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타는 북에서 임명되어 온 중국인 관리였지만 토착문화에 익숙한데다자신을 현지인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한이 중원을 재통일한 후 기원전196년 중국 사신 육가(賈)가 조타를 남 비엣 왕에 봉하러 왔을 때, 그는현지의 관습대로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다리는 쭉 뻗은 채 앉아서 맞이했다고 한다. 육가가 그의 무례한 행동을 지적하자 조타는 남방의 만이蠻夷)속에 오래 살다 보니 예절을 잊어버렸다고 변명을 했지만 그것은 단지 변명일 뿐이었다. 이는 조타가 육가에게 "나와 황제[한 고조] 중 누가 더 현 - P27
명한가?"라고 한 물음으로도 알 수 있다. 육가가 인구와 면적을 고려하면 그것은 비교할 수도 없는 바라고 답하자, 조타는 자기가 중원에서 일어났더라면 한의 황제만 못할 리가 없다고 하였다. 조타는 남 비엣이 인구나 영토 면에서 한에 비해 작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을 섬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한과 대등한 독립왕조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 P28
967년에 딘 보린은 장자인 리엔을 남 비엣 브엉(Nam Viet Vuong, 南越王)에 봉하고, 다시 1년 후에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중국식 연호를 버리고 자신의 연호까지 제정하여 타이 빈(Thai Binh, 太平)이라 하였다. 남비엣 브엉이란 칭호는 전한(前漢) 초기 한에 대항했던 조타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6세기 리본이 남 비엣 황제라고 칭한 것도 같은 맥락인데, 이는베트남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중국 사료들은 리엔이 남 비엣 브엉에 봉해진 것을 딘 보린이양위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딘 보린의 칭제를 몰랐든가 아니면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편 베트남에서 독자적 연호의 사용은 리본이 티엔 득이라고 한 경우가 처음이며 이때가 두번째인데, 이 역시 황제의 칭호처럼 중국 군주와 대등하다는 표시이다. 딘 보린의 황제 칭호라든가 연호 제정은 이후 베트남 모든 왕조 군주들의 전례가되었다. - P130
응우옌 푹 아인은 북진에 앞서 1802년 5월 푸 쑤언에서 제위에 오르고연호를 자롱(Gia Long, 嘉隆)이라 정했다." 자롱이란 자 딘에서 탕롱까지란 의미로 베트남 전체를 뜻한다. 연호의 제정은 통일에의 그의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한편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정한 응우옌 푹 아인, 즉 자롱 황제는 5월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는 떠이 썬 정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의 도움을얻고자 찐 화이 득(Trinh Hoai Duc, 鄭懷德)을 여청정사(如淸正使)로 광둥에 보냈다. 그가 처음부터 청에 보낸 사절을 ‘여청사‘라고 한 것은 청과 대등하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P257
쩐 왕조가 원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쩐 홍 다오였다. 그는 천부적 전략가로,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수도까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적의 - P169
힘이 강할 때에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게릴라 전법으로 이들을 괴롭히다가상황이 호전되면 전면공격을 하는 등 소수 병력으로 강대국의 침략을 저지했다. 그리하여 쩐흥다오는 오늘날 베트남역사상 위대한 영웅 가운데한 사람으로 꼽히며, 신으로까지 추앙되어 모셔지고 있다. - P170
고립무원의 왕통은 황제의 철군 명령이 도달하기 이전에 레러이와 화약을 맺고 1427년 12월 철수를 서둘렀다. 레러이는 이때 500척의 선박과많은 양의 식량을 제공하여 명나라 군대의 철수를 도왔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항전 10년 만에 20년에 걸친 명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의 독립을 이뤘다. 레러이는 이를 기념하여 응우옌 짜이에게 글을 짓게 하였는데, 유명한 「평오대고(平吳大誥)」이다.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일찍이 듣건대 인의(仁義)의 거사는 요체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있고, 조민벌죄(弔伐罪)의 군사는 포악함을 제거하는 일보다 앞세우는 일은 없다고 한다. 우리 다이 비엣 국(國)은 진실로 문명화된 국가이다. 산천 - P199
의 경계가 다르고 남북의 풍속 또한 다르다. 우리는 찌에우(趙) • 딘(丁)·리(李)・쩐(陳)이 창업할 때부터 한·당·송·원과 더불어 각각 그 나름의 영토에서 황제를 칭하고 다스려왔다. - P200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종전 후 인도차이나를 신탁통치해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장제스에게 전후 인도차이나 지역을 통제하에 둘 것인가를 묻자, 장제스는 그곳 사람들은 다루기가어렵다고 하면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직접 언급은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장제스에게는 국내의 공산당과 군벌 같은 문제가 인도차이나보다 더중요했다. 그때문에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대신 제안하기를, 인도차이나가 전후에 독립할 수 있도록 중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장제스의 이러한 제안은 1943년 중국 내의 여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의 정치지도자들과 지식인들 대부분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지배권은 박탈되어야만 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누가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 P308
하노이정부는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캄보디아왕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베트남에서 훈련받고 귀국한 인물들이론 놀에 대한 왕정의 저항운동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지만 북베트남군의 주둔을 원치 않던 친중국 계열인 폴 포트(PolPot)의 크메르루주(Khmer Rouge)가 1971년 7월 베트남공산주의자들과의관계를 끊기로 결정하고 베트남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캄보디아인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여 1972년에는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 P417
1975년 통일 후 하노이정부는 남부의 정치적 통제와 사회주의화 정책의 필요성에 의해 남부 화인의 통합을 위한 급격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앞서 호찌민 시가 점령된 1975년 4월 30일 밤 중국인들의 거주지인 쩌런(Cholon) 지구에서는 중국 국기와 마오쩌둥 초상화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는가 하면, 일부 중국인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 물자를 매점매석하여 경제상황을 악화시켰다. 3001976년 1월 베트남정부는 남부의 모든 화인들에게 국적을 등록하게 하고, 이어 2월에는 강제로 베트남 국적을 취득케 했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식량배급에서도 차등을 두었다. 다시 이듬해 2월하노이정부는 베트남 국적 취득을 거부하는 화인들에게 직업을 제한하고이주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자유의사 형식으로 귀국시킬 방침을세웠다. - P441
중국의 1979년 2월 베트남 침공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 아니었는가 한다. 양국의 분쟁이 특별히 어느 쪽으로 유리하게작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양자는 전쟁의 승패를 떠나 언제까지대립할 수만 없었다. 베트남은 전쟁을 통해 중국의 전통적 중화주의를 재삼 인식하면서 앞으로도 계속될 위협에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생각하며타협점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더욱이 1980년대 중반이후 중소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몰락하면서, 베트남은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베트남과 관계가 좋지 않으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긴장이 계속될 것을 우려했다. - P459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계속해서 서로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의혹의 많은 부분은남중국해에서 일어난 충돌과 석유채굴권 문제이다. 베트남은 또한 중국의급속히 성장하는 경제력과 군사력의 근대화 및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영향력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 P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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