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한국의 오리엔탈리즘
학술서와 문학 작품 사이의 역학적 관계
통치사상과 지적 규율 사이의 관계
*“오늘날 오리엔탈리즘에 대체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 타인을 억압하고 조작하지 않고 절대적 자유와 자치의 입장에 서서 상이한 문화와 상이한 민족에 대한 연구

*문화적 지배의 구조, 자신이나 타자에게 문화적 지배의 구조를 적용했을 때 위험성과 유혹에 대한 인식

크로머가 기록한 <현대 이집트>는 1911년 일본에 번역되어 한국 침략을 위한 일본의 참고문헌으로 이용되었다?
-> 어떤 식으로 기술되어 있을지 실제 확인해보고 싶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과 그 곳에서 행한 철저한 조사에 의한 출판에 의해 유럽에 의한 서양이 동양을 점령 및 지배해도 된다는 생각의 바탕에 시작이 되었음.
그리고 수에즈 운하가 일으킨 동양, 이슬람에 대한 거리감 좁히기

오리엔탈리즘의 한계 다른 문화, 민족, 지리적 구분 속의 인간존재를 무시하고, 정수를 뽑아 버리며, 그것을 박탈하는 결과로 생기는 한계. 동양을 서양을 위한 구경거리로 보고 서양에 대해 고정된 그대로의 존재로 보이게 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총체적으로 동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오리엔탈리즘이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동양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서양 때문이다. - P52

세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아랍과 이스라엘에 관한 인식은 가장 단순한 것조차 고도로 정치화되어 거의 혐오스러운 문제로 변했다. 첫째, 서양의 대중적인 반아랍적/반이슬람적 편견의 역사가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아랍과 이스라엘 시오니즘 사이의 투쟁으로서, 그 투쟁이 미국의 자유주의적인 문화와 대중 쌍방에게 그리고 동시에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왔다는 점이다. 셋째, 아랍이나 이슬람과 연대하거나 그것에 관하여 냉정한 입장에서 논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상황이 거의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늘의 중동은 강대국의 정책, 석유경제 그리고 자유를 존중한다는 소위 민주주의 이스라엘과, 이에 대해 사악한 전체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라는 아랍을 대치시키는 단세포식 사고의 이분법이 세 가지 요소와 완전히 동일시되고 있다. 따라서 중동이 화제가 되는 경우 그 화제에 대해서만 분명히 얘기하는 논의가 성립될 여지가 거의 없다. - P60

그에 의하면 종속 종족에게는 자신에게 무엇이 선인가를 알 힘이 없다. … 크로머에게 편리했던 점의 하나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조건은 달랐어도 동양인에 관한 취급방식이 대체로 동일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동양인은 어디에서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 P76

크로머의 서술에는 스스로의 관찰에 근거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여기저기에서 정통 오리엔탈리즘의 권위자들(특히 에르네스트 르낭과 콘스탄틴 드 볼네)를 인용했다. 동양인이 이렇다 저렇다 하고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이러한 권위에 완전히 복종했다. - P79

특유의 표상적인 담론의 영역은 상상의 지리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담론에 의해 사실로 인정된 사항-예컨대 마호메트가 사기꾼이라고 하는 것-은 담론의 구성요소이며, 마호메트의 이름이 나타나는 때에는 언제나 담론의 기능에 의해 사람들을 반복시키게 한 하나의 서술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담론 속의 여러 가지 구성요소-곧 동양을 말하거나 쓰는 경우에 언제나 사용되는 어휘-의 밑바닥에는, 표상적인 비유표현의 집합이 숨어 있다. 이러한 비유표현과 현실의동양(매지는 여기서 주된 관심 대상인 이슬람) 사이의 관계는, 연극에서 양식화된 의상과 등장 인물 사이의 관계와 흡사하다. … 그 연극무대에서는 관객도, 감독도, 배우도 유럽을 위하여, 단지유럽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 P134

동양은 그 최근 현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유럽의 먼 과거와의 일련의 접촉에 대하여 부여된, 가치평가의 집합체로 존재했다. - P158

인간적인 것과 직접 만나서 방향을 상실하는 것보다도, 도리어 텍스트의 도식적인 권위를 더 좋아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결점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결점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특히 텍스트 의존적인 태도가 지배적일 수 있는 특수한 조건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고 위협적이며 과거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 매우 가깝게 만나는 경우
-(텍스트로 인해서) 성공이 초래되는 경우
-> 지식과 현실은 담론(푸코)을 낳고 담론의 내부에서 생긴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본질은 담론의 실체적 존재나 무게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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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ing

