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실과 긴장 관계에 있다. 좀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나는 줄곧 현실을 적대적인 태도로 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 속의 분노가 점차 사그라지자, 나는 진정한 작가가 찾으려는 것은 진리, 즉 도덕적인 판단을 배격하는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사람은 다 마찬가지라네. 손을 뻗어 다른 사람 주머니에서 돈을 긁어낼 때는 미간을 펴고 웃음을 짓지만, 자기가 돈을 내줄차례가 되면 하나같이 울상이 되거든

젊었을 때 난 정말 개같은 놈이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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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 - 전 세계를 휩쓴 역사
줄리아 로벨 지음, 심규호 옮김 / 유월서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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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란 무엇인가. 영어에서 마오주의자 또는 마오주의란 두 용어는 미국에서 냉전시기 중국을 분석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일종의 외부 위협을 의미하는 '붉은 중국'을 유형화하고 정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그것은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일원화된 권력에 의한 억압의 광기로 간주되던 모든 것들을 일축하는 포괄적인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본서에서 말하는 '마오주의'는 지난 80년 이래로 마오쩌둥과 그의 영향력에 기인하는 광범위한 이론과 실천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P20). 책을 주문하면서도 그랬지만 책을 받고 나서도 저자가 과거 서구가 바라보는 중국, 그러니까 냉전적 시각에 의한 마오주의를 다룰까봐 우려스러웠다. 그러나 저자도 밝히듯 책은 후자적 방향으로의 마오주의를 다루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도 이에 더 관심이 있었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저자는 마오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그 영향력에 대해 부인할 수는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 책은 중국 혁명의 역사와 영향(과 평가)으로서의 마오주의를 다루고 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인 국제 공산주의는 무너졌지만 중국은 살아남았다. 그 중심에 마오쩌둥이 있고 마오주의가 있다. 마오주의는 끝내 살아남아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공산권에 영향을 미쳤고 자국 내 신마오주의가 부활함으로써 그 영향력은 지속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저자는 기존에 퍼져 있던 마오주의에 대한 분석은 빠져 있거나 왜곡된 이야기가 많다고 이야기하며, 가장 큰 문제는 마오주의를 글로벌적 관점에서 보지 않는 것에 문제점이 있다 진단한다. 


마오주의의 시작은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저작에서부터다. 그가 없었다면 중국 내외의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를 상상하기 힘들다. 스노는 이른 시기부터 중국공산당을 국제적인 홍보의 천재로 조명했고, 마오쩌둥의 사상과 실제 성격과는 다른 그의 페르소나를 묘사하여 국경과 언어, 계층을 넘어 전 세계의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 중산 기득권층의 성장 배경에서 자란 그는 프리랜서 기자로 돈을 벌기 위해 1928년 상하이에 입국했다. 초반에는 중국에서 어렵게 지내다가, 1930년대 초 들어 쑹칭링(쑨원의 부인)을 만난 것을 기회로 삼아 이후 중국 정치계 인물들을 두루 만나게 된다. '중국의 붉은 별'에는 스노가 공산당 근거지로 잠입하는 과정과 중국공산당의 생존을 위한 투쟁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중국공산당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루며 좋은 이미지를 확산시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저작에는 마오쩌둥 개인에 대한 옹호를 넘어선 추종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 내 자신의 이름을 높여가다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것은 정풍운동 때문이다. 1942년 정풍운동은 문화대혁명의 전신이라 불리는데 형태를 보면 문화대혁명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풍운동'은 마오쩌둥이 1941년 공산당 최고 영도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당내 기율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격 목표를 고립시키고 왕년의 동료들을 비판 공격에 가담하도록 권유하며, 대중집회(중국의 군사적 용어로 말하자면 비판투쟁대회이다)를 개최하여 공개적으로 '적'에게 굴욕을 가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이와 유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강제적으로 대중의 집단적 조롱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풍운동'은 "역사상 가장 야심찬 인간조작 시도 가운데 하나"로 바뀌었다. 1950년대 미국은 이런 운동을 '세뇌'라고 불렀고, 중국은 이를 '사상개조'라고 불렀다(P69). 


