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 - 막북 초원에 고립된 위구르의 발전 모색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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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돌궐 유목제국사에 이어 흉노 유목제국사를 연달아 읽고, 이 책의 출간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돌궐 유목제국사, 흉노 유목제국사에 이어 위구르 유목제국사가 재출간됨으로써 비로소 고대 유목제국사 3종의 역사가 완성되었다. 


아시아의 유목 세계를 중심으로 한 제국이었음에도 위구르는 앞선 흉노와 돌궐과는 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위구르는 막북 초원을 가로지르는 셀렝게강의 지류들을 따라 발달한 초원을 중심으로 유목을 했다. 위구르의 역사는 1955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만들어진 뒤 중국의 위구르 연구가 본격화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위구르 지배 집단인 야글라카르 출신의 족장 쿠틀룩 보일라는 돌궐을 무너뜨리기 위해 바스밀과 연합하여 카를룩을 초원 서부로 내쫓고 스스로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을 칭하며 자립했다. 753년 국가 회복을 선언한 위구르는 국가 회복 선언 후 독자성을 강조하며 차별화를 들고 나왔다. 쿠를룩 카간 사후 집권한 아들인 카를룩 칸은 체제 정비를 위해 군사 원정을 통해 셀렝게강부터 알타이 산지의 유목 중심 지역을 확보하려 했다. 


카를룩 카간은 유목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세력 갈등을 개인적 노력을 통해 해소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분열을 통합하려 했는데, 이것이 초기 위구르의 취약점이었다. 돌궐의 종주권을 인정했던 거란, 키르기스, 튀르기쉬, 카를룩 등이 여전히 신흥 위구르에 도전했다. 또한 위구르는 막남으로 밀려난 돌궐 항호가 다시 막북 초원으로 돌아오는 것도 막아야 했다. 돌궐은 위구르를 다시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적 위협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위구르는 687년 돌궐이 부흥해 막북으로 복귀하자 터전을 잃고 쫓겨난 뼈아픈 경험이 있었다. 막남에 건재한 돌궐 항호의 복귀를 막기 위해서는 막북 초원 중심의 체제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를 위해 카를룩 카간은 조상이 물려준 외튀켄을 중심으로 한 셀렝게강 유역의 확보와 유지에 역점을 두었다. - P132


위구르는 체제 정비를 위해 백성인 보둔을 재편하여 정리한다. 핵심 집단은 야글라카르와 인척으로 하고 그 아래 연맹 집단, 종속 집단, 부용 집단으로 나누어 각각 구성한다. 그 뿐 아니라 구성회흘(구성회골)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부족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나 위구르 일(국가)’라 선언하며 국가 연합으로 발돋움한다. 거기에 친병 집단을 확보하고 카간을 중심으로 각각의 장을 대표로 관리를 두고 병력의 수에 따라 그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지배 체계를 완성시켰다. 


안녹산의 난 등이 발생하며 당의 힘이 약해지자 위구르는 당과의 관계를 더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안녹산 진압을 위한 군사를 원조하고 당과의 혼인 관계를 성립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뵈귀 카간 때는 친정을 하기도 한다. 도시 건설을 확대하고 마니교를 수용하면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양쪽으로 단단히 했다. 


안녹산의 봉기 이후 10여 년에 걸친 당의 내전 과정에서 막남 초원에 대한 기미 지배는 완전히 무너졌다. 당뿐만 아니라 복고회은을 대표로 하는 막남 초원의 투르크 유목 세력 역시 약해졌다. 기미 지배를받던 투르크계 유목민(돌궐 잡호)이 7세기 중반부터 약화되었고, 740년대 중반에 이르러 돌궐 붕괴 이후 남하한 막남의 돌궐 항호 또한 부흥운동으로 당에 도전하다가 소멸했다. 당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질서가완전히 무너지면서 ‘유목 세계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위구르는 막북 초원을 장악하고, 당과의 경제적 관계를 독점했다. - P172


760년대 위구르는 당으로부터 확보한 막대한 양의 비단을 바탕으로 교역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마니교도 상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무역상이던 소그드 상인이 당의 무역을 제재하고 뵈귀 카간의 숙부인 타르칸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곤란을 겪기도 한다. 


또 780년대 당이 위구르 사신을 살해하면서 위구르는 당과 갈등을 겪게 된다. 당과 토번은 이때 청수지맹을 맺고 위구르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고립되어 있을 수 없었던 위구르는 회골로를 개설하여 북정과 안서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연결(회골로)하여 당과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 북정 재진출을 둘러싸고 지배 집단인 야글라카르 간의 내분 과정에서 쿠틀룩은 북정을 점령하며 집권했고 지배 집단도 교체되었다. 820년 당과 화의를 맺고 위구르는 서방 경략을 시작하게 된다. 