오리엔탈리즘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19세기 초까지는 인도와 성서관련국만을 의미한 동양 사이에서 경험된 특수한 근접관계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초엽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프랑스와 영국이 동양과 오리엔탈리즘을 지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동양을 지배하게 되었고 과거의 프랑스, 영국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동양에 접근하였다. 이러한 근접관계의 힘은, 심지어 그것이 항상 서양의 동양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시위하여 왔다고 해도 너무나도 생산적이었다. 이러한 근접관계의 내부로부터 내가 오리엔탈리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방대한 분량의 텍스트가 나타났다. - P19

오리엔탈리즘이란 지정학적 지식을 미학적, 학문적, 경제적, 사회학적, 역사적, 문헌학적인 텍스르토 분배하는 것이다. 또한 오리엔탈리즘이란 지리적인 기본 구분일 뿐만이 아니라, 일련의 ‘관심’, 곧 학문적 발견, 문헌학적 재구성, 심리학적 분석, 풍경, 사회학적 서술과 같은 매개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관심’을 주도면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오리엔탈리즘이란, 우리의 세계와 명백하게 다른 (또는 우리의 세계와 대체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배하고 조종하며, 심지어 통합하고자 하는 일정한 의지나 목적의식-그것을 도리어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도 도리어-그 자체이다. 무엇보다도 오리엔탈리즘이란 하나의 담론, 곧 살아 있는 정치권력과 직접적인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아니라, 도리어 다양한 권력과의 불균형적인 교환과정 속에서 생산되고, 또한 그 과정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식민지 제도나 제국 제도에 나타나는) 정치권력과의, (비교언어학, 비교해부학 또는 현대의 여러 가지 정책과학과 같은 유행 학문에 나타나는) 지적 권력과의, (취미와 텍스트 그리고 가치에 관한 정통성 및 규범에 수반되는) 문화적 권력과의, (‘우리의’ 행동에 관한 관념 및 ‘그들은’ ‘우리와’ 같이 행동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관념에 나타나는) 도덕적 권력과의 교환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형성된 것이다. 사실 참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이 현대의 정치적 지적 문화의 중요한 차원 가운데 하나를 단순히 대변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바로 그 차원 자체로서, 동양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세계와 더욱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 P35

인문학의 연구는 각각의 연구, 그 주제, 그 역사적 상황이 형성하는 독특한 맥락 속에서 지식과 정치의 관련성이 갖는 성질을 정식화하여야 한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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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미즈의 <마을과 세계>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을 통해 개인의 삶에서 나아가 철학과 사회, 역사까지 아우르는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절감하고 있다. 몰랐던 정보를 얻는 것도 좋지만 그녀의 삶에서 배우는 삶과 사회에 대한 통찰까지 덤으로 얻어간다. 이 고급 정보가 에세이로 담겨 쓱쓱 읽혀서 더욱 좋다.


마리아 미즈는 어릴 적부터 농민의 딸로 태어나 자급자족하는 삶을 느끼고 배웠다. 내 땅을 소유한다는 것, 사회적으로 보장되었던 공유 재산의 가치, 공동 작업과 상호 부조에 대한 중요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말이다. 

1930년대 이후 독일에 나치당이 사회에 뿌리 내렸고, 생활하던 마을에도 불어닥쳤지만 미즈의 부모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미즈는 이런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했기에 나치즘을 설파하는 학교 교사에 대해서도 동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930년대 후반을 지나며 아이들은 전쟁놀이가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것을 짐작하며 성장했다(적군은 늘 프랑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미즈의 다섯 오빠들은 징집되어 독일 상비군으로 동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전쟁으로 마을에 난민들이 들어닥치자 미즈의 가족들은 피난처를 제공하며 그들과 함께 지냈다. 미즈는 그들에게서 대도시의 폭격과 기아, 파괴 등 처참한 전쟁의 피해에 대해 듣는다. 

상대적으로 서부에 치우쳐 있던 마을은 전쟁 초중반까지는 버텼으나, 미국이 프랑스를 침공한 뒤 독일까지 밀고 들어와 마을이 공격받자 지하실로 대피해야만 했다. 

그래도 전쟁은 끝이 났고 전쟁터로 떠났던 미즈의 오빠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이 험난한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미즈의 어머니의 자급자족하는 자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 말이다. 


