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간 비가 온 뒤 다음날인지 공기가 께끗해지고 화창하게 개니 어느새 푸르름이 짙어졌다는 걸 느낀다.


지구 반대편 핀란드와 스웨덴은 중립국의 위치에 있었는데 NATO 가입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중립국이 설 자리는 이제 없는건가~ 

얼마 전까지 읽었던 역사비평과 역사문제연구는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약간의 해소가 되는 면이 있었다.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는 나는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어릴 적부터 강했다.

혐오와 조롱, 선동의 정치가 어느 때보다 대중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무엇을 해야만 하나 고민하게 만든다.


전쟁은 서로를 겨누고 끊임없이 불신하게 만든다.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강간, 성폭력이 자행되고 건물이 파괴되는 피해도 있지만 

전세계에 유가가 폭등하는 등 각국의 경제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전쟁이 에너지 전쟁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우리 정치는 어떤가.

민생은 뒷전인채 서로를 겨눈 채 악다구니 다툼만 벌이고 있다.

정작 챙겨야 하는 문제는 나몰라라 하는 행태를 보니 씁쓸하기만 하다.

제발 기대감을 갖게 하는 정부를 보고 싶다. 

이래저래 봄날의 볕 같은 평화가 간절하다.




그동안 주섬주섬 담아놓은 책들이다.

곧 주문이 임박한 책들이다^^;





혐오라는 말이 이제는 너무 익숙하다못해 진부하다.

뉴스에서 나오는 말을 나도 모르게 걸러서 듣고 있을 때가 있다.

'편견이다. 나는 저렇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내가 하는 생각이 편견일 경우가 많고 내가 쓰는 말 중에 은연중에 혐오의 말이 담겨 있지 않을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은 편견이 어떻게 혐오가 되는지 심리학, 통계학, 과학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분석했다고 하여 찜해 놓았다.



새마을 운동 세대는 아니지만 어릴 적 새마을운동 주제가는 익숙하게 들어왔다.

박정희는 부모님 세대에게 먹고 살게 만들어준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식민지 시기 만주국이 세워지고 이곳 마을은 집단 부락을 통해 사회를 통제했다.

이는 새마을운동 정치 시기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 지역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덧 두 달째가 가까워오고 있다.

저자인 올가는 전쟁 개시부터 이 일을 직접 목격하고 공포와 분노를 느끼면서도 가족을 챙기면서 매일을 기록했다.

이는 현장의 일기이자 우리가 지금 바로 마주해야 할 현실이다.

뉴스 전문과 영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럴 때 체험자의 수기는 우리를 현장으로 인도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 사건 이후 원전과 방사능에 대한 공포가 현실임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옆에 사는 우리도 이럴진데 그 곳에 살던 주민은 더욱 이를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이 책은 피해 복구를 위해 투입된 작업 노동자들의 9년 간의 기록을 담았다.



포크 or 컨트리 음악을 들으면 자유와 갈망이 떠오른다. 

스스로를 제어하고 구속하는 것에 익숙한 나는 반대로 이런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이다.

감각적인 스토리로 눈길을 사로잡은데다가 노래와 음악을 간접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음악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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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4-15 15: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이 셀렉트 하신 4월의 책 저도 주섬!@@주섬!@@@

거리의화가 2022-04-15 15:47   좋아요 3 | URL
스콧님도 프로필 바꾸셨군요^^ 화사하니 이쁩니다!ㅎㅎ
주섬주섬 책은 언제 담아도 늘기만 해요...*^^*

mini74 2022-04-15 15: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혐오와 편견이 힘을 키우는 거 같아 화가 납니다 ㅠㅠ 저도 스콧님 글 읽고 전쟁일기 담았어요. 화가님 글 읽고 혐오의 과학도 담고 ~ 어제 책들이 우루루 오는 바람에 잠시 텀을 두고 사야할거 같아서요. 저도 양심은 있는지라 ㅎㅎ 저도 평화를 간절히 바랍니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2-04-15 15:53   좋아요 3 | URL
혐오와 편견은 이런 시기 더욱 유혹적으로 다가오나봅니다ㅜㅜ
저는 이달에 아직 책을 구입하지 않았기에 곧 주문하려합니다. 엄선해서 주문한다고 하지만 뒤돌아보면 잊은 책이 있어서 또 주문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_-;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생명이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산화 환원 반응
-> 이는 모든 생명체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됨

