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탈산업 시대 산업유산의 역사화 1
[ 노동의 기록과 기억으로서 산업박물관 ] - 도르트문트 촐레른 폐광산의 사례
1. 제국의 중공업을 선도하는 ‘모델 탄광’
광산 중심에 배치된 신고딕 양식의 관리동은 외부의 홍보, 과시 행위를 위한 공간.(노동자를 위한 공간 아님) -> 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간으로서의 위치
2. 폐광산 구출에 나선 예술가들
1966~67년 철강 위기가 닥쳐서 사양 산업에 접어들었다고 하는데 한국은 이 때도 광부들이 많이 파견되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1963년부터 시작하여 1970년대도 계속됨) 대표적 석탄 공업 지대였던 노르트팔렌주 지역인 이곳이 아니였을까? 이 부분은 체크가 필요함.
아무튼 이때부터 예술가들의 열정으로 회사 소유주와 주민들의 반대 의견을 바꾸는데 노력을 하였다 함.
3. 산업의 현장에서 과거를 기록하다
산업박물관은 탄광을 비롯하여 직물공장, 유리공장, 제련소, 벽돌공장 등을 묶어 총 8개의 장소로 구성하여 1984년 설립했다. 이로서 역사적 기억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4. 산업문화로서 노동의 사회문화사
- 실제로 과거에 노동 현장으로 이용된 공간을 복원하여 기억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계를 복원하고 기록과 전시물들을 통해 지역의 역사와 기술, 정책, 산업의 역사를 포괄하여 전시함으로써 방문의 가치를 높였다는 생각이다.
- 도제 직업훈련은 현재의 독일 산업에 직업 훈련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전시 핵심에 이를 배치하면서 탄광 노동의 사회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 젠더 관점에 대한 접근은 우리도 참고하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현대에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산업박물관이나 사적 가운데 광산이, 제철소가, 공장이 왜 문을 닫았는지 설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를 현재에서 분리하고 해석을 효과적으로 탈정치화한다." - P170
도르트문트 뵈빙하우젠에 있는 촐레른 2/4번 수직갱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 최대의 탄광회사였던 겔젠키르헨 광업회사가 1899~1904년 건설하였다. 업계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건축미에 신경써 신고딕과 아르누보 양식을 섞은 ‘모델 탄광’은 경쟁사와 노동자를 향한 권력과 통제의 메시지를 담아냈다. - P172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촐레른의 건축적 가치를 인정하고 원형 보존에 노력했지만, 그런 태도는 이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1966-67년 철강 위기가 닥쳤고, 석탄은 사양산업이 된 지 오래였다. 회사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계홀 철거를 막으려는 시도는 소유주의 완강한 거부에 부딪혔다. - P177
1979년 9월 21일 베스트팔렌리페 지역협회는 산업박물관의 과제를 "산업시대의 문화" 연구와 박물관 전시, 그리고 기념물의 공공 개발로 규정했다. 그에 따라 산업박물관은 노동, 산업, 기술, 정책 분야의 진본적 공간인 역사적 산업건축물 및 인접한 노동자 주택 등에서의 현장 기록으로 이해되었다. 탄광은 석탄산업의 기록이 되고 제철 제련소는 주철과 철강산업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 P181
이원제로 알려진 이 방식은 미래의 노동자를 조직적으로 훈련해 고용하고 다양한 여가 프로그램을 제공해 노동자들을 퇴근 후에도 탄광에 묶어놓음으로써 도제 시절부터 노동자 조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분리하려는 회사의 의도를 담았다. 이 정책의 강력한 지지자가 바로 당시 유럽 최대의 석탄철강업체로 1926년 촐레른 2/4번 수직갱을 인수한 연합철강(Verreinigte Stahlwerke AG)이었다. - P184
석탄철강 중공업은 전통적으로 남성 노동력만 고용했고 루르의 산업사와 노동사 역시 남성중심적이었다. 여성과 여성노동 재현을 늘리라는 요구가 198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젠더는 산업의 공공역사에서 여전히 모자라게 다뤄진다. 산업박물관은 특별전시와 가이드투어로 이를 보완한다.
1980년대에 본격화된 지역 구술사 프로젝트는 여전히 활발하다. - P186
2000년대 이후 박물관의 관심은 노동의 기록에서 노동의 상업적 예술적 재현의 분석으로 이동했고, 이는 수집 정책과 전시 계획을 바꾸고 있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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