쿠틀룩이 북정을 점령해 톈산산맥 주변으로 진출한 것은 위구르가 유목제국으로 발전하는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다. 앞서 흉노, 유연, 돌궐 등도 그랬듯이 서방 지역은 공납이나 물자의 획득뿐만 아니라 교통로 확보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몽골 초원에서 성립한 유목국가가목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얻어낸 물자를 유통할 수 있는 ‘교통로‘가 필수적이었다. 이는 오아시스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규모 도시국가라는 취약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목 세력과 연계해 교역하고, 좀처럼 문호를 열지 않는 중국과도 교류할 여건을 만들어야 했다. 소그디아나 출신뿐만 아니라 톈산산맥 주변의 오아시스 주민들은 유목국가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발전을 도모했다. 즉 유목국가와 오아시스는 한쪽을 잃으면 다른 한쪽도 존립에 문제가 생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다. - P249


그러나 위구르는 지배 집단이 갈등하던 와중 자연 재해가 덮치고, 키르기스 공격이 이어지면서 붕괴되고 만다. 멸망은 정말 이렇게 몇 개의 우연과 필연이 겹치면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다. 과거 발해의 역사가 떠오르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840년 위구르 유목제국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자연재해에 의해 유목 생산 구조가 파괴되고, 지배 집단의 내분이 발생한 상황에서 키르기스를 비롯한 종속 집단의 공격까지 받는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위구르는 키르기스가 떠난 몽골 초원으로 돌아와 재기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력으로 쪼개지고 흩어져 각자도생하게 되었다. 하나의 유목제국을 형성했던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가 해체되고 만 위구르의 ‘빅뱅 big bang‘은 그 주변의 여러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9세기 후반 국제 질서의 재편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10세기에 본격화되는 이른바 동아시아 ‘민족이동‘의 발단이 되었다. - P302~303


이때 위구르인들은 흩어지고 주변 세계도 재편되었다. 그러나 고창 위구르의 후예인 고창왕은 과거 위구르의 문화 유산을 잊지 않고 이어나갔다고 한다. 


14세기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던 위구르의 후예 고창왕에게 과거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조상이 남긴 역사적 경험은 너무나 중요했다. 조상의 원주지를 새로운 세력인 몽골계 이주민에게 넘겨주고, 대제국을 건설한 그들에게 지배당하며 하서에 머물던 그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영광스러운 역사를 꽃피우고자 했다. 몽골 초원을 무대로 유목제국을 건설했던 선주민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당대의 지배세력인 몽골제국과는 다른 역사 인식을 보여주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했다. - P345


위구르는 기본적인 투르크계적 요소에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변용하여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특히 위구르 문자는 소그드 문자를 변용한 것으로 고창 위구르가 인도유럽어 사용자이면서도 위구르라는 역사 전통을 이어 나가는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유목 권력이 중국 제도를 받아들여 한화되었다거나, 선진적인 중국 문화와 융합을 이루었다는 식의 설명이 많았다. 이는 유목국가를 정주 농경을 기반으로 한 중국에 비해 열등한 문화로 보려는 ‘문명사관’이자 ‘정주사관’에 따른 것이다. 

이 책은 앞선 흉노, 돌궐 제국사에서도 확인했듯 한문 텍스트 자료로만 사료를 사용하지 않고 비문 등의 현장 자료와 최근 유목사 자료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최신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 결과물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유목국가는 초원에서든 정주 지역에서든 군사적 장점을 유지하면서 외래 요소와의 ‘선택적 공존‘을 통해 다양성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역 국가‘를 지향했다. 흉노 이래 모든 유목제국이 이런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전했다. 따라서 위구르를 비롯한 유목국가를바라볼 때 ‘유목 아니면 정주‘라는 이분법이나 ‘유목과 정주만 있는‘ 이원적 성격이라는 관점보다는 ‘다원성‘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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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연대기 1931~2011
남화숙 지음, 남관숙 옮김 / 후마니타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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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끗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 P26~27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돌을 묶은 채 기와 지붕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강주룡. 그는 평양의 평원고무에서 일하던 여성 근로자로 죽음을 불사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그곳을 오른다. 그의 연설은 동아일보에 실리면서 을밀대 연설이라는 제목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후 민족주의 잡지에서 인터뷰까지 할 정도였다고. 노동자가 파업이나 시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월급이 밀리는 것이 기본일 테지만 받아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여겼을 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서 퇴로가 없다 생각했을 때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 하는 행동이 아닐까. 그야말로 절박함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마지막 노동자로 쌍용노조의 김진숙을 언급하는데 작가의 선택이 탁월하다 여겼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의 모습이 분명히 떠오른다. 높은 곳에 올라가 몇 백일간 자리를 지키며 권리를 주장하던 모습을 말이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계속된 식민 지배와 반식민 저항운동의 역사는 계급과 젠더 정치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행방 후 냉전 구도 속에서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진행된 남한의 민족국가 건설 과정은 계급과 젠더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협상의 불안정성을 증폭시켰다. 이 같은 격동하는 정치 지형에서 노동자와 여성을 사회 경제적으로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는 20세기 내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중대한 문제였다. - P13