1950년대 중국과 세계는 '세뇌'와 '도미노 이론'으로 대표할 수 있겠다. 중소동맹이 맺어지자 미국은 한 지역에서 공산주의가 시작되면 다른 나라도 연쇄적으로 공산주의가 팽창하며 도미노처럼 무너진다는 '도미노 이론'을 펼치며 색깔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세뇌'는 에드워드 헌터가 지은 두 권의 저작인 '붉은 중국의 세뇌(1951)', '세뇌: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1956)'로 대표된다. "중국이 자유 세계를 향해 심리전을 벌이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했다. 에드거 스노에 이어 에드워드 헌터의 저작으로 마오주의는 강화될 수 있었다. 

중소 갈등은 냉전을 앞당겼고, 마오쩌둥은 중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근절하기 위해 급진적인 문화 대혁명을 일으켰다. 그 결과, 대기근으로 스스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자신의 정적이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을 끌어내리며 피바람을 일으켰다. 


1960년대 중국의 국내 선전 매체에는 세계 혁명에 대한 언급으로 넘쳐났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심지어 음악과 수학 교과서, 연극과 보드게임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지도자가 세계 혁명의 공동체를 영도하는 형상으로 가득찼다. 1960년대 중반에 성인이 된 세대는 특히 이런 선전을 잘 받아들였다. 중국 신문 및 방송 매체는 도처에서 그들 부모 세대가 참전하여 누렸던 영광스러운 군사적 희생(제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그들도 놓칠 이유가 없으며 세계 무장투쟁의 혁명가가 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저자는 마오주의가 세계적 보편성을 표방했으나 단지, 지역성을 띤 국제화 형식이었다 말하며 이를 '고등 마오주의'라고 말한다. 당시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나의 부모님도 전후 세대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한 것에 대해 늘 자랑스러워하셨다. 아직도 어릴 적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로부터 전쟁과 이념에 대한 색깔론을 소리 높여 들을 때가 악몽처럼 떠오르곤 한다. 


마오주의의 영향력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도 이어졌다. 북베트남은 중국의 토지개혁과 비슷한 개혁을 실시했으나, 가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사회적인 양극화를 불러 일으켰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북베트남에 중국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제네바 협정에서 중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하기를 꺼렸던 미국이 베트남 공산당의 통일화 연기를 미루도록 설득하여 베트남 분단이 확정되도록 만들었다. 1960년대 들어서 중국의 국내 정책(문화 대혁명 등)에 의구심을 품은 베트남은 중국과 갈등하게 되고, 이는 양국이 미국과 화해를 시도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1975년, 크메르 루주(캄푸치아공산당)의 총서기인 폴포트와 회견했다. 당시 크메르 루주 지휘부는 모든 도시의 주민들을 농촌으로 소개시켰으며(그 과정에서 프놈펜에서만 약 2만여 명을 즉결 처형했으며, 수많은 주민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화폐와 시장을 폐지하고, 집단화를 강제했다. 중국은 캄보디아를 베트남에 대항할 국가 세력으로 간주하여 크메르루주의 행동을 용인했다. 이는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악화시키게 만들었다. 이후 크메르루주는 1977년 베트남과 관계를 단절한다.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 사건이 벌어지자 영국과 미국이 개입했다. 공산주의자 동조자명단을 인도네시아 군부에 넘기고 준군사조직인 암살단에 자금을 지원하며, 왜곡된 선전 방송으로 인도네시아 공산주의 공포와 혐오를 확산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때 인도네시아 국내 학살은 은폐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정당 방위로 벌인 일임이 강조되었다. 학살 전 인도네시아 사회는 군부와 인도네시아 공산당 사이 양극화로 인해 민간인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폭력은 더 극성스러웠다. 1년 동안 군대와 민병대의 폭력으로 인해 최소 50여만 명이 사망했다는데, 장소만 다르지 한국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기에 씁쓸함이 일었다.