진화 이전의 진화: 분자 진화론

생명의 기원은 오리무중

생명 활동은 분자의 운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모든 생명체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두 가지 특징이 이 사실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우리에게 친숙한 ‘정보 information‘다. 세포가 생명을 유지하기위해 정보를 저장하고 활용하는 방법은 생명체의 종류와 상관없이 거의 동일하다. 두 번째 특징은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다. 즉, 모든 생명체에서 세포가 에너지를 입수하고, 저장하고, 활용하는 방법도 거의 동일하다. 그토록다양한 지구 생명체들이 이런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하나의조상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다. - P135

장작이 탈 때 나무에 함유된 탄소와 수소는 자신이 갖고 있던 전자를 공기 중의 산소에게 내주면서(앞서 말한 대로, 산소는 항상 전자를 애타게 찾고 있다) 서로 결합하여 물과 이산화탄소가 되고, 이 과정에서 에너지를 방출한다(그래서 불은 뜨겁다!). 산소가 전자를 포획했을 때, 흔히 ‘환원되었다reduced‘고 말한다(전자를 향한산소의 갈망이 누그러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산소에게 전자를 양도한 탄소와 수소는 ‘산화되었다’고 한다. 이 둘을 합쳐서 부른 것이 바로 산화 환원 반응이다. - P140

산화 환원에서 얻은 에너지는 모든 세포에 내장되어 있는 생물학적 배터리를 충전하는 데 사용되며, 충전된 배터리는 모든 세포에 에너지를 운반하고 공급하는 수송 전문 분자를 합성하는 데 사용된다. 이것은 매우 정교한 과정으로, 모든 생명체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 P143

어떤 환경도 자원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분자 생태계에서긴 세월 동안 복제가 반복되다 보면 효율이 가장 높은 분자(빠르고 저렴하면서 통제 가능한 복제법을 개발한 분자)가 ‘최고 적응자‘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고 생태계를 장악한다.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마찬가지다. 복제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수정되면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 있다. 결국은 복제 능력이 뛰어나면서 환경에 잘 적응한 분자가 최종 승자로 등극하게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은 진화론의 분자 버전인 분자진화론 molecularDarwinism 으로, 오직 물리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분자들도 생명체처럼 번식의 대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하기 전에이 세상을 지배한 기본 메커니즘은 아마도 분자진화론이었을 것이다. - P154

이 세상에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 몸속의 수많은 분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서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잔을 쥘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원자와 분자 배열에 들어 있는 생물학적 정보가 분자 단계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과정을 제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생명은 물리학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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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핵력이 우주를 고-엔트로피로 가도록 만드는 유도체 역할을 했다.
우주 공간에 흩어진 원소 입자들이 떠다니다 별과 행성이 되었다.

우주는 물질의 내부에 갇혀 있는 엔트로피를 캐내기위해 기발한 방법으로 중력과 핵력을 차용하고 있다. 중력이 없으면 한 무리의 입자는 집 안에 가득 찬 냄새 분자처럼 균일하게 퍼지면서 엔트로피가 최대인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중력이 개입되면 입자 무리는 무겁고 조밀한 덩어리로 응축되고, 여기에 핵융합이 가세하면서 엔트로피가더욱 큰 폭으로 증가한다. - P104

별의 내부에서 생성되어 초신성이 폭발하거나 중성자별이 충돌할 때 우주 공간으로 뿌려진 원소들은 장구한 세월을 떠돌다가 거대한 기체 구름으로 뭉쳐서 별과 행성이 되고, 그중 일부는 우리의 몸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지금까지 당신이 보아 온 모든 물질의 기원이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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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4-14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라이언 그린 테드 강의 추천 합니다

이런 분 한테 과학 우주 이런 이론을 배웠다면
저는 분명 지금과 다른 길을 ㅎㅎㅎ

화가님 바뀌신 프로필 그림 넘 맘에 듭니다.

홍콩의 어느 도로를 달리고 있는 빠알간색 낡은 이층 버스 ^^

거리의화가 2022-04-14 16:37   좋아요 1 | URL
오 테드 강의 참고해보겠습니다. 과포자도 들을 만한 강의겠지요?ㅋㅋ
근데 전 수포자긴 했어도 과학은 은근 재밌었거든요^^ 물론 이해를 잘 한건 아니겠지만...ㅋㅋ

그리고 프로필 알아봐주셔서 감사해요~ㅎㅎ 역시 세심하신 스콧님^^
몇 년전 홍콩 트램, 버스 탔던 기억이 나요. 다시 홍콩에 가보고 싶은데 홍콩도 중국의 감시 등이 뻗쳐서 언론 등 많은 부분이 그들의 눈귀를 가리게 되어서 안타깝더군요.
 