한국 여성 노동의 역사가 얼마나 될까를 생각했을 때 한국전쟁 이후 즈음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이렇게 그 시기가 한참 앞서 있으며 노동자의 선두주자로 근대 일제 시기 강주룡을 언급하며 시작한다. 이전에 강주룡의 역사를 읽어본 적은 없었지만 한 장의 강렬한 사진으로, 또 몇 년전 문재인 대통령께서 언급하시기도 한 분이라 이름은 낯설지가 않았다. 


강주룡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사업이 망하여 조선을 강제로 떠나야 했고, 일찍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사망한 뒤로는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그는 1927년 무렵 평양으로 이주한 뒤 시내 고무공장에 취업했다고 한다. 강주룡을 포섭한 것은 지하 공산주의 그룹의 일원인 정달헌이었다. 그는 함경남도를 적색 노조 조직 운동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적색 노조 조직원 중 고무노동자들을 영입한 조영옥이라는 인물을 통해 강주룡은 평원고무에서 책임자가 되었다. 

이처럼 1930년대 무렵은 조선 내 사회주의 사상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전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남아 있어 많은 노동 쟁의가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 평양에서는 10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서울과 부산에서도 각각 4건, 3건의 고무 파업이 있었다. 1931년 평원고무 파업은 이렇게 앞서 있었던 노동운동의 성장에 기반해 있었다. 


1946년 해방 이후 좌파 세력인 전평 중심으로 산업 노조 활동이 시작되었다. 일본 적색 자산을 인수 받은 공장 노동자들은 이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며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 선거 발언 이후 전평 하에 있던 조방 분회는 총파업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우익 세력의 공격 대상이 되면서 전평 운동은 궤멸되었다. 조방 사장인 강일매는 조방 쟁의 기간 동안 이승만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노동자를 탄압했다고 한다. 


1952년에는 부산 임시 국회 건물에서 조방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부산 시가에서의 시위는 조방 쟁의로 민란을 방불케 한 분규였다고 한다. 현재 노사 관계를 규정 짓는 기본법인 노동법이 최초 통과(1953)되는데 기여한 핵심 쟁의였기에 의의가 크다.


급속한 도시화, 농촌인구의 대도시 유입과 함께 신흥 중산층 가정의 등장과 소비사회의 도래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낳았다. 1960년대 중반에는 ‘중산층’이나 ‘대중’ 같은 새로운 개념에 대한 논쟁이 처음 언론에 등장한다. 보수적인 젠더 관념이 지속되는 가운데 개발 국가의 경제정책과 성장 제일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돈벌이와 소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급격하게 변화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발전 약속이 계층 상승을 지향하는 중산층의 상당 부분에서 현실화되면서, 지난 수십 년간 평등을 지향하는 ‘균‘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탱되었던 하층민에 대한 동정적 인식은 물질적 부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신분의식으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계급 차별 문화는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육체노동자들의 열망과 충돌하며 갈등을 낳기 시작했다. - P251


1970년대에는 섬유와 전자 산업이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때 현재의 연공 서열에 따른 임금을 지급하는 체계가 정착되었으며, 가정을 책임지는 남성 노동자들에게 보다 더 많은 임금이 지급되어야 한다는 생활급(?)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생활급이라는 개념은 혀를 끌끌 차게 만든다. 그럼 그 가정이 굴러가게 만드는 일은 누가 하는지 곱씹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공순이'라는 단어도 이 때 등장하였다. '여공'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이라는데 나는 '공순이'라는 말 자체가 멸칭이 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말을 나도 대학 때 내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뒤에 붙이는 '순이'라는 말이 불쾌하기는 했다. 현재도 공과에 다니는 여학생을 이런 식으로 부르는지는 궁금하다(아니길 바란다). 