남아시아의 마오주의 현상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전 세계 마오주의에 대한 이미지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우선 그 사상이 국경, 민족, 언어, 사회를 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남아시아에서 문화대혁명의 이론과 실천은 국가와 사회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켰다. 남아시아에서 마오주의는 인도 사회의 카스트제도와 인종차별에 적응해야만 했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마오주의 정치는 사회 저변의 불만과 결합했다. 예를 들어, 인도의 마오주의자들은 탈냉전 시대에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정치운동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그들은 가난한 농촌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겠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빈곤한 농촌사회가 더욱 심각한 폭력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네팔 마오주의는 1940년대에서 1950년에 이르기까지 탈식민지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 네팔 왕조의 종말 등으로 급격한 전환을 맞았고, 1960년대 문화대혁명과 그 여파로 시작되었다. 네팔 마오주의자들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물론 네팔 뿐만은 아니다). 카말라(프라찬다라는 별명을 가짐)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는데 그는 네팔공산당의 일원이 되어 향후에는 마오주의 반란을 이끄는 리더가 된다. 그녀의 해방 운동의 시작은 구조적인 불평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생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요? 왜 오빠만 학교에 갈 수 있고, 나는 안 되지요?" 그녀가 한 말이다. 어느 곳이든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은 불평등의 밑바닥에서 시작되고 이는 자유를 꿈꾸게 만들며 해방을 꿈꾸게 한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도 마오주의가 퍼져 있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현대 경쟁 사회로 뛰어들어야 했던 때 반식민, 반서구주의에 입각한 중국의 메시지가 먹혀 들었던 것이다. 1960년까지 아프리카에서 매주 15시간씩 선전방송이 나왔고, 신문 매체는 중국과 아프리카의 각종 합작에 대한 기사나 사진으로 홍수를 이루었다. 마오쩌둥 서적이 전국적으로 배포되었으며, 무엇보다 중국의 전폭적인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국에 의한 아프리카 현대화 시도는 실패했다. 탄자니아는 기근이 일어났고, 짐바브웨는 일당 독재와 경제적 재앙이 나타났다. 두 국가 모두 안정적인 정치, 경제적 통치 체제를 원했으나 모두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1960~1970년대 서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유에 의한 갈망과 해방으로서의 분투와 저항 행동을 일으켰다. 문화대혁명은 젊은이들에게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다"라고 부추겼다. 유럽과 미국인들은 문화대혁명의 목표를 자신들의 그것과 동일시했지만 이는 마오쩌둥의 정치 자체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의 정치를 멀리서 지켜본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이것이 팩트가 아닐까). 

