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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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80년이나 전에 저희보다도 더 큰 곤란을 무릅쓰면서 이 일본에 도착하려고 하셨던 성 프란체스코 자비에르 신부님의 일이 가슴에 되살아났습니다. 그분 역시도 이와 같은 폭풍의 습격이 지나간 다음날 아침에 우윳빛의 뿌연 하늘을 바라보셨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 후 몇십 년 동안 수십 명의 선교사나 신학생들이 아프리카를 돌고 인도를 지나 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가 선교하려 했을 테지요. (...)

무엇이 그들에게 이 커다란 고통을 인내하게 했는지, 무엇이 그들에게 이 위대한 정열에 몸을 던지게 했는지 이제야 그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들도 모두 이 우윳빛의 뿌연 구름과 동쪽으로 흘러가는 검은 구름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또 그들이 그때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것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38~39)


1637년 일본 규슈 북부의 시마바라에서 기독교인들이 대규모 민란을 일으킨다. 당시 영주는 가장 상위 계급으로 부락민들과 무사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졌고 무사는 영주를 호위하며 절대 충성했다. 부락민들은 해마다 세금을 바쳐야 했는데 세금을 내지 않으면 갖은 탄압과 형벌을 가했으므로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일본은 1549년 예수회 선교사인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한 뒤 가톨릭 포교가 시작되었다. 그 후 예수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도미니코 수도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등의 로마 가톨릭 교회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1624년경에는 신자 수가 65만 명에 이르는 교세를 갖게 된다. 하지만 1587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를 금지하는 명령(바테렌 추방령)이 내려지면서 기독교 탄압이 시작된 이래 1597년경 나가사키에 26명의 신도들과 수도자, 성직자들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636년 일본은 데지마 섬을 만들어 서양과의 교류 통로를 일원화시키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는데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시마바라 난이다. 이 사건은 이렇게 기독교 박해 뿐 아니라 막부의 가혹한 세금 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 영주는 잠복한 그리스도들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된다. 파견된 관리들은 부락을 돌아다니며 순찰을 하고 가택을 침입하기도 하며 수상한 자가 있으면 신고하도록 한다. 신고자들에게는 물질적인 혜택이 주어졌다. 사제가 지내는 곳을 보고하면 은 300냥, 수도사를 신고하면 은 200냥, 신도를 발견하면 은 100냥을 지급함으로써 가난한 농민이나 어부들에게는 참으로 유혹적인 조건을 내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수도사나 선교사들은 일본에 들어오기 어려워졌으며 들어오더라도 암암리에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침묵>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로마 교황청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혐의에 대한 보고가 들어온다. 페레이라 신부는 그동안 일본의 가톨릭 탄압에 대한 끔찍한 실태를 지속하여 보고해왔기 때문에 교황청 사람들은 그가 배신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페레이라 신부에 대한 진실을 확인하고 잠복 선교도 하기 위해서 세 명의 신부들(가르페, 마르타, 로드리고)이 출발한다. 그들은 페레이라 제자이기도 했다. 


그들은 험난한 파도를 뚫고 우여 곡절 끝에 일본 육지인 도모기라는 어촌에 도착한다. 이 곳에서 신도를 만나고 신도들의 자체 조직이 있음을 알고 신부들은 놀란다. 고토라는 곳에서 신부들은 신도들에게 세례를 시행하고 고해성사를 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관헌들의 습격으로 나가사키에 취조를 받기 위해 기치지로가 선발되었으나 여기에 두 명의 사람이 자원하며 함께 간다. 기치지로는 가톨릭 신도였으나 이전에도 배교했다 한참 만에 마을로 돌아온 이력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배교하고 자취를 감춘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P85)

"나는 약해요. 나는 모키치나 이치소우처럼 강한 자는 될 수 없어요." (P123)


기치지로의 행동은 사실로만 보면 비열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로드리고처럼 저 말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믿음이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말이다. 