우주의 역사
빅뱅의 정의

우주는 처음 탄생할 때부터 질서와 무질서가 한데 어울려 춤을 추는 거대한 무도회장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78

현대우주론에 의하면 관측 가능한 우주(가장 강력한 망원경의 관측 범위 안에 존재하는 모든것)는 지금으로부터 약 140억 년 전에 초고온 초고밀도의 작은 덩어리 안에 응축되어 있다가 거대한 폭발을 겪으면서 빠르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후 뜨거웠던 공간이 서서히 식으면서 입자의 속도가 느려졌고, 이들이하나로 뭉쳐 별과 행성 등 다양한 천체가 형성되었으며, 태양계의 지구라는 행성에는 생명체가 등장하여 근 40억 년 만에 인간으로 진화했다. - P79

공간의 작은 영역이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통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저-엔트로피 상태에 놓여서 밀어내는 중력이 가동되고, 그 결과 우주는 급격하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빅뱅이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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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 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
최영우.최양현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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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 아닌 실제에 나는 약하다.
이 일이 불과 80년 전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니 책을 읽는 내내 소름이 끼칠 수 밖에 없다.

식민지 조선에서 청년기를 보내던 그는 어느날 갑작스레 타국으로 향했다.

1923년생. 그가 조선을 떠나 남방으로 향한 것은 1942년. 정확히 스무살이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 태평양을 전쟁의 화마에 빠져들게 만들기 시작한 다음 해였다.

그는 전라북도 남원의 유명 양반가인 삭녕 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탄탄한 지주 집안이었으나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고 반봉건 의식이 일반화되면서 집안은 이전처럼 유지될 수 없었다.
집안이 소유하고 있던 논밭은 흩어지고 전쟁 이후 징병과 징용이 시작되면서 집안에도 불화가 닥쳤다.

내선일체를 주장한 일본인은 조선인 청년들도 일본을 위한 전쟁에 차출되어야 한다며 군속 모집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당시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이 전쟁을 수행하며 사로잡은 적군인 미국군과 영국군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최씨 집안 형제 중에도 하나는 희생되어야 했는데 차남이었던 최영우는 집안을 위해 그렇게 희생의 길을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산 서면의 노구치 부대에서 혹독한 훈련을 2달간 받았고 사이공을 들렀다 9월 10일 싱가포르를 찍고 말레이시아 창이 포로수용소를 찍고 다시 9월 14일 자카르타의 포로 수용소로 이동했다.
가는 동안 거친 풍랑 속에 난파의 위험을 몇 차례나 겪으며 겨우 살아 도착했다.

하지만 자카르타도 끝이 아니었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말랑이었다. 자바 섬은 인도네시아 중심 섬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포로수용소 사령부가 존재한 만큼 전략 지역이었다.

일본이 오기 전 이 곳은 네덜란드의 점령지였다. 때문에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 왔을 때 피부색이 비슷하고 골격이 같은 탓에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이들이 점령군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해줄 자로 여겼다.

첫 번째 근무지는 말랑 제5분견소였다. 포로는 약 5천 명으로 대부분이 화란인이었고 영국인과 호주인도 일부 있었다. 화란인은 백인이 절반, 동양계 혼혈 2세, 3세가 절반으로 아주 구성이 다양했다.