1980년대 페루 정부는 무능했고 부패했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은 '빛나는 길'이었는데 그들을 이끈 구스만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비타협적 전쟁 모델을 선택했다. 이후 구스만은 페루 공산당을 창당하며 수장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국가 기구를 압살하고 도시와 농촌, 백인과 메스티소, 인디언 사이 갈등을 조장하여 뿌리 깊은 차별을 만들어냈다. 인종과 계급을 넘어선 평등을 내세운 공산주의가 오히려 차별을 조장했음은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마오쩌둥은 보시라이에 의해 부활했고 마오주의는 시진핑에 의해서 더욱 그 흐름이 강화되었다. 그렇다면 신마오주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다. 현대 신마오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에 따르면, '대중민주주의'는 문화대혁명의 '네 가지 자유', 즉 '자유로운 발언', '자유로운 조직과 활동', '자유토론', '대자보'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언론 자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중이 여론을 통제하는 것을 촉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중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자유는 '사회주의적'이고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따라서 언론은 거의 모두 필연적으로 민족주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현재 중국에서는 마오쩌둥과 마오 시대에 대한 공식적인 해독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중국공산당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누구나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얼마 전 베이징에서 관광객이 무심코 사진을 찍었다가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셜미디어가 강화되면서 중국 정부와 언론은 이를 경계하는 흐름을 더 강화하는 것 같다(위챗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도 여전히 마오주의가 유효한 이유와 그 특징이 무엇일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반제국주의의 물결로 그 영향력이 컸다. 둘째는 제3세계에서 더 유효했다는 점. 셋째는 반공주의에 대항 기저로 공산주의가 더 확산될 수 있었다는 점. 넷째는 공산권이 무너졌음에도 중국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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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7-04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물흐르는 듯한 정리!!! 박수를~~!!!
탈식민 공부하면서 꼭 참조할 레퍼런스 중의 하나로 넣어야 할 것 같은 책 이네요 ㅠㅠㅠ 아직은 멀었지만…! 중국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생각과 복잡한 맘이 듭미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4-07-08 13:47   좋아요 1 | URL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도 중국에 대해서는 특히나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냉철하게 평가할 것은 평가하되 껴안아야 할 것은 껴안아야 하는데 한쪽으로 쏠리기 쉬운 것 같아요. 그럴수록 잘 알려고 노력해야지 하는 생각이 큽니다. 탈식민 공부할 게 너무 많아요ㅠㅠ 쟝 님 앞으로도 화이팅!
 
마오주의 - 전 세계를 휩쓴 역사
줄리아 로벨 지음, 심규호 옮김 / 유월서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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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의 역사와 영향(과 평가)로서의 마오주의를 다루는 책이다. 현대까지 마오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 기원을 살피고, 마오쩌둥을 비롯한 전 세계에 퍼져 있었던 마오 키즈를 소환한다. 마오주의를 글로벌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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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동안 글을 써야지 해놓고 게으름 피우다 타이밍을 놓쳐서 이제야 글을 쓴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이제 민망할 정도다. 어영부영 하다보니 벌써 한 해의 반이 흘러버렸고…
요즘은 양이든 질이든 책을 마음껏 읽지를 못하는지라 더 시간이 속절 없이 흐른다는 느낌이 든다.

금요일에 미쳐서 두 차례에 걸쳐 책을 주문했다. 사실 한 번에 구매해도 되었을 걸 커피 쿠폰 때문에 2번이 되었다^^;
특히나 요즘은 스트레스 받으면 책 주문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제는 좀 한숨 놓겠지 생각했는데 금요일에 일이 터져서는 이리 되었다.

<뭉우리돌의 **> 시리즈는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앞으로 시리즈가 더 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일단 먼저 샀다.
<미들마치 2>는 앞선 1권에 이어 읽으려고 샀다.
<한국전쟁> 정병준 선생님 작은 진작 샀어야 할 것을 이제야 샀다. 한국전쟁 관련된 책이면 어김없이 레퍼런스로 언급되는 책이므로 더는 미룰 수 없다 생각했다.

그리고 펀딩을 한 책이 있는데 이 두 권이다.
<마오주의>는 주말 동안 읽었고 리뷰가 남았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 세트>는 기획만으로 안 살 수가 없는 책이었다. 목차가 있었으면 고르는데 도움이 더 되었겠지만. 이미 서재 친구분들 중에서도 펀딩한 분이 있는 것으로 안다. 모쪼록 잘 나오길.











요즘은 솔직히 드라마를 훨씬 많이 본다. 집중력도 떨어져서 책을 오래 붙잡고 있지를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읽기든 쓰기든 퇴화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좋았던 노래를 찜해 놓았다 샤잠을 통해 검색하고 오며 가며 듣는다.
머리 식히기에 딱 좋다.


이 곡은 매번 들어도 좋고 청량해서 자주 듣는다. 이 가수 발음이 또렷해서 공부하기에도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도 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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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7-01 16: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트레스 받으면 책 주문 ㅠㅠ 흑흑.. 화가님, 스트레스 때문에 책 주문했는데, 이왕 주문한 거, 주문한 후에 그것 때문에 다시 스트레스 받지는 말자구요~!