노동자 분신 사건하면 전태일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그보다 한참 앞선 1962년, 광주에 있던 전남방직의 김양이 자살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개신교의 산선, 가톨릭의 Joc를 비롯한 기독교 연합의 여성 노동자들이 합심하여 목소리를 내어 호소력을 발휘하겠다는 일념 하에 1976년 여성해방노동자기수회를 조직하기도 한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에는 학출을 택해 노동 지역 현장에 투신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1985년 노학연대를 기반한 구로공단 동맹 파업이 있기도 했다. 

1987년은 대한민국의 전 국민에게 특별한 해였으나 노동자들에게도 노동자 대투쟁 같은 굵직한 사건이 있었으니 특별한 한해였을 것이다. 물론 여성 노동자에서 남성 노동자로 노조 운동 지도부가 변화하였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IMF 이후가 되면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하고 비정규직이라는 또 하나의 체계가 자리를 잡는다. 


현재도 여전히 노동자의 위치는 위태롭다. 대기업에 다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도 위계가 갈리는 것은 기본, 같은 연차라도 남성과 여성 노동급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제는 플랫폼 노동자의 생태계도 추가되었다. 고객과의 사투, 나아가 갑질과의 사투로 노동자는 여전히 피로한 위치에 있다. 


이 책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만을 다룬 책은 많지만 여성 산업 노동자에 초점을 맞추어 쓰여진 책이라 가치가 있다.

내용은 대중서와 학술서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다고 여겨진다. 대중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어렵지 않게 쓰여 있는 편이다. 한국 여성의 노동사를 정제하여 읽을 만한 분량으로 묶었다는 데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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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일단 여성의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할 이 엄청난 수단을 쥐고 나면, 남성의 이기심은 여성을 종속 상태에 묶어 두기 위해그 본능을 최대한으로 이용한다. 그 방법은 여성들에게 유약함과 순종을,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모든 의지를 남성의 손에 맡기는 것을 성적 매력의 중요한 부분으로 재현해 내는 것이다.
이 통찰은 불평등한 조건하에서 선호라는 것이 어떻게 변질되는지에 대한 사회과학자들의 최근 연구에서도 관찰되었다. 존 엘스터(Jon Elster)의 『신 포도(Sour Grapes)』는 ‘그냥 적응하기 (adaptivepreferences)‘라는 개념을 이용해 봉건제의 오랜 지속성을 설명하면 - P94

서 18세기의 혁명들이 새로운 권리를 획득하기 전에 의식상의 혁명부터 요구했다는 사실 또한 설명했다. 엘스터는 이솝 우화집』에서 책의 제목을 따 왔다. 우화에서 여우는 먹고 싶은 포도가 손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서는 포도를 원하지 않는다고 재빠르게 스스로를 속여 욕심냈던 포도들이 신맛이 날 것이라 치부한다. 53 이러한 현상에 대해 연구한 다른 학자들은 변형된 선호라는것은 삶의 이른 시기에도 나타날 수 있어서 원래 탐냈던 것들을 절대원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도 강조한다. - P95

헤카베는 폴리메스토르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남자를 믿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것이 페미니즘의 일반적인 양상이다. (평등권 투쟁 양상도 같다.) 내가 더 젊었을 때 이성애자 여성은 페미니스트 명분에 불충한다는 죄목이 종종 따라붙었고, ‘여성 지향적 (woman-oriented) 여성‘이란 말은 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존경할 만한 페미니스트 집단에서도 구성원들에게 남성들과직업적으로 협력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곳도 있었다. (이는 평등을추구하는 다른 집단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경향이다.) - P105