이 곳에도 위안소가 존재했는데 최영우도 이 곳을 방문했다. 대부분의 여인이 조선인임을 알게 된 그는 안타까움을 드러내지만 마음 뿐이었다는 것은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성이며 군인이었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위안소는 동남아시아 전역에 100여 곳 이상 존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1년이 지나고 전쟁은 대치 상태에 접어들었고 태평양 섬들에 끊임없는 공습으로 보급은 제 때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보급이 끊기자 지방의 각 포로 수용소는 수도 자카르타로 집결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자카르타 총분견소는 지방의 각 수용소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핵심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갑작스런 호명을 받고 어디 가는지도 모른 채 배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 점령지를 연합군이 다시 차지하면서 태평양 바다에서는 격전이 벌어졌다. 그가 타고 있던 배도 이동 중 무수한 공격을 받아 격침되어 바다를 떠다니다가 다른 배에 구조되어 겨우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결국 승선 인원 중 30여 명은 실종되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점령 후 네덜란드인의 자치를 허락하고 비교적 자유를 주며 관리했다. 그러나 1942년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들을 한 공간에 억류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초기에 2천여 명에서 시작했던 억류 인구는 전쟁 말미 1만여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포로수용소와 다름 없는 처우로 인해 억류인들 중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포로들은 수마트라의 페칸바루 철도 공사를 위해 동원되었는데 무덥고 습한 환경 속에 이질, 말라리아에 쉽게 걸렸고, 부족한 급식으로 영양실조에 노출된 상태였다. 일본군이 이들을 강제 노역에 마구 동원하면서 사망자는 속출하였다. 이 철도는 '지옥의 철도'로 불렸다.

자카르타 포로수용소에서는 수시로 포로들을 이동시켰고 그 때문에 최영우도 싱가포르로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싱가포르는 네덜란드가 아닌 영국의 식민지였다.
네덜란드인은 화교를 탄압하였으나 영국은 이들의 상업 활동을 허락하였기에 싱가포르는 1940년대부터 동남아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동시에 싱가포르는 영국군의 아시아 최전선 기지 역할을 하였다.

싱가포르에 보름쯤 있다가 최영우는 생채소를 오랫동안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탓에 각기병에 걸린다. 이 때문에 자카르타 분견소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작업을 나갔다가 여인 하푸카스(네덜란드인과 인도네시아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를 만난다.
다시 만날 기약을 하며 일단 그곳에서 그녀와 헤어진다.

인도네시아는 300년 넘게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혼혈인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포로감시원은 청년들이 많았는데 1945년 종전 후 포로감시원이 그들과 결혼하여 현지에 정착한 경우도 존재했다.

이후 최영우는 근무지가 또 바뀌어 글로독 수용소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글로독은 자카르타 지역 중 오래된 역사를 지닌 곳으로 화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전에는 네덜란드 통치 당시 인도네시아 범죄자나 독립운동가를 투옥했던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1945년 6월 글로독 수용소에 독일군 포로가 들어왔다. 독일은 이미 패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합군과 싸울 이유가 없어졌고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일본군을 돕던 독일군은 투항 후 포로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가 하푸카스에 대한 애정을 키울수록 전황은 복잡해져만 갔다.
막바지에는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선언이 발표된다.
"일본은 연합국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항복을 수락한다. (...중략) 항복한 일본군은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되, 우리들의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해 일체의 전쟁 범죄자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가해질 것이다."
최영우를 비롯한 포로 감시원들은 마지막 조항 때문에 충격과 불안에 휩싸인다.

포로감시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연합군 측과 교섭을 벌이려 '조선인 민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하지만 그들은 테러와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조직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포로감시원들은 승선 명령을 받고 싱가포르 창이 전범수용소로 가게 된다. 이전에 포로수용소였던 이 곳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범수용소로 바뀌게 되었다.
포로를 감시했던 그는 전범이 되었다.

하푸카스와는 헤어진다는 말조차 못하고 그렇게 그곳을 떠나오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만난 사람이었기에 그 애정은 더 각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헤어진다는 인사만이라도 했으면 조금 나았을 것 같은데 아마 평생의 한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외치던 노선의 갈등이 극도로 치열하여 해방 후 한국 상황과 매우 비슷했다.
더군다나 네덜란드는 일본군이 물러나기 이전 자신들의 지위를 탐냈다. 이 때문에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화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1945년 8월 17일 시작되어 1949년 12월까지 4년간에 걸쳐 벌어졌고 80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창이 전범수용소에서 힘겨운 생활을 끝마치고 치피낭 형무소로 왔다. 치피낭 형무소는 20세기 초 네덜란드 식민 정부가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가를 수감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고 태평양 전쟁 때는 포로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이곳에서는 그나마 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 식사도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치피낭 형무소는 열악한 수용 환경으로 최근까지도 고발이 됐을 정도로 악명이 높은 곳이라고 한다.

이것에서 최영우의 기록은 끊긴다.
그는 1947년 3월 자카르타 항구에서 조선인 동료 173명을 태운 귀환선에 함께 몸을 실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떠난 것은 1942년 8월, 돌아온 것은 1947년 3월 약 5년 만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식구들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낯빛은 어두웠으며 고된 억류 생활로 우울함이 느껴졌다고 한다.