거리의화가 2024-07-02 12:53   좋아요 1 | URL
다들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은 잠들기 전에도 일로 머리가 지끈할 때가 많아요ㅠㅠ 말씀하신대로 구입은 구입한 것으로 만족하고 못 읽는다고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요! 응원의 말씀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4-07-01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릇푸릇! 마오주의 북펀딩하는 거 눈여거 봤는데 궁금해요! 화가님의 리뷰 기다려요~!

거리의화가 2024-07-02 12:54   좋아요 0 | URL
오늘은 비가 와서 그나마 시원하네요. 푸릇푸릇해서 여름이란 생각을 합니다. 좀 무덥기는 하지만^^;
마오주의 방금 리뷰 올렸습니다. 쟝님께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다락방 2024-07-02 0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 책들은 다 두께가 좀 있네요. 시간이 빨라도 산책은 놓지 않고 지내기로 합시다, 거리의화가 님. :)

거리의화가 2024-07-02 12:55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두께가!ㅎㅎ 뭉우리돌은 생각보다 더 두꺼워서 놀라기는 했습니다.
몸이 오락가락해서 덜 걸었는데 다시 열심히 걸어보려고 합니다. 덥기는 하지만 더울 때 산책은 또 다른 묘미가 있으니까요. 건강 잘 챙기세요!
 

1942년의 ‘정풍운동‘은 마오쩌둥이 1941년 공산당 최고영도자가된 이후 처음으로 당내 기율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고 철저했으며 또한 복잡했다. 공산주의 테러의 체계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도 이러한 정풍운동을 서술하거나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왕스웨이를 처리하는 방식은 스탈린식의 마녀사냥이라는고전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공격 목표를 고립시키고 왕년의 동료들을 비판공격에 가담하도록 권유하며, 대중집회(중국의 군사적 용어로 말하자면비판투쟁대회이다)를 개최하여 공개적으로 ‘적‘에게 굴욕을 가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이와 유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강제적으로대중의 집단적 조롱을 유도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를 통해 ‘정풍운동‘은 "역사상 가장 야심찬 인간조작 human manipulation 시도 가운데 하나로 바뀌었다. " - P69

에드거 스노는 마오주의 역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주인공이다. 왜냐하면그가 없었다면 중국 내외의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를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중국의 붉은 별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음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탁월한 신문기자의 보도물가운데 하나라는 칭송을 받은 이 책은 중국 공산주의 운동과 마오쩌둥을 둘러싼 추종자들과 여러 교조적 원칙을 인간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명목상의최고영도자(마오쩌둥)를 창조해냈다. - P100

미국에서 중국인들의 세뇌에 관해 암시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미군들이 한국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기간에 발표한 에드워드 헌터의 저작물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헌터는 자신의 생각을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위협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가 진단한 중국의 위협은 세계적인 범위까지 확대되었다.
붉은 중국의 세뇌』는 그가 말한 중국의 영향력과 세뇌의 ‘궤적‘을 따라전후 말라야 정글과 베트남의 반식민지 갈등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 P144

1960년대 중국의 국내 선전 매체에는 세계 혁명에 대한 언급으로 넘쳐났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심지어 음악과 수학 교과서, 연극과 보드게임에 이 - P205

르기까지 중국의 지도자가 세계 혁명의 공동체를 영도하는 형상으로 가득찼다. 1960년대 중반에 성인이 된 세대는 특히 이러한 선전을 잘 받아들였다.
중국 신문 및 방송 매체는 도처에서 그들 부모 세대가 참전하여 누렸던영광스러운 군사적 희생(제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그들도 놓칠 이유가 없으며 세계 무장투쟁의 혁명가가 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 P206