이행 분노는 이미 벌어진 일을 밝히고, 동시에 개선책을 위해 미래를 향한다. 이런 유형의 분노는 가해자를 벌하자는 제안이동반되기도 하지만, 처벌을 미래 지향적인 방법 중 하나로 이해한다. 개혁으로서, 중요한 규범들의 표현으로서, 해당 가해자에 대한
‘구체적 제지‘로서, 그리고 유사한 범죄를 생각하고 있는 다른 가해자들에 대한 ‘보편적 제지로서 말이다.
이행 분노는 불의에 대항하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하다. 그것은분노 어린 저항이고, 저항은 잘못된 일들에 관심을 환기시켜 그 문제를 다루게끔 북돋는다. 이런 종류의 분노는 성격에 변형을 일으키는 ‘부담‘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대면하고 해결책들을 상상하도록 활력을 주고 해방시킨다. 이런 종류의 분노는 집착하거나왜곡되는 위험을 무릅쓰지도 않는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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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타는 북에서 임명되어 온 중국인 관리였지만 토착문화에 익숙한데다자신을 현지인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한이 중원을 재통일한 후 기원전196년 중국 사신 육가(賈)가 조타를 남 비엣 왕에 봉하러 왔을 때, 그는현지의 관습대로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다리는 쭉 뻗은 채 앉아서 맞이했다고 한다. 육가가 그의 무례한 행동을 지적하자 조타는 남방의 만이蠻夷)속에 오래 살다 보니 예절을 잊어버렸다고 변명을 했지만 그것은 단지 변명일 뿐이었다. 이는 조타가 육가에게 "나와 황제[한 고조] 중 누가 더 현 - P27

명한가?"라고 한 물음으로도 알 수 있다. 육가가 인구와 면적을 고려하면 그것은 비교할 수도 없는 바라고 답하자, 조타는 자기가 중원에서 일어났더라면 한의 황제만 못할 리가 없다고 하였다.
조타는 남 비엣이 인구나 영토 면에서 한에 비해 작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을 섬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한과 대등한 독립왕조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 P28

967년에 딘 보린은 장자인 리엔을 남 비엣 브엉(Nam Viet Vuong,
南越王)에 봉하고, 다시 1년 후에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중국식 연호를 버리고 자신의 연호까지 제정하여 타이 빈(Thai Binh, 太平)이라 하였다. 남비엣 브엉이란 칭호는 전한(前漢) 초기 한에 대항했던 조타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6세기 리본이 남 비엣 황제라고 칭한 것도 같은 맥락인데, 이는베트남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중국 사료들은 리엔이 남 비엣 브엉에 봉해진 것을 딘 보린이양위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딘 보린의 칭제를 몰랐든가 아니면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편 베트남에서 독자적 연호의 사용은 리본이 티엔 득이라고 한 경우가 처음이며 이때가 두번째인데, 이 역시 황제의 칭호처럼 중국 군주와 대등하다는 표시이다. 딘 보린의 황제 칭호라든가 연호 제정은 이후 베트남 모든 왕조 군주들의 전례가되었다. - P130

응우옌 푹 아인은 북진에 앞서 1802년 5월 푸 쑤언에서 제위에 오르고연호를 자롱(Gia Long, 嘉隆)이라 정했다." 자롱이란 자 딘에서 탕롱까지란 의미로 베트남 전체를 뜻한다. 연호의 제정은 통일에의 그의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한편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정한 응우옌 푹 아인, 즉 자롱 황제는 5월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는 떠이 썬 정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의 도움을얻고자 찐 화이 득(Trinh Hoai Duc, 鄭懷德)을 여청정사(如淸正使)로 광둥에 보냈다. 그가 처음부터 청에 보낸 사절을 ‘여청사‘라고 한 것은 청과 대등하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P257

쩐 왕조가 원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쩐 홍 다오였다. 그는 천부적 전략가로,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수도까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적의 - P169

힘이 강할 때에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게릴라 전법으로 이들을 괴롭히다가상황이 호전되면 전면공격을 하는 등 소수 병력으로 강대국의 침략을 저지했다. 그리하여 쩐흥다오는 오늘날 베트남역사상 위대한 영웅 가운데한 사람으로 꼽히며, 신으로까지 추앙되어 모셔지고 있다. - P170

고립무원의 왕통은 황제의 철군 명령이 도달하기 이전에 레러이와 화약을 맺고 1427년 12월 철수를 서둘렀다. 레러이는 이때 500척의 선박과많은 양의 식량을 제공하여 명나라 군대의 철수를 도왔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항전 10년 만에 20년에 걸친 명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의 독립을 이뤘다. 레러이는 이를 기념하여 응우옌 짜이에게 글을 짓게 하였는데,
유명한 「평오대고(平吳大誥)」이다.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일찍이 듣건대 인의(仁義)의 거사는 요체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있고, 조민벌죄(弔伐罪)의 군사는 포악함을 제거하는 일보다 앞세우는 일은 없다고 한다. 우리 다이 비엣 국(國)은 진실로 문명화된 국가이다. 산천 - P199