조선을 떠나기 전 그는 하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던 젊은이였다.
힘든 세월을 견디고 돌아온 그는 어느덧 노총각 대열에 진입해있었다.

2002년 작고하기까지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서글픔과 괴로움이다.
이 책을 읽으며 비슷한 처지였던 이학래를 떠올렸다. 그의 영상과 글이 남아 있으니 추가로 본다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달리는 기차에서도, 기차가 쉬고 있는 정거장에서도 전투모와 군인만 보이면 곳곳에서 손을 흔들어 댄다. 실로 지금 이 땅은 환호의 일색이다. 일본군은 해방자이고, 원수 화란을 몰아낸 자이며, 은인이다. 이들에게는 수백 년 만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 P63

이 광경을 처음 목격했던 나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제는 눈물도 마르고 한숨도 멀어져 버렸다고 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나이 많은 동료 중에는 그녀들과 잘 어울리며 휴일과 근무일을 막론하고 위안소를 자주 찾는 이도 있었다.
포로 감시원 대부분은 이국 여인의 낯선 정취를 좋아했다. - P82

그제야 끼리끼리 패를 지어 점검을 하니 가까이 지내던 동료 두 명이 보이지 않는다. 총 삼십여 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산 사람의 입장에서 동료의 죽음은 슬픈 일이었지만, 지금은 내 목숨을 건졌다는 게 더 중요하다. - P102

이들은 어디서나 군소리 없이 줄지어 서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재촉하거나 꾸짖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가진 능력 그대로를 성실하게 행한다. - P106

하루는 독일인 포로들이 들어와서 따로 수용되었다. 근 몇 년간 일본의 동맹국 군인으로 우리와 함께 협력하여 작전을 수행했지만,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을 했으니 이젠 적군이 된 것이다. 그리고 6월부터는 수용소 신세가 되었다.
"저들은 싱가포르를 기점 삼아 영미군의 배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일본군 측에서는 믿을수가 없겠지. 전투에 내보냈다가 연합군에 투항하면 역이용할지 모르니까."
"우수운 운명이구먼." - P147

나는 금반지와 손목시계를 그녀의 집에 맡겼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궁리해 본다. 촌락으로 들어가서 은신하면 어떨까. 내가 여기 새 나라의 국군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이곳에 정착해 버리면 조선에서 기다리는 부모 형제와의 재회는 단념해야 하며 이는 불안을 자처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 어느 안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고 안전한 것이 못 되어 결정과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 P165

당장은 먹을 것이 문제였지만 앞으로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의도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사진을 찍어 가는 것뿐이다. 앞으로 찍고, 옆으로 찍고,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사진을 찍는다. - P185

석 달이 지나고 넉 달이 되니 늑골이 적나라하게 불거졌다. 마치 뼈로만 걸어 다니는 인간 같다. 어쩌다 수용소 밖에서 작업할 일이 생겼다. 굶주린 우리들은 밭에서 김을 매는 시늉을 하면서 뿌리고 잎이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뜯어 입에 넣었다. - P186

언제 교수대가 나를 부를지 모른다.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겪는 운명의 장난 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큰 감방에서 이리저리 사람이 빠져나가고 나를 포함해 대여섯명이 남게 되었다. 이제는 이 감방 안에 한 사람은 저쪽에, 다른 한 사람은 다른 쪽에 고독하게 앉아 있다. - P199

예전 생각이 난다. 우리가 포로들을 감시했을 때에 약간의 친절과 연민을 보였더라면, 저들도 지금 우리에게 두 배의 호의와 동정으로 갚으련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들이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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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12 15: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글 읽으면서도 저도 감정이입이 되네요. 저희 아이와 비슷한 또래. 그 나이로 전쟁과 강제징역에ㅠㅠㅠ

거리의화가 2022-04-12 15:43   좋아요 2 | URL
미니님 아이가 있으시니 저보다 더하시겠죠. 제가 만약 아들을 먼 타지에 그것도 전쟁터에 내보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힘드네요~ㅜㅜ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였기에 저도 글 읽으면서 많이 감정이입이 됐어요. 마지막 치피낭 형무소에서부터 조선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아서 물음표가 될 수 밖에 없지만 아마도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서 글을 더 이상 쓸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봐요. 그래도 그 가족들 입장에서는 살아 돌아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전쟁은 정말 모든 이들에게 가혹함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