1966년 마오쩌둥은 ‘수정주의‘에 대한 국내외 투쟁을 통해 문화대혁명을 야기하여 국내의 정적, 특히 1962년 대약진이라는 급진적 비전을 끌어내린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공격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소련에서 훈련받았거나 소련의 영향을 받은 중국 관료 집단이 중국 혁명과 세계혁명 모두에 내부 이데올로기적 위험을 초래한다고 믿었거나 적어도 그럴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국내 수정주의자들과 국외 수정주의자들이 결탁하여 우위를 점한다면 중국 정부를 잠식하여 적지 않은 이들이 중국 인민과국외의 혁명에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오쩌둥과 그의전 세계 신도들이 애용했던 이른바 ‘두 노선의 투쟁兩個路‘이론, 즉마오쩌둥의 지속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수정주의자들의 부르주아 반동 노선 사이의 투쟁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근절시키기 위해 신속히 문화대혁명을 개시했다. 소련의 영향을 받은 수정주의자들이 득세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외국(소련이나 서방)과 연계되었다고 의심되는 사람에 대한 폭력과 중국 사회의 군사화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 P209

1965년 9월 대학살 전야에 인도네시아 사회는 극도로 분열된 상태였다.
한쪽에는 지역 엘리트들과 지주, 무슬림 지도자들이 포진하고 다른 한쪽에는 공산당 조직과 긴밀하거나 또는 느슨하게 연결된 사람들이 자리했다. 군부와 인도네시아공산당 사이의 권력 양극화로 인해 민간인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균열(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균열)은 이후 1965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이어진 폭력을 더욱 극성스럽게 만들었다. - P250

마오쩌둥이 살아 있을 당시 중국이 아프리카에 많은 원조를 했다는 것은분명 사실이나 그 수치를 정확하게 산출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부실 대출이 너무 많았고 예산을 초과한 특별 지원이 지나치게 많았으며 임무가 종료된 후에도 여전히 아프리카에 남아 있는 기술자나 고문단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 P310

로버트 무가베의 무자비한 권력에 대한 집착은 그를 몰락 당시 세계에서가장 오래 재임한 국가 원수로 만들었고, 국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마오주의는 짐바브웨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 문혁시대의 전략이 ZANU의 정치와 군대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것은 심각한 결함이 있는 정치 모델이었다. 페루나 인도, 네팔의 경우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다시피 ‘고등 마오주의‘는 국가를 전복시키는 데 유효한 군사전략을 제공한다. 하지만 일단 집권한 후에는 매우 문제가 많다. 통고가라 등이 1960년대에 학습한 마오주의는 ZANU에게 당과 당의 최고 지도자가 항상 옳고 당이
‘인민의 적‘으로 지목한 자들을 절명시킬 수 있으며, 군사적 이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음모로 가득 차고 전체주의적인 정치 모델을 남겨주었다. - P318

미국정책 입안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로 분열된옛 인도차이나의 공산당들이 용의 진격에 환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는 도미노 이론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중국 지도자들은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의 다른 지역을 ‘세계 혁명‘의 도미노로 간주했으며, 종종 이러한 영토를 중국 이익의자연스러운 확장이라고 독단적으로 말하곤 했다. 베트남인들은 인도차이나가 중국의 도미노가 될 것을 두려워했고, 캄보디아와 중국은 베트남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했다. 1960년대 서방의 정책 입안자들은 베트남인들이 수천 년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수 세기 동안 중국 제국을 팽창주의 세력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불만을 갖고 분개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경시했다. - P326

서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문화대혁명의 마오주의는 진지한 반제국주의만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반란을 의미하기도 했다. 마오주의 열풍이 불었던 각나라에서 젊은이들의 저항 운동은 개인적, 지역적, 국제적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문화대혁명은 불만을 품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젊은이들은 활력과 생기가 넘쳐 마치아침 8시나 9시의 태양과 같다.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다"라고 부추겼다. 1969년 서베를린에서 열린 사민당 반대 집회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임의로 개사한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당신들은 늙었고, 우리는 젊다. 마오쩌둥!"
문화대혁명이 많은 미국 학생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그들의 반체제 운동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 P404