미즈가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여러 모로 인상적이었다. 

기독교 도제 하의 교육 시스템은 소년 기숙사만 제공되었고 소녀기숙사는 없었는데 나치는 체제에 협력하고 부응하는 학생을 길러내기 위해 과거의 이런 관행을 깼다. 나치즘은 문제지만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준 것은 일정 정도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보여서 섬뜩하다.

15살 이후가 된 소녀는 다른 집에 가서 일을 해주는 하녀로 있다가 결혼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미즈는 이를 거부했고 16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그녀는 학교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 ‘인도’라는 세계를 만나 외국어 학습을 할 기회가 생겼고, 종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타자를 통한 사랑은 사람에 대한 이해, 페미니스트로서의 씨앗을 뿌리내리게 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는 후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이들의 삶을 흥미롭게 만든다는 철학 하에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그 세계가 좁다고 느꼈다. 세계로 나가 변화를 돕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것이다.

이에 그녀는 인도에서 독일문화원 강사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미즈는 인도의 종교, 카스트 규범 제도와 인도 여성의 실제 삶 간의 괴리 등을 보면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녀의 지인이 한 말이 후에 그의 삶을 바꾸었다. “계급 투쟁을 보았다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5년을 채우고 돌아오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투병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그녀를 받아줄 만한 그릇의 사회가 아니었다. 1968년의 세계적 분위기 속에서 미즈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마르크스주의에 감화를 받았다. 마르크스가 말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가 그녀를 행동하는 삶을 지속하도록 만들었다. 

가톨릭교로 자란 그녀는 야간시국기도회의 참여를 통해서 종교(교회)와 정치가 통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는 여성 차별과 억압 문제까지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71년 1월 야간시국기도회 체제공개비판 선언을 통해 그녀는 종교가 더는 억압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고 이를 버린다.


이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쾰른 폭행 피해 여성 쉼터를 위한 투쟁을 통해 여성에 대한 사적 폭력이 공적인 사회 문제로 전환될 수 있도록 도왔다. 페미니스트 연구 방법론을 통해 자본주의 하에서의 여성의 가사 노동이 일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이는 비단 여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농민과 농촌은 낙후되고, 노동자와 도시는 진보적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대한 일침이기도 했다. 

나는 ‘노동’, ‘생산 노동’ 같은 용어를 명확히 하고 싶을 때마다 마르크스의 파란색 책을 꺼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의 정의는 자본주의에서 가사 노동의 의미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1972년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Luxemburg, 1913)을 읽은 사람은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룩셈부르크가 ‘자본 축적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비자본주의 환경’도 점점 더 많이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어떻게 증명했는지 우리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 ‘비자본주의 환경’이 농민, 소규모 수공업자, 일용직 및 식민지 노동자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유엔에서 정한 ‘비공식 부문’의 착취는 필연적으로 이들의 생계를 파괴한다(Bennholdt-Thomsenm, 1981).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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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2-22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해요.
읽은 글들, 페이퍼 보며 다시 정리가 되니 좋네요^^
끝까지 잘 읽을 수 있겠죠?
전 1/3쯤 남았네요~~~

거리의화가 2024-12-23 07:56   좋아요 1 | URL
은하수 님 저도 정리 차원에서 올렸는데 도움이 되신 것 같아 기쁘네요^^
1/3이면 얼마 안 남으셨네요. 크리스마스가 껴 있는 주인데도 불구하고 나라가 뒤숭숭해서 연말 분위기는 안 나지만 모쪼록 마음만은 따뜻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추운 날씨 건강 잘 챙기시구요!
 

2

1939년 이후 우리 마을과 헛간에는 항상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에는보병들, 그다음에는 다른 육군 부대가 여럿 왔다. 1944년 가을이 끝나갈 무렵에는 나치친위대(SS)가 왔다.
군인들은 향수병에 시달리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들은 마을 사람을만나고 싶어 했고 우리 집 거실과 부엌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우리는 겨울에 유일하게 따뜻한 방인 부엌에 라디오를 하나 놓았고 그곳에 모여 뉴스나 음악을 들었다. 내 동생들은 군용 빵이나 ‘야전 주방‘에서 가져온 음식을 주는 군인들과 함께 놀았다. - P63