기치지로는 배교를 감행함으로서 풀려났지만 두 사람은 바다에서 순교하는데 나는 어떻게 하면 저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로드리고는 오두막에 피신해있다가 페레이라가 배교한 신부 중 하나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용서를 구하며 접근한 기치지로의 고발로 그는 감옥에 갇힌다. 


이후 로드리고는 온갖 회유로 배교를 강요 당한다. 게다가 다른 신도들이 자신으로 인해 탄압을 받는다는 사실에 괴로움은 커져간다. 그는 외친다. '하느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나만 처벌해 주시오."

"당신 때문에 저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될지." (P135)


가톨릭 신도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다던 나가사키 부교오인 이노우에는 막상 온화한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로드리고는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악인이라고 해서 악인의 모습이기만 할까 생각했다. 어떤 사람도 천사 또는 악마는 아니며 여러 얼굴을 갖고 있을 것이니까. 


'주여, 이 이상 저를 버려 두지 마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태로 저를 버려 두지 마십시오. (...)

이윽고 내가 죽임을 당하는 날도 여전히 바깥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갈 것인가. (...) 

그렇게까지 영웅이 되고 싶은가. 네가 바라고 있는 것은 남모르게 죽는 참된 순교가 아니라 허영을 위한 죽음인가. 신도들에게 칭송받고 기도받고, 그리고 저 신부는 성자였다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인가.' (P187)


어쩌면 이 독백이 로드리고의 자신의 예견하는, 끝을 향한 고민이었을지.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이 책의 로드리고라는 인물은 이름과 출신은 다르지만 실존 인물이다. 실제는 '주세페 키아라'라는 시칠리아 출신의 신부로 1643년 일본에 들어갔다 체포되어 1685년까지 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선악이란 이분법이 존재할까.' '진리라는 것이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 온갖 방법으로 '배교'를 강요당하는 신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상황은 다르지만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들에게 배신을 강요하던 앞잡이들과 민주주의 운동가들에게 탄압을 가하던 경찰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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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19 14: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분법보다는 각자의 양심이 가리키는 지침은 있을거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 때가 오면 나는 그 양심에 정직하게 반응하게 될까? 하는 생각도!

거리의화가 2024-02-20 09:13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자목련 2024-02-19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다는 평이 많고, 종교가 있어 궁금하기도 한 소설이에요.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고 싶은데..

거리의화가 2024-02-20 09:14   좋아요 0 | URL
종교가 있으시니 더 울림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아마도 도서관에도 있지 않을까요?ㅎㅎ

새파랑 2024-02-21 08: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책을 로드리고 신부에 감정이입해서 심각하게 읽었었는데...

제가 저 입장이었더라면 아마 초반(?)에 배교 했을거 같아요 ㅋㅋ

믿음의 힘이라는게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을 한참 했었습니다~~ 믿음의 정도라는 것도 보여지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안될거 같고~~

거리의화가 2024-02-21 17:21   좋아요 1 | URL
저는 오히려 기치지로의 입장과 마음이 더 와 닿았다고 해야 할까 그랬습니다^^; 믿음이라는 문제가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종교가 있었다면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었겠다 싶었습니다. 아무튼 새파랑님 덕분에 좋은 책 잘 읽었네요. 감사드립니다^^
 

자본주의는 순전히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다.
자본주의는 칼뱅주의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정통 기독교 교파들에서도 입증되어야 할 테지만 서구에서 기독교에 기생하여, 종국에는 기독교의 역사가 그것의 기생충인 자본주의의 역사가 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 - P124

걱정들(Die Sorgen)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 빈곤,
떠돌이걸인-탁발승적 행각에서 정신적(물질적이 아닌) 탈출구 없음. 그처럼 탈출할 길이 없는 상태는 죄를 지우는 상태이다. ‘걱정들‘
은 이 탈출구 없음의 죄의식을 나타내는 지표다. ‘걱정들‘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 - P125