의 경계가 다르고 남북의 풍속 또한 다르다. 우리는 찌에우(趙) • 딘(丁)·리(李)・쩐(陳)이 창업할 때부터 한·당·송·원과 더불어 각각 그 나름의 영토에서 황제를 칭하고 다스려왔다. - P200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종전 후 인도차이나를 신탁통치해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장제스에게 전후 인도차이나 지역을 통제하에 둘 것인가를 묻자, 장제스는 그곳 사람들은 다루기가어렵다고 하면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직접 언급은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장제스에게는 국내의 공산당과 군벌 같은 문제가 인도차이나보다 더중요했다. 그때문에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대신 제안하기를, 인도차이나가 전후에 독립할 수 있도록 중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장제스의 이러한 제안은 1943년 중국 내의 여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의 정치지도자들과 지식인들 대부분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지배권은 박탈되어야만 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누가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 P308

하노이정부는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캄보디아왕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베트남에서 훈련받고 귀국한 인물들이론 놀에 대한 왕정의 저항운동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지만 북베트남군의 주둔을 원치 않던 친중국 계열인 폴 포트(PolPot)의 크메르루주(Khmer Rouge)가 1971년 7월 베트남공산주의자들과의관계를 끊기로 결정하고 베트남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캄보디아인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여 1972년에는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 P417

1975년 통일 후 하노이정부는 남부의 정치적 통제와 사회주의화 정책의 필요성에 의해 남부 화인의 통합을 위한 급격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앞서 호찌민 시가 점령된 1975년 4월 30일 밤 중국인들의 거주지인 쩌런(Cholon) 지구에서는 중국 국기와 마오쩌둥 초상화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는가 하면, 일부 중국인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 물자를 매점매석하여 경제상황을 악화시켰다. 3001976년 1월 베트남정부는 남부의 모든 화인들에게 국적을 등록하게 하고, 이어 2월에는 강제로 베트남 국적을 취득케 했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식량배급에서도 차등을 두었다. 다시 이듬해 2월하노이정부는 베트남 국적 취득을 거부하는 화인들에게 직업을 제한하고이주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자유의사 형식으로 귀국시킬 방침을세웠다. - P441

중국의 1979년 2월 베트남 침공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 아니었는가 한다. 양국의 분쟁이 특별히 어느 쪽으로 유리하게작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양자는 전쟁의 승패를 떠나 언제까지대립할 수만 없었다. 베트남은 전쟁을 통해 중국의 전통적 중화주의를 재삼 인식하면서 앞으로도 계속될 위협에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생각하며타협점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더욱이 1980년대 중반이후 중소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몰락하면서, 베트남은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베트남과 관계가 좋지 않으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긴장이 계속될 것을 우려했다. - P459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계속해서 서로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의혹의 많은 부분은남중국해에서 일어난 충돌과 석유채굴권 문제이다. 베트남은 또한 중국의급속히 성장하는 경제력과 군사력의 근대화 및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영향력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 P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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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협은 고노 담화가 발표되자 곧바로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잠시 일본 집에 돌아와 있던 터라 성명 작성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으나, 성명문을 팩스로 받아일본어로 번역해 관련 단체에 송신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음의 내용을 읽고 충격에 빠졌다.
"위안부는 당시 공창제도 하의 일본 매춘 여성과 달리국가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군대에서 성적 위안을 강요당한성 노예였고, 일본인 위안부는 "돈을 받았고, 계약을 체결했고, 계약이 끝나면 위안부 생활을 그만둘 수 있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성명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겪은강제성을 강조한 나머지, 공창(매춘부) 출신이 많았던 일본인 ‘위안부‘들과 비교해 그들의 ‘성격‘이 크게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명에서 드러난 사실 인식은 잘못된 것일뿐더러, 위 표현은 일본인 ‘위안부‘가 매춘부 출신이므로 ‘위안부‘ 제도하의 성 노예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 P72

국민기금 정책은 일본 정부와 국민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다하자는 취지에서 진행되었으나, 정대협은 처음부터 여기에 반대했다. 국민기금에서 피해자들에게 지불하는 것은 ‘위로금‘에 지나지 않는 바, 이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 단체들이 국민기금에 반대하는 것은 타당할 수 있으나, 국민기금을 수령할지 말지는 피해자 스스로가 정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동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 P76

재현하는 것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에 있지 않다.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encière)는 끔찍한 일을 이미지로 만든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 즉 인간성이 부정되는과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한 표현을 다른표현으로 대체함으로써 ‘본래의‘ 말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사건의 감각적 직조를 더욱 강렬하게 체험하게 만드는 형상이다. 따라서 형상화된 것은 사건의 ‘있는 그대로의 현존‘일 수없다. 그러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의 재현에 대한 질문을 바꿔야 한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점은 ‘가시적인 것을 분 - P108

