모성을 반대하는 여성은 자신이 신경질적이고, 비정상적이며, 아이를 혐오하고, 그러므로 ‘부적합하다‘는 것을 덧붙여야만 처벌을 모면할 수있다.("어쩌면 나중에 내가 더 준비가 잘 되었을 때.") 이것은 자유로이 탐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적어도 금기가 해제될 때까지, 자녀를 가지지 않겠다는 결정이나 자녀를 인공적인수단으로 가지겠다는 결정이 전통적인 자녀 출산만큼 정당한 것이 될 때까지, 여성은 여성의 역할을 강요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전통적인 가치체계 속으로 흡수하기 어렵다고 여기는또 다른 과학적 발전은 사이버네틱스 [인공두뇌학cybernetics]*라는새로운 과학의 등장이다. 기계가 창의적인 사고와 문제해결에 있어서 인간과 곧 동등해지거나 인간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 P289

과학의 오용은과학 자체의 가치와 종종 모호해진다. 이런 경우, 그 반응이 그렇게 병적이거나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우리는 그것의 혁명적 중요성을 인식하기보다는 여전히 종종 상상력 없이 기계 자체의 폐단에만 온통 집중한다.

인구조절과 사이버네틱스라는 두 문제는 똑같이 신경과민적이고 피상적인 반응을 낳는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 전례가 없다는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생산과 생식 둘다 인간의 기본적 관계에서 질적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 P290

인구폭발에 관한 관심, 생식에서 :임으로 그 강조점이 전환된 것, 그리고 인공생식의 완전한 발달에 대한 요구는 생물학적 가족의 억압에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사이버네이션은 인간과 일 및 임금과의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노동‘ 활동에서 ‘놀이‘ (그 자체를 위해서 하는) 활동으로 변형시킴으로써, 경제적 능력을 갖춘 가족 단위를 포함하여경제에 대한 전면적인 재정의를 가능하게 할 여지를 줄 것이다.
남자는 땀 흘려 일하고 여자는 고통과 산고를 참아야 하는 이중저주는 처음으로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해소될 것이다. 페미니스트 운동은 20세기의 인류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새로운 생태학적 균형을 받아들이는 문화를 창조한다는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 P292

최근의 피임법들이 개발되기 전에 계속되는 출산은 여성들에게 끊임없는 ‘부인병‘, 조로, 죽음을 가져왔다. 여성은 나머지 절반을 세상에서 종종 지겨운 면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분명히 창조적인 면도 있는ㅡ일을 하도록 자유롭게 해주기 위하여 종족을유지해주는 노예계급이었다.
이러한 자연적인 노동분업은 커다란 문화적 희생을 치러야만계속되었다. 즉, 남성과 여성은 각각 나머지 절반만 발달시켰다. - P293

계급 없는 사회를 성취하려 했던러시아 혁명의 실패는 가족과 성적 억압을 제거하려는 미온적인 시도의 실패라고 추적할 수 있다. 이 실패는 결국 경제적 계급에만 기초한 남성 편향의 혁명적 분석에 대한 한계에서 기인했다. - P301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주의 혁명은 똑같은이유로 실패해왔거나 앞으로도 실패할것이다. 현재의 사회주의하에서는 어떤 최초의 해방이라도 항상 억압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그 이유는 가족 구조가 심리적·경제적·정치적 억압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 P302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서, 개인들에게 통제에 대한환상을 주고 안전성, 쉴 곳, 혹은 따뜻함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제도들은 ‘사적‘인 제도들이다. 종교, 결혼-가족,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정신분석 치료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 P317

독신의 삶은 선택한 직업의 요구사항을 중심으로 조직되는데,
특별한 직업적 구조를 통하여 개인의 사회적·감정적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많은 개인들에게, 특히 과도기에 매력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 P322

‘함께 살기‘는 성이 무엇이든지간에 둘 또는 그 이상의 상대가 내적 역학관계에 따라 다양하게비법적인 성-동반자 합의 기간에 돌입하는 느슨한 사회적 형태이다. 계약은 당사자들 사이에서만 맺어진다. 사회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하다. 그 이유는 생식도 생산-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 의존하는 것도 개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연한 비형식적인 삶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애 대부분을 살아가는 표준단위가 되도록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 P323

‘가구‘는 명시되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람들이 커다란 군집을 이루어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명시된 일련의 대인관계interpersonal relation가 없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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