"초현실주의는 그 본질적인 진실의 측면에서 대화를 재건한다는 사명을 갖고 나왔다. 파트너들은 예의범절의 강박에서 해방되었다. 말하는 자는 어떤 명제도 연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원칙상 말한 사람의자기애를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과 이미지들은 듣는 자의 정신에게는 디딤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P137

키치는 우리가 꿈속에서나 대화에서 사멸한 사물세계의 힘을 빨아들이기 위해 두르는 평범한 것의 마지막 마스크이다.
우리가 예술이라 불렀던 것은 신체에서 2미터 떨어진 곳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그런데 키치 속에서 사물세계는 사람의 몸에 닥쳐온다.
사물세계는 더듬는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마침내 그 손아귀 내부에서 자신의 형상들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인간은 옛 형식들의 모든 정수를 자신 속에 지니고 있으며, 19세기 후반부에서 유래한 환경과의 갈등 속에서 ㅡ꿈들에서든 몇몇 예술가들의 문장과 이미지에서든ㅡ만들어지는 것은 "가구가 비치된 인간으로 부를 수 있을 어떤존재다. - P139

종교적 각성을 참되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결코 환각제를 통해서가 아니다. 그 극복은 범속한 각성(profane Erleuchtung), 유물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영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 P147

혁명을 위한 도취의 힘을 얻기,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모든 책과시도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자신의 가장 고유한 - P162

과제라고 불러도 좋다. 이 과제를 성취하려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모든 혁명적 행위 속의 어떤 도취적 요소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부족하다. 그 과제는 무정부주의적 과제와 동일하다. 그러나 강세를오로지 무정부주의적 과제에만 둔다는 것은 혁명을 방법과 기율 면에서 준비하는 일을 순전히 연습과 전야제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실천을위해 소홀히 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도취의 본질에 대한 너무 단순하고 비변증법적인 견해까지 추가된다.
오히려 우리는, 일상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적 시각의 힘으로, 그 비밀을 일상 속에서 재발견하는 정도로만 그것을 꿰뚫을 수있다. - P163

혁명의전제조건은 어디에 있는가? 신념의 변화에 있는가 아니면 외적 환경의 변화에 있는가? 이것은 정치와 도덕의 관계를 규정짓고 어떠한 얼버무림도 용납하지 않는 핵심적 물음이다. 초현실주의는 그 물음에대한 공산주의적 답변에 더욱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은 전 - P164

방위적인 염세주의를 뜻한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문학의 운명을 불신하고 자유의 운명을 불신하고, 유럽의 인류의 운명을 불신하며, 무엇보다 계급 간의, 민족 간의, 개인 간의 모든 소통을 불신, 불신, 불신하기이다. - P165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면서 사람들 위에 전혀 새로운 빈곤이 덮쳤다. 그리고 점성술과 요가의 지혜,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손금 보는 점술, 채식주의와 그노시스, 스콜라 철학과 심령주의를 가지고 사람들 사이로 파고든, 아니 오히려 사람들 위로 덮친, 답답하게널린 갖가지 이념들이 이러한 빈곤의 이면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진정한 부활이 아니라 갈바니(Galvani) 전기 작용이기 때문이다.
여기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우리가 겪고 있는 경험의 빈곤은 거대한 빈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 그 거대한 빈곤은 다시 중세 걸인의 얼굴과 같은 날카롭고 정확한 윤곽을 띤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 P173