아우엘은 다운에서 처음국가사회당(NSDAP) 단위가 생긴 마을이었다. 규모가 꽤 큰 소방대 행렬이 나치 깃발을 휘두르는 사진이 내게 있다. 1934년의 학교 사진도 있는데 소년들은 나치 완장을 찼다. 사진 속 큰언니는 세 살이던 나를 팔에 안았다.
국가사회당과 나치돌격대 (SA)의 구성원은 주로 실업자였다. 이 젊은이들은 종종 노래를 부르고 깃발을 흔들며 마을을 행진했다. 아버지는그들을 경멸했고 ‘게으름뱅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도 그들을 미워했고특히 오만한 지역당 지도자를 싫어했다. 1930년대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중앙당에 동조했다. - P61

어머니는 가만히 앉아 "삶은어떻게든 계속될 거야"라고 혼잣말만 하지 않았다. 또한 기독교인 농부의 아내지만 "주님께서 베풀어주시겠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자신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 살기 위해 자연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것을 알았다.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것이 어머니의 소망, 열정, 철학이었고 그녀에게 용기와 활력을 주었다.

지금까지-특히 전쟁과 재난 이후-딸, 아들, 남편, 자연을 위해 삶이 계속되도록 책임진 사람은 어머니와 같은 여성들이었다. 남성이 자연과 외국인에 맞서 전쟁을 벌이면 그 뒤를 치우는 것은 여성이다. 우리는 가부장적 전쟁 이후에도 삶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그런 전쟁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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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을 선포할 상황인지 판단할 권한은 대통령에게 속하지만, 이를 해제할 상황인지에 대해서는국회 판단이 우선한다.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고 공고해야 한다(계엄법 제11조 1항). 계엄을 해제할 때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계엄법 제11조 2항). 국무회의 심의 결과와 무관하게, 국회 해제안이 가결되면 계엄을 유지할 권한이 대통령에게는 없다. - P43

‘재적의원 과반수 찬성‘이라는 계엄해제 요건은 1972년 유신헌법의 잔재다. 그 이전에는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정족수가 따로 명시되지 않으면 ‘일반정족수‘로 해석한다. 일반정족수는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과반수 찬성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네 차례 선포했다. 군사독재 정권이 국회 권한을 약화하기 위해 삽입한 조항이 52년 만에 또다시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법학계에회의 서는 추후 개헌을 통해 이 조항을 원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 P43

헌법과 법률어디에도 ‘계엄을 통해 국회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는 규정은 없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과 국방부, 계엄사령부는 국회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군을 투입해 계엄 해제안 논의를 방해했다. 이 대목에서 사건은 ‘전시·사변 여부‘ 등 헌법과 계엄법상 절차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형법상 내란죄의 논리다.
12월3일 계엄을 곧 내란과 연관 짓는시각이 낯설 수 있다. 대규모 유혈 사태나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적 탄압, 군부의사회 전반 통제가 내란의 ‘요건‘이라고여기기 쉽다. 내란죄라는 사례 자체가 접하기 어려운 데다, 내란을 일으킨 군부독재정권 인사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극단적 조치를 동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법이 규정하는 내란죄의 요건은 그보다간략하고 명확하다. 내란이란 "대한민국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형법 제87조). - P44

다시금 계엄 포고령을 읽어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유신정권과 5공의 언어로 쓰여있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이제는사어死)가 되어버린 "처단"이라는 말.
그것은 적어도 정부가 국민에게, 혹은 의료인이나 어떤 특정 직업군에도 직접 쓸수는 없는 위협의 언어다. 또한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 - P60

는 대목에 이르면, 이들이 유튜브와 카카오톡을 어떻게 분류하는지가 궁금해진다. 우리 공동체가 지난 40년 동안 피와땀의 대가로 얻어낸 소중하고 작은 하나의 성취, 시민적 자유, 그것이 갑자기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훼손된, 모욕받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말이다. - P60

대통령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정치라는 전장(戰場)이추악하고 더럽게 보일망정 적어도 말과 절차로 싸우는 필수불가결한 곳이라는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래도 총칼을들고 직접 싸우는 내전(內戰)보다는 낫기때문이다.
정파 간 말이 험해지고, 절차가 무너지고, 심지어 몸싸움이 일어날지언정, 민주화 이후 우리 정치에 총칼이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더럽고도 신성한 공간에 대통령은 계엄이라는 총과 칼을들고 들어옴으로써 스스로 대통령의 역할(정치)을 포기했다. 포기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가 정치 공동체의 가장 큰 위협임을 보여주었다. 두려움, 안도, 비웃음, 분노, 의문 이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윤석열이라는 이름을 빼고 다시 보더라도, 위의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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