1980년대 초의 페루는 1930년대 중국과 확연히 달랐다. 페루는민주국가였고, 인구의 3분의 2가 도시에 거주했으며, 페루인의 4분의 3이 글을 읽을 수 있었다(1950년대 중국은 도시에 거주하는 식자층이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전기 기술자, 농학자, 인류학자, 외국 비정부조직, 시민사회 복지 활동가 등이 페루의 생활 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마오주의의 이념에 따르면, 가장 빈궁한 농민들이 혁명의 중추가 된다고 했지만 페루에서 농민들은 인디언들조차 그들 나름의 권력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백인이나 메스티소 위주의 센데로의 지배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 P475

남아시아의 마오주의 현상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전 세계 마오주의에 - P490

대한 이미지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우선 그 사상이 국경, 민족, 언어, 사회를 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남아시아에서 문화대혁명의 이론과 실천은 국가와 사회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켰다. 인도와 네팔의 마오주의파 지도부는 사회적 구성에서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패턴을 따랐다. 페루, 캄보디아, 서유럽, 미국에서와마찬가지로 남아시아 마오주의의 지도부 역시 교육받은 엘리트층에서 나왔다. 그러나 인도(그리고 이후 네팔)의 마오주의는 이러한 정치 계획이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변화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서독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오주의정치는 사회 저변의 불만과 결합했다. 그러나 인도의 마오주의자들은 탈냉전 시대에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정치운동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그들은 이러한 신조의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다시 말해 인도 마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가난한 농촌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겠다고주장했으나 오히려 빈곤한 농촌사회가 더욱 심각한 폭력에 시달리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 P491

네팔 마오주의의 급진적 비전은 20세기 두 가지 우연한 사건에서 기인한다. 그 하나는 1940년대에서 1950년에이르기까지의 급격한 전환(예를 들어 남아시아의 탈식민지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 네팔 라나Rana 왕조의 종말 등)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문화대혁명과 그 여파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야기한 장기적영향을 이해하지 못하면,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가 공산주의에 대한자본주의의 결정적인 승리로 인류가 ‘역사의 종말‘에 이르렀다고 선언한 지7년 만인 1996년 역설적으로 마오주의 반란이 분출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
1951년 네팔의 농촌에 거주하는 불만 세력과 인도로 망명한 네팔인들이연합하여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한 세기 동안 카스트제도에 기반한사리사욕에 착취를 일삼던 과두 정권을 앞세워 국가를 통치한 라나 왕조를권좌에서 몰아냈다. - P541

1960년대를 지나면서 보시라이는 충칭으로 가서 놀라운 정치적 실험을 단행했다. 이는 마치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 거의 40년이지난 지금, 중국공산당에게 마오의 시대는 대중을 끌어들이고 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홍가(공산당 혁명 가요)와 같은 상징을 제공했다고 말해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들은 마오주의가 빚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과거라는 상자에 가두어 두면서 이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 P616

그의 흥망성쇠는 중국에 심각한 흔적을 남겼다. 그의 구속으로 중국 부패에 대한 외국 언론의 탐사보도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구카이라이의63친척들이 1억 2600만 달러를 몰래 빼돌렸고, 이 중 27억 달러가 당시 총리인 원자바오의 가족에게 흘러들어간 사실이 밝혀졌다. 보시라이 사태직후 중국 당국은 보시라이의 ‘충칭 모델‘을 열렬히 지지했던 대중 좌파 오유지향을 폐쇄했다(많은 사이트가 몇 달 후 재허가를 받고 다시 개설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매우 저조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공개적으로 마오주의 가치관에 찬사를 보내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 셈이 되고 말았다. 보시라이가 숙청되고 2012년 11월 그와 마찬가지로 관이대(공산당 고급관리의 제2세대)인 시진핑이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올라 마오주의 가치관을계승했기 때문이다. - P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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