배하는 방식 내에 희생자를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절대 홀로 작동하지 않으며, 가시성의 장치(apparatus of visuality)에 속한다. 이미지로 재현된 신체의 지위와 그 신체가 받아야 하는 주의) 유형은 그것을 규제하는 가시성의 장치 속에서 만들어진다. - P109

영화감독 장뤼크고다르(Jean-Luc Godard)는 "트래킹 (tracking)은 모럴"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우리가 자리를 잡아서는 안 되고 타자대신에 결코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때역사 과정 속에서 멈춰야 할 지점을 인정하는 정직함이 필요하다. 두려움과 떨림의 태도 속에서 접근해야만 할 대상이 있으며, 성폭력이라는 주제 또한 분명 그러하다. - P121

<귀향>은 시각화 과정에서특정한 이미지 기호의 선택과 배제, 표백과 과잉 현존을 통해 ‘민족적 수난‘과 ‘순결한 소녀‘라는 의미망의 연결을 만들어낸다. - P137

일본군 ‘위안부‘ 운동 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거나 후원 물품을 구매하는 데에는 ‘돕는다‘는 술어가 사용된다. 사회적 약자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금전적·정서적 지원을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선한 의도‘는 소녀상을방문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관련 굿즈를 구매하는 시민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자신의 작은 일상적 행동이 ‘우리 할머니‘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시민됨과 주체성을 확인하는 데 따른 효용감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단체가 생활 지원 외에 다른 사업을 하고 있다든가1993년 일본군 ‘위안부‘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의 생활 지원이 제공되고 있다는 것보다, ‘우리 할머니‘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선한다. - P168

국제정치학자 세라 버트런드에 따르면 안보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침묵에는첫 번째, 서발턴의 발화 행위를 억제하는 강제된 침묵, 두 번째, 서발턴을 위해 타인이 대신 발화하는 데서 생겨나는 침묵이 있다. 첫 번째 침묵은 다시 세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 서발턴의 발화 자체가 억제되는, 발화 행위에서의 침 - P239

묵. 둘째, 서발턴의 발화 후 이를 들을 수 있는 청중이 없는 발화수반 행위의 좌절. 셋째, 서발턴의 발화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발화 수반 행위의 불능. 중요한 것은 이 중 두 가지형태의 침묵이 서로 결합해 효과를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즉, 서발턴의 침묵이 강제됨에 따라 그것을 대신하는 발화가 나타나며, 이들을 대신하는 발화가 있기 때문에 서발턴은 스스로 발화 행위를 끝맺기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 P240

배봉기는 전후 오키나와에서 살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야만 했던 순간 이전에는 전쟁 전과 전쟁 후의 삶에 대해 발화할 수 없었다. 일본 제국령이었다가 전후 미국의 통치를 받은 오키나와에 ‘제국 신민‘으로 들어왔다가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던 배봉기의 역정은 결코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드러낸 이후 오키나와에서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청중이 있었지만, 남한에서는 그러한 청중이 형성될 수 없었다. 미국이 주도한 동아시아 냉전 체제의 하 - P264

위 파트너로서 남한은 조총련과 관계 맺은 이들에 대한 관심을 금기시했다. 또한 배봉기의 죽음은 민단과 조총련 간 경쟁적인 ‘대신 말하기‘의 정치를 활성화했고, 이는 배봉기라는존재의 복합성과 귀향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복잡다단한감정을 단순화했다. - P265

램지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계약이라는 합리적 경제행위에 참여한다는 주장을 게임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그는 게임이론이라는 이론적 틀을 표방하고 있을 뿐, 논문에서 어떤 수학적 계산도 내놓지 않는다. 그가 표방하는 게임이론은 업소와 여성 간 "신뢰할 수 있는 약 - P286

속(credible commitment)"에 기반한 게임적 상황을 전제하는도구로 소환된다. 이러한 경제 논리는 게임의 규칙과 질서를지정하고 공유한 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의존하고 있다. 합리적 인간으로서의 경제인이라는 모형을 통해 사회적 현실을 분석할 때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이 생산될뿐 아니라, 지배적 권력관계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기존의패권적 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은 주지의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모델은 인간의 본성을 동질화하고 일반화하려는 본질주의적 보편주의에 근거해 사람들 간의 차이를 배제와 차별의 이유로 자연화하고 정당화하는 원리로 사용된다. - P287