자연과 기술, 원시성과 안락함은 여기서 완전히 하나가 된다. 또한 끝없는 일상의 분규에 지쳐버렸고 삶의 목적이 수단들에 대한 무한한 원근법적시각에서의 가장 먼 소실점으로만 떠오르는 사람들의 눈앞에는 어느방향에서나 가장 단순하면서 동시에 가장 안락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충족시키는 삶이 구원의 빛처럼 나타난다. 그런 삶 속에서 자동차는 밀짚모자보다 더 무겁지도 않고, 나무에 열린 열매는 어떤 기구의풍선처럼 빠르게 둥그렇게 익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일단 거리를두고, 물러서려 한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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更始가 使者를 보내어 유계를 세워 소왕으로 삼고 군대를 모두 해산하게 하자, 경감이 나아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王莽에게 시달려 다시 劉氏를 그리워하였는데, 이제 更始가 천자가 됨에 諸將들이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고 貴戚들이 방종하고 횡포를 부려 노략질을 자행하니, 백성들이 가슴을 치고 다시 王莽의 조정을 생각합니다. 저는 이 때문에 更始가 반드시 패할 줄을 압니다. 公은 功名이 이미 드러났으니. - ≪後漢書 更始傳≫에는 의로써 정벌한다면 격문만 돌리고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천하는 지극히 소중하니, 公은 스스로 취하고 他姓으로 하여금 얻게 하지 마소서." 하였다. 이상은 ≪後漢書 耿傳≫의 내용임

王莽이 마침내 河北이 아직 평정되지 않은 것을 구실삼아 부름에 나아가지 않으니, 비로소 更始와 갈라지게 되었다. 이상은 ≪後漢書 光武帝紀≫에나옴-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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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성격>, <폭력비판을 위하여>

그 어떤 외부세계라는 개념도 활동하는 사람의 개념이 갖는 경계를 그어 정의될 수 없다. 활동하는 사람과 외부세계 사이에는 오히려 모든 것이 상호작용이고, 그 둘의 활동영역은 서로 넘나든다. 그것들에 대한 관념은 서로 상이할 수 있지만, 그것들의 개념은 분리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궁극적으로 성격의 기능으로 통용되고, 무엇이 운명의 기능으로 통용되어야하는지 어느 경우에도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언급은 이를테면 그 둘이 경험에서만 서로 넘나든다면 여기서 아무것도 의미하지 - P67

않을 것이다), 행동하는 인간이 대면하는 외부는 얼마든지 그의 내부로, 또 그의 내부는 얼마든지 그의 외부로 원칙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 원칙적으로 그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성격과 운명은 이렇게 볼 때 이론적으로 구분되기는커녕 서로 합치한다. - P68

관상학적 기호들은 여타의 점술적 기호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에게는 주로 운명을 해명하는 데 쓰였으며, 이것은 죄에 관한 이교적신앙이 지배한 데 따른 것이다. 희극과 같은 관상학은 창조적 정신의새 시대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관상학이 예전의 예언과 갖는 연관을 현대의 관상학은 복잡한 분석을 지향하는 노력 속에서나 그것이사용하는 개념들의 비생산적인 도덕적 가치평가 속에서 여전히 보여준다. 바로 이 점에서 고대와 중세의 관상학자들이 더 옳게 보았는데, 그들은 성격이, 이를테면 기질론(氣質論)이 포착하려고 했던 것처럼, 단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소수의 기본 개념들로만 파악될 수 있다는점을 인식했다. - P76

폭력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는 이러한 자연법론의 명제에정면으로 맞서 등장한 것이 실정법적 명제로서 이들은 폭력을 역사적으로 생성된 결과로 본다. 자연법론이 모든 현존하는 법을 그것의 목적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할 수 있을 뿐이라면, 실정법(법실증주의]은 모든 생성하는 법을 오로지 그것의 수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한다. 정의가 목적들의 기준이라면 적법성이 수단들의 기준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두 학파는 공통된 기본 도그마에서수렴하는데, 즉 정당한(gerecht) 목적들은 정당화된berechtigt) 수단들을 통해 달성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들은 정당한 목적에 사용될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 P82