리지웨이에따르면, 성에 대한 공통된 문화적 믿음으로서의 성별 고정관념은 사회에서 성별 관계의 물질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암묵적인 문화적 규칙, 다시 말해 공유 지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공유 지식이 다시금 사회적 관계와 게임적 규칙을 만들어내는 원리로 작동하면서 성별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다는것이 그의 주장이다.
마이클 최에 따르면, "공유 지식은 집단적 조정을 도울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적 정체성, ‘상상된 공동체(imaginedcommunity)‘를 창출할 수도 있다." 램지어 논문의 주장은일본 우익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역사수정주의 집단과 결합하고 강화"되어 자신들의 입장을 집단화하고 있다. - P296

1991년 이전 ‘위안부‘ 담론은 당사자가 드러나지 않은채 주로 재현/표상(re-presentation)으로만 존재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재현/표상은 어떤 실재를 다시 (re, 再) 앞에 존재하게(presentation, 現)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표상은 문체, 수사적 표현법, 설명의 기교, 관습, 제도 등 역사적·사회적 여러 조건에 기반을 둔 표상 체계를 통해 생산되고 인식 주체의위치성과 이데올로기에 연루되기 때문에, 언제나 있는 그대 - P388

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것으로 나타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변형된 것‘으로서의 표상이 실재하는 대상을배제하고 표상 기술에 의존해 하나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위안부‘ 문제야말로 표상이 존재를 대체한 가장 명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참전 군인의 회고 속에 등장한 ‘위안부‘나 이를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번역한 ‘위안부‘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재현 주체의 욕망과 당대사회의 성차별적 표상 체계에 연루된 것이며, 그러한 욕망에 따라 계속해서 변형 · 증식되어 왔다. - P389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한 상황은 현재 한계에 다다랐다. 우선 신고와 등록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승인받는 권위적일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형식이다. 국민기금부터 근래의 정의기억연대 논란에 이르기까지, 법적 등록이 ‘위안부‘ 피해 생 - P418

존자들의 사회적 맥락에 따른 다양한 입장의 표현을 억누르고 단일한 대응을 강제하는 물적 토대로 작용했음을 부인할수 없다." 또한 이는 ‘위안부‘ 운동의 대중화를 자극했던 문학/영화 텍스트의 서사 양식을 지배하는 형식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커밍아웃이 꼭 정부에 등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면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어떻게전개되었을까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에 국적이라는 경계를 부여해 고통과 의미의 경중을 달리하는 인식의 형성에 부지중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 P419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피해국 위안부들의 상황은 한국의 여성운동의 성과로 드러나고 여러 나라가 활발하게 연대했지만,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증언과 가시화, 연구는최근의 일이다. 군 위안부 정책 전반에 대해 일본 정부가 ‘정부관여 부인‘을 ‘정부 관여‘로 바꾸게 만든 요시미 요시아키(吉見明)의 관련 자료 중에는 일본 정부가 자국 여성의 모집을 포함해 위안소를 통제하고 감독했음을 증명하는 문서가있다. 1938년 3월 4일자 ‘군 위안부 종업부(軍 慰安 從業婦)등에 관한 모집에 관한 건‘이 바로 그것이다. - P447

윤금이 투쟁은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 NL) 계열 대학생들의 동원력과 열정에 힘입은 바 크다.
당시 공식적인 윤금이살해사건공동대책위원회(윤금이공대위)는 모두 20대 남녀 활동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미군의 불의에 항거하고 미군 철수와 미군 범죄 근절을 외쳤다. - P451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들의 인식이다. 기지촌 여성의피해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고, 피해 여성이 성산업 종사자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이는 윤금이가 미군에게 참혹하게 살해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가장민중‘인 기지촌 여성은 미 제국주의의 억압과 피해를 상징했다. ‘양공주 하나로 미군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가진 이들조차 군 위안부와 기지촌 피해를 ‘혈맹‘에 따라오는 결과라고 주장했지, 강제와 자발로 구분하지 않았다. - P452

민족주의와 젠더가 맺는 관계는 상황적이다. 그것은로컬의 역사적 맥락과 해당 공동체 구성원의 행위성에 따라크게 달라진다. - P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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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9-18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 책 제가 지금 보려고 쌓아놓은 책인데 기대됩니다. 화가님 리뷰 기다려요.

거리의화가 2024-09-20 20:42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오랜만입니다^^
구매를 망설였던 책인데 막상 읽어보니 꽤나 괜찮았던 책입니다. 리뷰를 기다려주신다니 감사하네요^^

2024-09-18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9-20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