자연적 목적을 위한 모든폭력의 원초적이고 원상(原像)적인 폭력이라 할 이 전쟁의 폭력에 따라 추론해도 된다면 모든 그와 같은 폭력에는 어떤 법정립적(rechtsetzend, 법제정적) 성격이 내재해 있다. 이러한 인식이 갖는 의미는 나중에 다시 논의할 것이다. 이 인식은 현대법이 갖는 앞서 언급한경향, 즉 단지 자연적 목적에 정향한 폭력까지 포함하여 모든 폭력을 적어도 법적 주체로서의 개인에게서 빼앗으려는 경향을 설명해준다. 대범죄자의 경우 이러한 폭력이 새로운 법을 정립하겠다고 위협하며 법에맞서는데, 민중은 그러한 위협이 무력함을 알면서도 중요한 경우에는오늘날에도 여전히 태곳적과 마찬가지로 그 위협 앞에서 공포에 떤다.
그러나 국가는 이러한 폭력을 전적으로 법정립적인 것으로서 두려워하는데, 이는 외부의 힘들이 국가에게 전쟁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고계급들이 자신들에게 파업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할 때 국가가 그러한폭력을 법정립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데서 엿볼 수 있다. - P90

군국주의는 폭력을 국가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보편적으로 사용하게끔 만드는 강박이다. 이와 같은 폭력 사용에의강박은 폭력 사용자체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보다 더 강하게 비판받았다. 그 강박 속에 폭력은 자연적 목적을 위해 단순히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볼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능이 드러난다. 그 강박은폭력을 법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시민들을 법률 아래에 이 경우 국민개병에 관한 법률 아래에 예속시키는 일은 법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앞서 고찰한 폭력의 기능이 법정립적 기능이라면 이 두 번째 기능은 법보존적(rechtserhaltend) 기능이라 부를 수 있다. - P91

한결같이 폭력일 뿐인 모든 종류의 적법하거나 불법적인 수단들에 대해서는 - P98

순수한 수단으로서 비폭력적 수단들을 맞세울 수 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예의, 애정, 평화에 대한 사랑, 신뢰, 그리고 그 밖에 여기서거론될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수단의 주관적 조건이다. - P99

법 정립은 물론 법으로서 투입되는것을 그것의 목적으로 삼아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가지고 추구하긴 하지만, 목적한 것을 법으로서 투입하는 순간 폭력을 [소임을 다했으니]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도직접적으로 법정립적인 폭력으로 만든다. 이러한 일은 그 법 정립이폭력이 없는 독립된 어떤 목적이 아니라 그 폭력에 필연적이면서 내밀하게 연계된 목적을 법으로서 권력의 이름으로 투입하면서 일어난다. 법 정립은 권력의 설정이며 그 점에서 폭력을 직접 발현하는 행위이다. 정의는 모든 신적인 목적 설정의 원리이고, 권력은 모든 신화적 법 정립의 원리이다. - P108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다. 역사의 ‘철학’인 이유는 그 역사의 종결이라는 이념만이 그 역사의 시대적 자료들을 비판하고 구분하며 결정하는 입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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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애

보니 스패니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기체는 환경들 또는 다른 유기체들로부터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경들과 연루되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둘러싸이고, 상호작용 속에 기입된다(그러한 의미에서 환경과 인접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화기 통로와 호흡기 통로, 피부 모공, 또는 원형질 망 조직을 통해서든, 또는 수많은 유형의 세포들의 세포질을 통해서든 내부 - P378

에서부터 환경과 인접한다. 인간 몸은 수많은 유기체들의 집합체이고,
대장의 대장균, 피부에 있는 미생물과 같은 유기체들 중 대부분은 건강한 생활을 위해 필수적이다. [………] 자아 등등에 대한 매우 다른 심리학은 우리의 내부와 외부 접촉면들을 통해,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내뿜는 어떤 무엇 (우리의 날숨, 몸 머리 복사작용, 쓰레기, 기타 등등)을통해 우리의 존재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향해 열려 있고 환경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379

"윤리는 우리가 누비고 지나가 얽힌 그물망들을 풀어내는 것에 관한 것이다. 환경들‘과 ‘몸들‘은 내부-작용하면서 공동구성된다"는 인식에 대해 숙고하는 것은 몸들과 장소들의물질적 상호관계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강력한 횡단신체적 윤리를 유발한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몸들이 어떻게 물, 영양분, 독성물질, 그리고 여타 물질들의 영구적인 흐름들로 장소와 내부-작용하는지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행위들에 대해 해명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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